한국전쟁 제1호 피난민 이승만, 그의 충격적 행보

[서평] 신기철의 <국민은 적이 아니다>

등록 2014.05.09 05:52수정 2014.05.0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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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은 적이 아니다> 책 표지
<국민은 적이 아니다> 책 표지헤르츠나인
이승만 대통령은 낚시를 좋아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6시 30분, 이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이른 아침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서울 창덕궁의 비원 반도지에서였다. 그때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이 들어와 전쟁 발발 소식을 보고한다. 평화로운 낚시와 전쟁 보고의 결합은 그로테스크해 보였다.

오후 2시, 이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가 열렸다. 1시간 30분간 이어진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다. 하지만 회의 직후 이 대통령은 대통령령 제377호로 <비상사태하의 법령공포식의 특례에 관한 건>을 공포했다. 비상사태하의 법령 공포를 신문이나 라디오, 기타 적당한 방법으로 할 수 있음을 규정한 대통령령이었다.


이를 통해 이 대통령은 긴급명령 제1호로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공포했다. 6월 28일부터 국민보도연맹사건을 격발시키고, 국군 수복 후 수많은 시민을 부역 혐의로 몰아가 살해하는 사회 규범으로 작동한 야만적인 법령이었다. 그것은 이승만 정부가 침략하는 적보다 적에 협력할 것으로 보이는 국민들을 더 두려워했음을 의미하는 생생한 증거였다.

밤 9시, 이 대통령은 무초 주한 미국 대사를 만나 '내가 공산군 손에 들어가면 나라가 곤란하게 되니 서울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다'라는 뜻을 전했다. 무초는 '잡히는 것은 안될 일이지만 잡히기 전까지는 서울에 머물러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국가 원수이자 전시 최고사령관인 대통령의 당연한 책무였다.

이 대통령은 즉시 피난 갈 것을 거듭 고집했다. 결국 6월 26일 오후 3시에 피난을 공식 결정했다. 그 시각 국회에서는 서울 사수와 철수 문제를 놓고 밤샘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찬반투표로 서울 사수가 결정되었다. 그 결과를 알리기 위해 국회 대표가 경무대를 방문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없었다. 한국전쟁기 대한민국의 제1호 피난민이 대통령임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 대통령은 서울역을 새벽 4시에 출발해 낮 12시 30분에 대구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멀리 왔다는 조언 때문에 열차를 되돌려 대전으로 갔다. 오후 4시 30분이었다.

이 책이 전하는,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국부'로 추앙받는 이승만 대통령의 한국전쟁 발발 직후 행적이다.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모습이다. 이후의 행적은 더욱 기괴하다.


대전으로 내려간 이 대통령은 국민들의 피난을 가로막는 거짓 연설을 방송했다. 며칠 뒤에는 대전보다 남쪽인 부산으로 피난했다. 서울 영등포 전선이 굳건히 지켜지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이제 남겨진 의문은 대통령이 제1호 피난민이 된 경위가 아니라 대통령이 가장 먼저 도망하는 나라가 어떻게 무너지지 않았는지에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국민은 적이 아니다>는 한국전쟁의 이면사를 살핀 책이다. 전쟁 발발 시기에 국민의 안위는 무시한 채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이해득실만을 따진 권력자와, 광기 속에서 벌어졌던 민간인 집단학살의 배후 추적 등을 통해 그 역사적인 진실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저자의 손끝에서 나온 추적의 결과물들은 충격적이다. 피난민 제1호가 대통령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정부가 서울시민과 국군을 버리기 위해 한강 다리 5개의 폭파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는 사실은 경악스럽다.

한국전쟁기 최대의 비극이었던 민간인집단학살사건은 이 책이 가장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내용의 한 축이다. 저자는 서울 수복 시기를 전후한 시점으로부터 그 이듬해까지 벌어진 민간인학살사건들을 살폈다. 학살당한 민간인들은 강원도, 경기도 등 전방 지역과 후방인 호남, 경남 지방을 아우르고 있다. 그 대상도 형무소 재소자, 국민보도연맹원뿐만 아니라 어린이와 노인, 여자 등이 포함된 일반 주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그렇게 해서 한국전쟁 중에 학살당한 민간인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편찬한 <한국전쟁사>에서는 비상경비사령부 통계를 바탕으로 전쟁 발발 후 10월 31일까지 학살된 민간인 숫자를 106만 968명으로 집계해 놓았다고 한다. 저자는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를 종합한 결과를 바탕으로 민간인학살자 수를 최소 10만 명 정도로 제시해 놓고 있다.

저자는 민간인학살이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 민간인으로 구성된 치안대 등 청년단원들의 손에 저질러졌음을 실증적인 자료들을 통해 밝히고 있다. 한국전쟁 중 국군의 후퇴 과정이 국민보도연맹사건의 발생 과정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 국군이 전투의 진행과 별개로 동시에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는 사실도 확인하고 있다. '살인부대'로 불릴 만한 헌병대나 방첩대(CIC)의 지휘에 의한 학살은 특히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민간인 학살은 전투성과로 보고되기까지 했다.

