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된 딸 아버지의 복수, 동의하십니까

[서평] 히가시노 게이고 장편소설 <방황하는 칼날>

등록 2014.06.30 09:21수정 2014.06.3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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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히가시노 게이고 장편소설 <방황하는 칼날> ⓒ 바움

법은 일반적으로 자력구제를 금지한다. 나나 내 가족이 피해를 입어도 스스로 앙갚음을 할 수는 없다. 국가권력에 정당한 판결을 요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릴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한다. 형벌도 문명의 진보와 궤를 같이하면서 야만적인 개인의 무제한 보복을 막도록 합리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국가는 법이 정당한 처벌을 내리고 있는가 생각해야 한다. 사법기관에 대한 불신은 공적 처벌의 체계에 심각한 의문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교화나 갱생과 같은 교정 이론은 배제하고 순수하게 처벌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과연 국가는 국민의 법 감정을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결과를 보여주는 걸까.


수사를 받는 재벌 총수는 약속이나 한듯 휠체어를 타고 초췌한 얼굴로 나타난다. 그동안 '국가경제에 이바지한 결과'나 '처벌했을 때 야기되는 국가경제의 악영향'이라는 말도 안 되는 근거로 가벼운 형을 받는다. 사람을 때려도, 기업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손해를 유발해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혀를 찬다.

흉악범죄에서도 이런 경향이 드러난다. 술을 마셨다고 감형을 받거나 미성년자라서 처벌이 불가능할 경우 사람들은 뜨겁게 반응한다. 범죄의 잔인함에 비례해 과격하고 원초적인 언사가 동원돼 피의자를 비난한다. 혹여나 범인을 두둔하는 의견에는 "네 가족이 당했어도 그럴 수 있냐"라는 철퇴가 떨어진다.

고대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변되는 탈리오 법칙(피해자가 받은 정도와 동일한 손해를 가해자에게 처벌하는 보복 법칙)이 필요한 것일까. 이미 여러 편의 미스터리 소설로 호평받은 히가시노 게이고는 <방황하는 칼날>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런 사회적 문제를 제기한다. 이 책은 작가의 책 <용의자X의 헌신> <백야행>과 마찬가지로 국내에서 영화로도 제작됐다.

잔혹하게 살해된 딸, 복수에 나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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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방황하는 칼날> 중 한 장면 ⓒ 에코필름


부인과 사별한 후 딸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남자, 그에게 딸은 인생의 전부였다. 사춘기를 지나며 다소 멀어지는 듯이 보이지만 여전히 그에게 딸은 살갑고 다정한 아이였다.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은 보석.


어느 날 축제에 다녀온다며 나간 딸이 사라졌다가 처참한 사체로 발견된다. 성폭행의 흔적이 있고 환각제를 복용했단 부검 결과가 나온다.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다.

좌절한 그에게 날아온 한 통의 휴대전화 메시지는 어느 집에 찾아가보라 알려준다. 그곳에서 그는 딸이 겪은 추악한 진실을 마주한다. 그날의 일이 영상으로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분노가 극에 달한 그는, 마침 돌아오는 범인에게 흉기를 휘둘러 잔혹하게 살해한다. 그때부터 그는 피해자의 아버지가 아닌 용의자가 된다.

그는 단서를 찾아가며 퍼즐을 맞춰간다. 경찰이 잡기 전에 공범을 찾아 스스로 복수를 하리라 다짐한다. 익명의 이름으로 전달되는 휴대전화 메시지는 남은 범인의 행방을 뒤쫓을 수 있도록 돕는다.

자신에게 죄를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법원의 일이다. 그런데 법원은 범죄자를 제대로 심판할까? 아니다. 법원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재판이 어떻게 이뤄지고 어떤 사건에 어떤 판결이 내려졌는지 그도 조금은 알고 있다. 그것을 보면 법원은 범죄자에게 정당한 심판을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법원은 범죄자를 구해준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숨겨준다."(본문 중에서)

남은 한 사람의 범인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경찰에 검거돼 봐야 처벌이 미약할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집념은 더욱 불타오른다. 심정적으로 그에게 응원을 보내는 사람들과 그를 막아야만 하는 경찰은 갈등한다. 미성년자라서 가벼운 형벌을 받게 될 범인을 지키기 위해 그를 잡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가 복수하도록 방치해야 하는가.

결국 작가는 범인을 보호하기 위해 피해자의 아버지를 공권력이 막아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그려낸다. 이 사회의 폐부에 '방황하는 칼날'을 깊숙이 찌른다. 그에게 힌트를 줬던 휴대전화 메시지의 발신자는, 이런 모순된 상황을 극에 치닫도록 만든다.

방황하는 법은 공범이다

개인적인 보복감정 그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어떤 형벌도 피해자의 고통을 치유할 수는 없을 게다. 하지만 '보복'은 엄연한 범죄다. 그렇다고 국가가 보다 합리적이고 공정한 형벌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이 책을 읽으며 정의를 위한다는 법이 결국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짓밟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이 싹튼다. 작가가 이런 세상을 만든 또 하나의 공범으로 '법'을 지목하는 이유다. 책 제목인 <방황하는 칼날>은 법을 지칭한다. '정의의 칼날'이 돼야 할 사법권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것. 피해자의 아버지가 직접 복수에 나서야만 하는 현실을 그리며, 우리에게 '법'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과연 이 커피숍에 있는 사람 중에 몇 명이나 아무 죄도 없는 여고생이 성적 노리개로 고통당한 끝에 시체로 발견된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아버지가 복수의 화신이 되어 세상을 떠돌고 있다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을까? 그에 관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잠시 머릿속에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뉴스가 바뀌면 그들의 관심도 바뀐다."(본문 중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피해자의 아픔이 너무 소홀히 여겨지고 있다"라며 "복수가 좋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지금의 사회 시스템에는 큰 결함이 있다"라고 책의 집필 이유를 밝혔다. 조금 불편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 당신은 이 남자의 복수에 동의하는가?
덧붙이는 글 <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이선희 옮김 / 바움 펴냄 / 초판 2008.02 재판 2014.03 / 1만5000원)

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바움, 2008


#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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