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온다고 4.5km 방호벽 설치... "낮은 데로 임하소서"

[현장] 농성장이 철거될까 두려운 사람들이 교황에게 쓴 편지

등록 2014.08.05 18:33수정 2014.08.05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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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한을 앞두고 광화문 광장에서 농성하는 이들이 교황의 농성장 방문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최진미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이 발언중이다. ⓒ 김현우


오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서울 광화문 광장 주변 농성장이 철거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이들이 "교황님,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며 교황에게 편지를 썼다.

5일 오전 이슬비가 내리는 광화문광장에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 광화문 광장 지하에서 717일째 농성을 이어온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공동행동 참가자들, 한 달 전부터 세종대로 곳곳에서 농성을 시작한 케이블방송통신업체 씨앤엠 노조원들, 티브로드 협력 업체의 해고 노동자 등 30여 명이 모였다.

교황이 시복미사를 여는 날(16일) 이들의 농성 모습을 차단하기 위해 광화문 광장을 중심으로 4.5km의 경찰 방호벽이 쳐진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이들은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정부와 경찰이 농성장을 철거할 것을 우려 한다"며 "교황님이 직접 방문하셔서 우리의 사정을 살펴주시고 함께 해달라"고 호소했다.

"우리를 찾아와 함께 기도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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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앤엠, 티브로드 협력업체에서 해고당한 노동자들도 이날 기자회견에 함께했다. ⓒ 김현우


이들은 또 "성하께서 집전하시는 미사를 치장한다는 이유로 저들이 우리를 광장에서 쓸어내는 일이 없도록 기도해달라"며 "우리를 찾아와 우리와 함께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

최진미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은 "교황이 세월호 참사로 인해 가슴 아픈 유가족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전해 주실거라고 생각한다"며 "교황이 이곳에 방문해 자비로운 손길을 꼭 전해주고 가실 것을 간곡하게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박경석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도 "대통령 경호, 교황 경호의 이름으로 우리가 철수 당할까봐 무섭다"며 "교황이 지역사회서 살고 싶다는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러 광화문으로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종탁 '서울희망연대노동조합' 위원장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거리의 교황'이라 불리는 걸 알고 있다"며 "해고로 거리에 내몰린 노동자들을 교황이 만나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은 "교황의 방한이 외국의 유명한 분이 다녀가는 행사가 아니라 이 사회에 올바른 정의를 심고, 평등한 세상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원한다"며 "교황의 방한이 한국 사회에 커다란 변화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광화문 광장에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유가족들과 함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동조 단식을 벌이고 있다. 문정현 신부는 "교황께서 틀림없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 알고 계실 것"이라며 "절박한 이들을 보시러 와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천안에서 올라왔다는 티브로드 해고노동자 이순용(46세. 남성)씨도 교황의 방문에 내심 기대를 걸고 있다. 이씨는 "교황 경호를 위해 4.5km 길이로 90cm높이의 방호벽이 쳐진다는데, 그래도 여기 계신 분들을 몰아내진 못하지 않을까"라며 "오히려 청와대가 고용노동부에 농성을 풀 수 있도록 빨리 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했다는 말도 언뜻 들린다"고 말했다.

유족들과 함께 단식에 동참한 한 해고노동자는 "교황이 방탄차량이 아닌 일반 준중형차를 탄다고 하는데 그것을 이유로 경호가 강화될지도 모르겠다"고 우려를 표했다.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던 한 세월호 유가족은 "교황의 방한이 지금의 상황을 진전시킬 수 있다는 0.001%의 희망이라도 걸어야 한다"고 밝혔다.

다음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농성중인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장애인, 빈민, 케이블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 일동이 작성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드리는 편지'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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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주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공동행동 집행위원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드리는 편지를 낭송하고 있다. ⓒ 김현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드리는 편지

찬미 예수님!

교황 성하가 이 땅에 방문하신다는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었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우리는 성하께서 이곳 광화문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시기 이전에 우리가 이 땅에서 지금 받고 있는 고통에 먼저 귀 기울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 가운데 신자인 자도 신자가 아닌 자도 있습니다만, 여기 핍박받고 소외된 우리들은 우리가 울부짖을 때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양떼를 잃은 목자인 당신께서도 단 한 마리 양을 찾는 일에 전력을 다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을 닮아 한 명 한 명이 더 없이 소중했던 우리의 자식, 부모, 형제와 자매를 잃었습니다. 학교 친구들과 또는 가족들과 떠난 여행길이 이 세상에서 걸었던 마지막 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탄 배가 왜 침몰했는지, 그리고 왜 단 한 명도 구조되지 못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식사를 중단했습니다. 침식을 잊고 지낸 지 넉 달이 다 되어가는 육신이 차츰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세운 이 나라에서는 진상을 덮으려 하고 우리에게 침묵을 종용하는 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습니다. 이웃의 곁에서 애통해 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불의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교황 성하. 하느님 당신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정의로 우리의 궁핍한 처지를 돌보아 주십시오.

우리 중 일부는 장애가 있습니다. 우리는 한 명씩 한 명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의 자녀들 사이에는 어떠한 차등도 없을 테지만, 이 땅에서는 사람이 사람에게 등급을 매겼습니다. 그 등급에 따라 활동보조인의 적절한 도움을 받을 방법이 사라졌습니다. 화재 현장에서 불에 타 죽은 이가 있습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이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소중함을 알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이 죽음과 마찬가지여서, 죽는 길이 사는 길이어서 교회에서 말하는 크나큰 죄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장애인에게 등급을 매기는 저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더 큰 등급을, 비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또 다른 등급을 매기는 자들입니다. 교황 성하. 저들에게 끊임없이 주었던 그리스도의 실천적인 사랑을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 중 일부는 일터에서 쫓겨났습니다. 광화문의 높은 빌딩에 자리를 잡은 투기 자본과 대기업의 탐욕은 식구를 먹여 살리는 가장이거나 자립을 이제 막 시작한 여성노동자거나 가리지 않고 집어삼켰습니다. 연대성의 원리에 기반해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만든 노동조합을 해체하려고 합니다. 케이블방송과 인터넷을 설치, 송출, 수리하는 노동자들이 한창 일해야 할 일손을 놓고 뙤약볕 아래 거리에 나와 노숙을 하고 있습니다. 교황 성하. 희망이 들어설 틈이 없어 절망하고 있는 저희에게 손을 내밀어 거리에서 함께하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교황 성하. 우리와 함께 울어주십시오.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들과 다 겪은 후에야 끝나게 될 우리의 시련을 위해 울어주십시오. 우리와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성하께서 집전하시는 미사를 치장한다는 이유로 저들이 우리를 광장에서 쓸어내는 일이 없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를 찾아와 주십시오. 익숙해지지 않는 우리의 고통을 위로해 주시고 길거리에 나와 탄원하는 방법밖에 찾지 못한 우리의 어리석음과 우리를 몰아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멈추지 않는 분노를 깨끗이 용서해 달라고 우리 주님께 청원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와 함께, 또한 교황 성하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2014년 8월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농성 중인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장애인, 빈민, 케이블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 일동 

덧붙이는 글 김현우 기자는 <오마이뉴스> 20기 인턴기자입니다.
#광화문 광장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세월호 특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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