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다크에서 다시 읽는 <오래된 미래> 라다크를 알게 해주었던 책을 바로 그 장소에서 다시 읽는 느낌은 뜻깊었다.
김산슬
해발 3500미터라는 어마어마한 높이에 자리한 도시를 한 시간여 만에 비행기로 날아와 버린 탓인지 가만히 있어도 숨이 가빴다. 아무리 깊게 숨을 들이마셔도 가슴이 답답했다. 이러다가 고산병에 걸리는 거구나 싶었다.
고산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물을 많이 마시고 충분을 휴식을 취한 뒤 약간의 운을 바라는 수밖에는 없다고들 했다. 조금만 심각해도 어렵게 찾아온 이곳에서 당장 내려가야 할 지 몰랐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데, 아파서 등 떠밀려 내려가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고대 라다크 왕국의 수도 레(Leh)에 도착해 처음 짐을 푼 곳은 이름도 없는, 여전히 공사 중인 듯한 게스트하우스였다. 가이드북을 보고 찾아간 게스트하우스에 빈방이 없었고, 여주인은 자신의 남동생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를 소개해 주었다.
전통 라다크 방식으로 지어진 집으로 들어서자 점잖아 보이는 아저씨가 우리를 맞았다. 그의 이름은 아리프. 건조한 기후 탓에 주름이 가득한 얼굴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어서 짐을 풀고 앉아요. 아침은 먹었나요? 우선 밥을 먹고 좀 자도록 해요. 라다크에서의 첫날에는 무조건 고산병을 조심해야 하니까요."그가 제시한 숙박비는 그의 여동생의 게스트 하우스와 동일한 1200루피(한화 2만 원). 현지 물가로 따지자면 결코 싸지 않은 가격이었다. 물론 그의 여동생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는 레 안에서도 중급 숙소로 분류되는 곳이었다. 배낭 여행자인 우리가 평소의 숙박비 지출의 두배에 해당하는 돈을 내고도 첫날을 그 곳에 묵고자 했던 것은 꽃이 만발한 예쁜 정원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리프의 집은 미완성 상태였는데다 침대가 뎅그러니 놓여진 널찍한 방이 전부였다. 집의 상태에 비해 터무니없는 가격이었지만 우리에겐 무엇보다 즉각적인 휴식이 필요했고, 몸이 고도에 적응이 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라도 하루만 우선 그 곳에서 머물기로 결정했다.
눈에 보이는 거짓말에 마음 아팠던 하루다음날 아침 다른 숙소를 알아보러 외출하기 전 아리프에게 숙박비를 지불하려는데 하필이면 잔돈이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500루피 세장을 꺼냈다. 내 손에 쥐어진 천오백 루피를 흘끗 보며 아리프는 말했다.
"어제 먹은 아침 150루피. 둘이서 300. 그러면 1500루피. 맞지요?"그리고는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돈을 채 내주기도 전에 내 손에 있던 오백 루피 세 장을 채가듯 가져가더니 얼른 가슴팍의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말없이 집을 나섰다.
그저 친절로 베풀어 준 아침식사가 숙박비에 포함되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상태에서 엉겁결에 뺏기듯 지불된 300루피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5천 원 정도 되는 돈의 가치보다는, 내 손의 돈을 보던 순간 의도적으로 아침 값을 책정한 듯한 아리프의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리프는 말했다.
"숙소를 옮기나요? 어디로 가는 거예요? 거긴 하루에 얼마를 내라던가요?""하루에 600루피예요. 아시다시피 저희는 배낭 여행자고, 이 집이 마음에 들지만 예산을 아끼려면 떠나야 할 것 같아요.""그럼 우리 집에 머물러요. 똑같이 600루피만 내면 되요. 다른데 가지 말고 여기서 우리랑 있어요. 네?""……."
▲라다크 전통 가옥 물론 시멘트를 사용하긴 했지만, 나무로 된 창틀과 처마는 라다크식 전통 가옥의 특징이다.
김산슬
다음날 우리는 아리프의 집을 떠났다. 차라리 델리의 상인들처럼 능청스러웠더라면 얄미워 한 마디 쏘아붙이기라도 했을 텐데, 이후 만났던 여느 라다크인들과 마찬가지로 사람 좋은 아리프는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 모든 게 눈에 빤히 보여 더 마음이 씁쓸했다.
더욱이 개방 이후 라다크는 더 이상 타 문명과의 접촉이 끊어진 자급자족 사회가 아니었다. 라다크에서도, 라다크 사람들도 돈이 필요했다. 그러니 라다크로 가는 육로가 열리는 일 년의 단 삼 개월 가량의 짧은 극성수기 동안 아리프는 조금이라도 돈을 모아야 했을 것이다.
이틀을 내리쉬고 가벼워진 몸으로 배낭을 짊어지고 거리로 나왔다. 길 옆으로 졸졸 시냇물이 흘렀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줄레(Julley)"하고 수줍은 인사를 건넸다. 장사꾼들을 제외하고서, 여행을 하며 이토록 많은 현지인들이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네준 건 라다크가 처음이었다. 그들의 미소와 인사만으로 벌써 가슴이 벅차올랐다.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줄레 줄레, 참 예쁘고 정겨운 인사였다. 앞으로 이 주 동안 가장 많이 듣고 또 하게 될 말이었다.
▲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진 작은 시냇물은 라다크 골목길과 나란히 이곳저곳으로 흐른다.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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