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손을 잡고, 미개한 저항자가 되겠소

뭐라도 하겠노라는 다짐은 대체 어디 간 거냐고, 노란풍선이 내게 물었다

등록 2014.05.15 16:48수정 2014.05.1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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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소를 둥글게 에워쌌던 사람들이 손에 쥔 노란풍선을 놓았다. 어떤 풍선에는 편지가 매달려 있었다. 얼굴만한 풍선들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사람들은 눈을 떼지 않았다. ⓒ 노순택


새벽 1시 30분, 전화가 걸려왔다.  예고된 전화였다. 전화하겠노라는 메시지가 먼저 날아왔고, 내가 "그대 전화는 두려우니 걸지 마시라"고 농담 섞인 답신을 보낸 뒤였다. 송경동이었다.

그와 인연을 쌓은 지 어느새 10년. 늙은 농부들이 피눈물을 흘리던 대추리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리고 불타올랐던 용산의 처참한 망루 앞에서, 사장이 도망가 버린 불 꺼진 기타공장에서, 문자 메시지로 해고통지를 받고 수년째 복직투쟁을 벌이던 기륭전자 앞 굴착기 위에서, 해고노동자들이 15만 볼트 고압송전탑에 올라 "살인해고를 멈추라" 목이 터져라 외치던 쌍용자동차 앞에서,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으로 달리는 희망버스 안에서, 해군기지 건설이 만행처럼 강행되고 있는 강정마을에서, 늙은 어르신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의할 만큼 야만적으로 자행되는 밀양의 송전탑 앞에서, 우리는 만났다. 정말이지, 이런 인연은 달갑지 않은 악연이다.

그도 시인이라 하기에, 대체 언제 시를 쓸 테냐고 놀려댄 적도 있었다. 그가 굴착기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이 전화기를 타고 들려왔을 땐 하마터면 그를 저주할 뻔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아찔한데 나는 가끔 떨리는 마음으로 써내려간 그때의 글을 다시 읽고 상념에 젖곤 한다.

송경동이 시를 쓰기 힘든 시대

자정 넘어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에 전화를 걸어 온 송경동은 대뜸 자신이 쓴 글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었다. '세월호 참사 만민공동회'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읽었다. 그가 지난 주말 청와대 앞에서 겪은 일에 대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지난 한 달 겪어야 했던 일들에 대해 썼던 그 글을 나는 이미 읽었다. 많은 이들과 나누어 읽고자 공유도 했던 참이었다.

대한민국 세월호를 침몰시킨 박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다 


이상하게도 풍선은 흩어지지 않고 한 데 모여 날아갔다

지난 주말, 나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 시민들이 무엇을 외쳤는지, 어떻게 경찰이 노란 리본을 단 사람들만 골라 고착 작전을 펼쳤는지, KBS 앞에서 청와대 앞으로 오신 유가족들이 어떻게 쓰러지듯 아스팔트 위에 앉고 누웠는지를 두 눈으로 보았다.


영정 속의 아이들은 고왔다. 아이들과 꼭 닮은 엄마 아빠들이 비통에 잠긴 손으로 그 고운 얼굴을 쓰다듬는데, 눈앞이 흐려져 사진을 찍기가 어려웠다. 진도에 내려갈 엄두도, 안산에 내려가 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나는 그날 아이들의 영정을 보고서야 저녁에 홀로 안산에 다녀왔다.

합동분향소에서 떼어져 KBS로, 청와대 앞으로 떠돌아야만 했던 아이들의 영정이 다시 그곳에 돌아와 있었다. 아침에 안녕, 저녁에 안녕, 우리는 하루에 두 번 인사를 나눴다. 이튿날에도 나는 안산에 다녀왔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저마다 노란 풍선을 들고, 합동분향소를 둥글게 에워쌌다. 맞잡은 손으로 사람띠를 만들어 이 안타깝고 분통한 죽음 앞에 눈물을 흘렸다. 노란 풍선들을 놓는 순간 바람이 불었는데, 이상하게도 풍선들은 흩어지지 않고 한 데 모여 날아갔다. 어떤 풍선에는 편지가 매달려 있었다. 얼굴만한 풍선들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사람들은 눈을 떼지 않았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수만 명으로 불어 광장에 모이는 걸 보았다. 잊지 않겠다, 더 이상 가만 있지 않겠노라는 다짐들이 광장의 어둠을 밝혔다. 살아 돌아온 아이의 부모님이 죄인인 듯 미안해할 때는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부모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이 부디 올라오기를 비는 마음은 너나가 따로 없었다.

