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흥도 사진 - 이작전이 끝난 뒤 클라크 첩보부대가 상륙했다. 이들이 팔미도 등대와 인천 해안가를 정찰했다지만 그 옆에서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있었다. 기념비 옆에 있는 휴게시설이 바로 그 장소이다.
신기철
- 이 책을 쓰는 작업을 하면서 "공식적인 국방부 사료에 기재된 (한국전쟁) 당시의 전황이 (피해자) 구술 증언들로 파악된 전황과는 다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특별히 주로 어떤 점들이 달랐는지? 그리고 달랐던 이유는 뭘까?
"대표적 사례로 국방부 공식 역사서인 <한국전쟁사>에는 해군의 이(李) 작전을 통해 영흥도와 덕적도의 인민군을 소탕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주민들은 당시 섬에 주둔하던 인민군은 없었다고 하며 심지어 소총을 갖고 있던 사람들조차 없었다고 했다. 상륙 해군에 대한 무력 저항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군의 입장에서 이렇게 뻔한 거짓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도 자신들의 주장에 시비를 걸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합리화함과 동시에 이를 전공으로 미화시키려는 사악한 의도가 숨어있었겠다. 이런 의도는 그들이 죽고 없어진 지금도 여전히 그 후배들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
- 인천상륙작전시 옹진 남부에 상륙한 해군들 때문에 인민군이 아니라 주민들이 죽었다고 했는데 왜 우리 해군에게 인민군이 아니라 주민들이 희생된 것인지?
"이(李) 작전이 시작되던 1950년 8월 16일 문갑도, 덕적도, 이작도, 영흥도에는 주둔하던 인민군이 없었다. 인민군이 없었다는 사실은 주민들의 증언뿐 아니라 작전을 지휘했던 이희정 사령관 스스로도 증언을 통해 확인된다.
한편 <한국전쟁사>는 모두 '적'을 사살했다고 적고 있다. 덕적도에서는 26명, 대이작에서 7명, 영흥도에서 6명의 '적'을 상륙하면서 사살했다는 것이다. 지난 진실위의 조사와 이번 조사결과를 종합하면 문갑도에서 교사 김종철, 덕적도에서 임산부 등 26명, 대이작도에서 8명, 영흥도에서 100여 명이 당시 목숨을 잃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란민 등 민간인에 대한 미군의 공식적인 입장이 드러난 때는 1950년 7월 말과 1951년 1월 초였다. 앞의 시기는 낙동강 전선이 구체화되기 시작하던 때였고 뒤의 시기 역시 경기 남부, 강원 남부에서 전선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극심한 미 공군의 폭격피해가 발생한 때다.
1950년 7월 25일 대구에서 모인 미군지휘부와 이승만 등은 '피란민들은 전선을 통과할 수 없다'라는 결정을 내린다. 작전지역 내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을 합리화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미 그 전부터 작전지역 내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일상적이었다는 것은 국민보도연맹사건이 잘 보여주지만 이 회의 직후 발생한 피해가 바로 '영동 노근리사건'이었다.
옹진에서 1950년 8월 16일부터 시작되었던 이(李) 작전 민간인학살 피해는 바로 그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1950년 8월 17일 경남 통영에서 있었던 국군 해병대의 상륙작전피해, 같은 시기 완도 등 전남 도서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공격에서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민간인학살, 정말 오발이었을까?
- 해군의 옹진 북부 상륙과 학살에 대한 내용 중에 "정말 오발이었을까?"라고 묻는 질문이 있다. 해군이 그럼 오발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민간인학살범죄가 사실로 드러났을 때 가해자 집단이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 사례다. 오발 즉 실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피해자는 살해당해 더 말을 하지 못하는 반면, 가해 사실을 입증할 목격자나 증거가 없었을 때 어느 가해자가 의도적으로 살해했다고 할까? 온갖 상상을 통해 변명할 것이다.
북도면 장봉도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부역 혐의로 잡혀 온 한 청년의 모친이 거세게 항의하면서 등불이 넘어졌고 해군은 얼떨결에 총을 당겼다고 했다. 그래서 청년과 모친, 두 분 모두 사살당했다. 등불이 꺼진 어두운 창고에서. 또 다른 사건에서는 실탄이 장전 된지 모르고 배를 찌르다가 총알이 나갔다는 건데, 학살사건에 대한 전형적인 사후합리화라고 할 수 있다."
- 주민들은 인천상륙작전 시기에 옹진군 대부분의 섬에 인민군이 주둔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해군의 섬 상륙 이후 인민군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덕적군도와 영흥도의 주민들이 공격받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왜 해군은 이 지역주민들을 공격했다고 보나?
"미 극동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다며 먼저 첩보부대를 투입하려 했다. 해군은 이들 미군 첩보부대의 안전을 위해 작전지역 내 주민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나는 덕적군도 등 섬 주민에 대한 해군의 시각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고 본다. 이는 이승만 정권이나 미군 지휘부의 시각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군과 이승만은 1950년 8월부터 수복 후 부역자 처리를 준비했고 9월에는 구체적인 지침을 공문으로 지시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1950년 9월 16일과 18일 '부역자를 단호히 처단하겠다, 공개총살 하겠다.'는 협박성 기자회견을 열었다. 9월 22일에는 '공산당이었다면 부모형제 간이라도 처단하라'고 했다. 수복지역을 바라보는 해군의 태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이들은 자신들이 방위하지 못해 국민들이 적의 손에 넘어간 것에 대해서는 전혀 반성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