방어를 위한 전쟁이라면 공동체의 영토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 그 목적이므로 집단 학살이 발생할 수 없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의 한국전쟁은 방어 전쟁이라고 하면서 점령군이나 저질렀을 법한 집단 학살을 일으켰다. 그것도 후퇴하는 과정에서 그 직전에 일으켰다. 아주 사악한 점령군이나 저지를 수 있는 만행이었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사악한 정권은 자신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짓을 저질렀다. 정말 상상만 하던 짓, 즉 적을 도울 것 같은 국민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짓을 저질렀다. (135~137)

저자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 때문에 놓친 한국전쟁기의 사건으로 호남 지역 국민보도연맹사건을 들고 있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군 수뇌부는 낙동강 전선 구축의 시간을 벌기 위해 인민군과 피난민을 호남 지역으로 유도했다. 그 결과 호남 지역은 본격적인 전선이 펼쳐지지 않았는데도 한국전쟁 시기 최대의 피해 지역이 되었다. 전술적 판단에 따라 호남 지역을 적에게 일부러 내준 처참한 결과였다.

그 과정에서 호남 지역 민간인들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인민군에 의해 반동으로, 또는 국군 수복 후 경찰에 의해 부역 혐의로 희생당했다. 순전히 학살을 목적으로 편성된 경찰살인부대인 '나주경찰부대'는 인민군으로 위장한 채 주민들을 기만하는 방식으로 학살극을 벌였다고까지 한다.

고의든 아니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든 이승만 또는 미국의 호남 포기 과정은 전쟁의 반민중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는 호남 지역 국민보도연맹사건, 나주부대사건 등에서 입증되듯이 전투에 쓸 총과 총알은 대전으로 보내 없었다고 하면서도 학살에 쓸 총과 총알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41쪽)

한국전쟁 중 군경이 학살한 부역자들은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저자에 의하면, 국군 수복 당시 인민위원회 간부 등 부역자 대부분은 이미 월북해 피신했거나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인민군 점령하 인민위원회 간부들 또한 선거를 통해 선출된 사람들로 각 리의 주민대표자들이었을 뿐이라고 한다.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저자는 민간인학살의 가해자와 관련해서도 오해가 없어야 함을 강조한다. 우리 사회 한켠에는 부역혐의학살사건을 '개인감정'에 의한 사적인 보복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국가의 개입 이전에 개인이나 집안 사이의 갈등을 중심으로 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대부분의 민간인학살사건이 그 초기부터 공권력이 개입해 있었음이 확인된다고 말한다. 저자가 민간인학살의 최종 책임자를 이승만으로 규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저자는 독일 사회학자 볼프강 조프스키의 말을 인용해 전쟁의 본질이 비무장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학살에 있다고 말한다. 지난 2012년 국방부 표준교안에서 국방부가 다루는 종북주의 논란을 소개한 배경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당시 국방부는 종북세력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부정하면서 북한의 노선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세력'이라고 주장하면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했다. 저자는 국방부의 이런 시도를, 정치적 의도를 떠나 제노사이드의 관점에서 볼 경우 실제 그 내용에 매우 심각한 위험 요소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종북세력에 대처한다는 빌미로 장병에게 국민을 증오하도록 선동하는 행위는 전쟁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을 높인다. 이런 행위는 장병들에게 생명 경시의 풍토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장병들 사이의 관계를 위험으로 몰고 가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우리 외부의 적은 같은 민족이고 내부의 적은 같은 민중인 것 같다. (295~296쪽)

세월호 참사 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존재 의미를 묻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나는 그들을 국민이 아니라 '인민(people)'으로 부르고 싶다. 국가를 이루는 필수적인 요소이면서도 강고한 국가주의의 대상으로 전락하곤 하는 순응적인 '국민'은, 국가를 향해 '이게 국가냐'며 불온한 질문을 던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링컨은 게티즈버그에서 '인민의(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부'를 역설했다. 그가 결코 '국민'을 말하지 않았음에 주목하자. 그는 분명 '국민'이 아니라 '인민'이 만드는 정부의 힘을 믿었을 것이다. 그런 정부가 이끄는 국가야말로 진정으로 강한 나라가 되리란 것도.

사람들이 스스로를 인민으로 여기는 나라에서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고는 일어나기 힘들다. 그런 사고가 났더라도 정부가 우왕좌왕하면서 무능함을 보이고, 대통령이 입으로만 사과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국민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진정한 주체인 인민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지 않은 한 우리는 언제든지 대통령이 전시 피난민 1호가 되고, 그가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야만적인 상황에 부닥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국민은 적이 아니다>(신기철/헤르츠나인/2014.4.20/15,000원)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 그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신기철 지음,
헤르츠나인, 2014


#<국민은 적이 아니다> #신기철 #헤르츠나인 #이승만 대통령 #민간인학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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