아이들이 모두 부모님 품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이 무참한 죽음이 왜 벌어진 것이며 살릴 수 있었던 이들을 살리지 않은 자들이 누구인지 밝힐 때까지, 그 책임을 묻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될 때까지 촛불을 놓지 말자고, 오는 17일에는 더 큰 촛불이 되자고 산 자들은 외쳤다.

그날 찍은 사진들을 보다가, 나는 멍해지곤 했다.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일의 초라함에 낙담하다가, 허나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은가 하는 물음 앞에 멈칫했다. 우리는 정말 잊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정말 변할 수 있을까.

"지금 배가 90도 기울어져 있어. 거짓말 아니고 죽을지도 몰라. 네 옷 다 챙겨와서 미안해."

동생에게 미안하다던 언니의 마지막 문자를 읽고 울먹이던 마음,

"가난해도 행복했는데, 이제 가난만 남았다."

손녀에게 해준 게 없어 가슴을 치던 할머니의 설움,

"너는 돌 때 실을 잡았는데, 명주실을 새로 사서 놓을 것을. 쓰던 걸 놓아서 이리 되었을까. 엄마가 다 늙어 낳아서 오래 품지도 못하고 빨리 낳았어. 한 달이라도 더 품었으면 사주가 바뀌어 살았을까. 엄마는 모든 걸 잘못한 죄인이다. 몇 푼 벌어보겠다고 일 하느라 마지막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 엄마가 부자가 아니라서 미안해. 없는 집에 너 같이 예쁜 애를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엄마가 지옥 갈게, 딸은 천국 가."

지옥문 앞에서 딸을 그리워하는 엄마의 마음을, 우리가 정말 오래도록 잊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대체 뭐하자는 '시민 괴물'이란 말인가

송경동이 새벽에 전화를 건 까닭은 자신에 이어 글을 한 편 써달라는 얘기였다.

"5월 17일 전국의 시민들이 추모의 촛불을 들자고 한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허나 거기서 멈추지 말자. 17일의 추모에 이어 5월 18일 전국의 모든 곳에서 추모를 넘어 분명한 책임과 진상규명을 묻는 생명의 길, 대안의 길에 함께 나서야 한다"는 말이었다.

5월 18일, 한국현대사의 분수령이었던 그날, 만민이 모여 토론하고 나아갈 바를 모색하는 '제2차 만민공동회'를 열자는 말이었다.

다급한 부탁은 언제나 힘겹다. 그 가운데 급조하는 글이야말로 가장 힘겹다. 나는 거절했다. 전화를 끊고 일을 더 하다가 이 사진 앞에서 한참을 헤맸다.

뭐라도 하겠노라는 다짐은 대체 어디 간 거냐고, 노란 풍선이 내게 물었다.
새벽 3시, 송경동에게 문자를 보냈다.

"미안해, 쓸게."

고 박수현 군의 아버지 박종대씨가 어느 짐승만도 못한 교수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나는 저장해 두련다.

"나를, 우리를 미개한 저항자로 만든 것은, 상황 판단도 하지 못하면서, 이 아픔을 호소할 통로도 / 조직도 / 제도도 만들어 놓지 못했으면서, 쓸데없는 우월감에 빠져 있는 바로 당신들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아버님과 함께 '미개한 저항자'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대체 뭐하자는 시민괴물이란 말인가.

5월 17일 범국민 촛불행동과 5월 18일 청와대 만민공동회 안내문 ⓒ 세월호참사원탁회의 / 만민공동회준비위


#세월호 #만민공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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