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이관술씨
신기철
- 한국전쟁 중 대전형무소에서 희생된 이관술씨와 고양 금정굴에서 희생된 어수갑씨는 어떤 분들이었고 어떻게 희생되게 되었는지?"두 분 모두 좌익계열의 항일운동가로 해방 후 분단에 반대한 활동을 했으니 이승만에겐 기회만 있으면 제거해야 할 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1950년 당시 오십 전후였으며 전쟁과 관련된 행위와 무관하게 정치적학살의 희생자였다. 두 분의 희생경위를 간략히 요약해 드린다.
1902년 울산 울릉도 출생인 이관술 선생은 1932년 반제동맹을 결성 1933년 체포되었으며, 1934년 석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준비그룹'에 가담했다. 1941년 1월 체포되었으나 건강악화로 1943년 11월 가석방되었고 이후 도피생활 중 해방을 맞았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총무부장이 되었으며,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위 결렬 직후 발생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수배, 7월 6일 체포되어 194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이 확정, 대전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헌병대에게 학살되었는데, 저명한 반정부인사를 먼저 학살했으므로 희생 시기는 초기인 7월 3일이었을 것이다.
1896년 김포 하성면 출생인 어수갑 선생은 1919년 강원 원주에서 교육활동 중 3․1 만세운동, 1919년 6월 중국 북경으로 피신하여 독립운동에 투신, 1921년 7월 북경에서 이회영을 만나 그해 말 열리는 '태평양회의'에서 독립을 호소하기로 하고 8월 국내에 잠입했으나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1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1924년 화요회에 가입했고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같은 해 6․10 만세운동을 계기로 시작된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7월 백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1929년 4월 석방되었다. 이후 해방될 때까지 고향인 김포로 돌아와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 힘썼다.
미 군정 하인 1945년 10월 김포군 초대 하성면장,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에 김포군 대표로 참석했다. 1946년 2월 25일 면장직을 사임하고 민주주의 민족전선 경기지부 서기부장이 되었다. 유족증언에 따르면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기록에서 확인되지는 않는다. 전쟁 직전 석방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1949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민군 점령기 특별한 활동은 없었으나 수복 후 학살을 피해 서울에 살던 아들 집으로 갔고 하루 만에 다시 체포를 피해 고양군 벽제면 성석리 어씨 집성촌으로 왔다. 다시 피신하던 중 고양경찰서에 체포되어 금정굴에서 학살되었다. 금정굴 사건 관련 형사사건기록으로 보아 전임 지역이 김포였던 고양경찰서장 이무영이 직접 권총으로 사살했다. 총살당한 날짜는 10월 23일 또는 25일 밤이었다."
"한국전쟁은 전투가 아니라 민간인학살"- 한국전쟁 첫해인 1950년 국군의 사망 실종자 수는 8만 명이었다. 반면 비전투원인 민간인 사망 실종자 수는 100만 명에 달했다. 왜 이렇게 전투요원 보다 비전투원인 민간인들 피해가 열 배 이상 컸다고 보는지?"먼저 몇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자. 국방부 연구자료에 따르면 대략 1950년 8만 명, 1951년 7만 명, 1952년 5만 명, 1953년 7만 명의 국군이 '손실' 즉, '전사 또는 실종'되었다. 모두 27만 명이다.
<한국전쟁사>는 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부터 낙동강 전선이 형성된 7월 말까지 '지연 전투'라고 불렀다. 전략상 후퇴하는 전투였으니 상대적으로 격렬한 전투는 없었고 인명피해도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복 전투에서도 서울 탈환 전투 외에 큰 전투는 없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판단한다면 1950년 한 해 동안 국군의 피해는 6월 전쟁 발발 초기와 8월 낙동강 전선기, 12월 북한지역에서 후퇴기 등 세 번에 걸쳐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위 연구 자료에 따르면 약 8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10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국방부자료에서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피해를 당했는지를 조사한 결과는 없다. 단지 확인되는 것은 부상자와의 비교이다.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민간인 약 22만 명이 부상당했다. 나머지가 부상 없는 죽음이었다. 따라서 대부분 조준사격을 의심할 수 있다. 방어 장비를 갖춘 국군이 전투 중 부상당하는 것에 비한다면 무방비 민간인이 공격을 당한다면 그 자리에서 사망당할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3년 전쟁 동안 부상당한 국군의 수는 약 72만 명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민간인들이 공격을 당한 이유에 있다. 전투가 없던 시기에 당한 민간인들의 사망자 수 1백만 명은 조준사격, 의도적인 공격이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한국전쟁이 전투가 아니라 민간인학살이었음을 보여주며 이것이 전쟁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승만 정권, 헌법과 법률 위반하며 민간인 백만 명 학살"- 책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사건은 우연이나 합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고의와 불법, 위헌 행위였다고 평가했는데, 그 이유와 근거는?"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면, 전쟁 시 민간인학살은 독재정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정치행위라고 할 수 있다.
6월 25일 전쟁발발 즉시 이승만 정권은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아래 비상조치령)'과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을 공포했다. 그 직후 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점검 및 소집, 학살이 시작되었으니 이 법령들은 모두 이승만 정권에 충성하지 않아 보이는 국민에 대한 공격을 합법화한 것이었다. 공격의 신호탄과 같은 성격이었다. 따라서 6월 25일 그날의 전쟁은 우연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날의 대응방안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특히 '비상조치령'은 1949년 개악하려던 '국가보안법'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1심만으로 증거설명 없이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내용을 담으려 해서 중단되었는데 1950년 한국전쟁을 빌미로 이승만의 명령에 의해 부활했다. 1950년과 1951년 최소 2만 명이 1심 재판으로 처벌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1952년 9월 9일 헌법위원회는 '최고 법원에 의한 재판 받을 국민 기본권을 침해했으므로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승만 정권은 인민군점령 전 5만 정치범, 30만 국민보도연맹원을 적으로 봤고, 수복 후에는 55만 명의 국민을 인민군부역자로 봤다. 영토를 지키지 못한 무능한 정권, 누가 부역했는지도 구별할 능력이 없던 정권이 1백만 명의 민간인을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며 학살했던 것이다."
- 한국전쟁 전에도 이미 민간인학살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인지?"이미 대구 10월 항쟁이나 제주 4․3사건이나 여순사건이 잘 알려져 있으므로 민간인학살이 자행된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대구, 제주나 여수, 순천은 일부에 불과하다. 형태나 강도로 보아 이에 비교될 만한 탄압이 곳곳에서 있었다.
먼저, 미군과 이승만세력의 분단정부 수립시도가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당시 분단은 대부분 민중들의 염원과 반대였다. 점령자 미군에 대한 저항은 1946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의도가 폭로된 뒤 강화되었고(대구 10월 항쟁) 다시 경찰을 비롯하여 군대까지 정비를 마친 미 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1948년 물리력을 총동원하여 국민들을 억압하자 저항이 있었다.(제주 4․3 항쟁) 저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부 군조차 등을 돌렸다.(여수 14연대, 대구 6연대 등 봉기)
악순환이 본격화되었다. 영호남 지역은 군부대의 토벌작전 학살이 시작되었고, 서울, 경기, 충청 등 중부지역은 체포와 전향이 시작되었다. 10만 9천 명이 학살되었고, 11만 명에 이르는 정치범이 생겼으며, 30만 명이 넘는 국민보도연맹 조직이 생겼다. 이것이 전쟁 전 한국사회의 모습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이미 국민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것이었다."
"부수적 피해라는 논리는 책임회피 위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