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를 걷다, 지구에서 가장 느린 속도로

[어느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39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 ①] 드디어 히말라야로

등록 2014.09.06 21:10수정 2015.02.05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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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동안 남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기자 말

"여기가 맞는 거야?"
"여기가 아닐 리 없잖아? 이렇게 큰 버스 정류장인데. 사람들이 포카라에서 버스 타고 가장 많이 가는 곳이 베시사하르잖아."
"근데 왜 아무도 모르지?"
"... 그거야 나도 모르지. 45분 남았어. 얼른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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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불레 마을의 세찬 강물 ⓒ Dustin Burnett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의 첫 시작점인 베시사하르 마을로 가기 위해 포카라의 숙소에서부터 3km 남짓한 길을 걸어 버스터미널로 왔다. 웬일로 길을 잃지 않고 잘 찾아왔다 싶더니, 베시사하르로 가는 버스를 당최 찾을 수 없다. (관련기사 : 염소똥과 함께 한 첫 결혼기념일, 너무하다

"베시사하르, 버스?"

포카라에 머무는 사람들 대부분이 베시사하르로 갈 테니, 버스터미널에만 도착하면 만사가 해결될 줄 알았건만. 한 아저씨에게 버스의 향방을 물으니 말없이 저쪽으로 가라고 손짓한다. 아저씨의 말을 따라 저쪽으로 가서 물으니, 다시 이쪽으로 가란다.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동분서주하며 똥개 훈련을 한 지 30분째. 도저히 안 되겠다.

"내가 이쪽을 돌아보고 올 테니까. 저쪽으로 갔다가 바로 와. 여기서 5분 후에 만나자."

더스틴이 이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맹렬히 달려간다. 포카라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 빌린, 해지고 구멍 난 등산화가 유난히도 후져 보이는 뒷모습이다. 숙소에 웬만한 짐은 다 덜고 5kg 남짓만 담은 배낭이지만, 계속 헤매고 돌아다닌 탓인지 무겁게 느껴진다. 더스틴의 신발과 함께 식당에서 빌린 대나무 스틱을 질질 끌며 더스틴이 가보라던 곳으로 발을 옮겼다.


반드시 필요할 것 같은 바람막이 재킷이나 식수 정수를 위한 아이오딘 알약(정수제), 등산용 긴 바지, 털모자 등은 포카라에 있는 등산용품점에서 대충 준비했지만, 혹독한 겨울 날씨라는 히말라야의 고지에서 이 어설픈 준비물들이 나를 지켜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반드시 필요하다고 모두가 충고했던 포터(짐을 들어주는 사람)나 가이드도 고용하지 않았다.

한국 식당에서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 대신 ABC 코스로 허가증을 잘못 받아다 준 바람에, 네팔 대리인과 대판 싸우고 다시 직접 가서 받아온 등산 허가증도 조금 불안하다. 차라리 오늘 버스를 타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베시사하르로 가는 버스 어디서 타나요?"
"베시사하르? 여기서 타는 거 아니야. 길 건너서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버스가 몇 대 모여있는 데가 있어. 거기서 타면 돼."


버스 지붕이 더 안전하다고?

버스가 떠난다는 시간까지 20분 남았다. 차라리 오늘 버스를 타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늘 떠나지 않는다면 히말라야로 영원히 못 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포카라에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끈 지 5일째. 포카라는 마음에 들지 않는 도시였다. 왠지 모르게 가짜 냄새가 나는 도시. 현지인보다 주머니가 더 두둑한 여행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숙소와 식당만 즐비하게 늘어선, 인공의 냄새가 나는 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발을 떼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등장한 우리. 포카라에는 다행히도, 히말라야 등반에 필요한 모든 걸 갖춰놓은 등산용품점이 수십 개 있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고 무선 인터넷이 갖춰진 숙소에서 히말라야 등산에 필요한 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흘 동안 우리는, 아무런 정보도 찾지 않고 아무런 장비도 사지 않았다. 페와 호숫가를 둘러싼 서양식 바와 식당, 카페가 즐비한 거리에서 주제에 넘는 가격을 내며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맞이한 편리함에, 몸과 정신이 다시 게으른 습관에 녹아들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포카라의 습기 찬 기운이 무겁게 내려앉아,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것만 같았다.

질척대는 기운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포카라를 빠져나왔다. 오늘은 반드시 버스를 타야 할 것이다. 더 좋은 등산화를 구하고 포터도 구하고 등산 장비도 더 철저히 준비할 수 있겠지만, 그런 욕심을 채우려면 끝이 없다. 일단 가야 한다. 복슬복슬한 턱수염과 햇볕에 그을린 피부로, 외모만큼은 히말라야에 세 번이라도 올라갔다 내려온 사람처럼 완벽히 준비한 더스틴. 끝내 베시사하르로 가는 버스를 찾지 못하고, 해진 신발 끈의 실밥을 땅에 질질 끌면서 내게 돌아왔다.

아저씨가 알려준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니 버스 몇 대가 서 있기는 하다. 대충 천막만 둘러친 이 허름한 곳이 베시사하르로 가는 버스가 있는 정류장이란 말이야? 사람들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니 단 5분 안에 베시사하르로 가는 버스에 착석했다. 이제야 깨닫는다. 포카라의 버스터미널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히말라야 등반의 시작점인 베시사하르로 갈 거로 생각하다니. 포카라 인구 대부분이 여행자인 것도 아닐 터. 여행자 시설만 가득한 도시라 불평했으면서, 모든 것이 여행자를 위해 편리하게 마련되어 있을 거라고 짐작하다니. 이 오만한 여행자의 습성은 언제쯤 벗어낼 수 있을까.

베시사하르로 가는 구불구불한 길은 청룡열차만큼 스릴이 있었다. 버스 안에 잠자코 앉아 있기만 해도 불안한데, 버스가 굴러가는 내내 어디선가 나타난 사람들이 버스 위로 훌쩍 올라탄다. 여기서 버스 위라는 것은, 버스 내부가 아닌 버스 지붕을 뜻한다. 좌석이 반은 비어 있는 버스 내부를 놔두고 굳이 지붕 위로 올라가는 까닭은 뭘까. 의문의 버스는 낭떠러지 옆을 지나고 있었다. 낭떠러지 아래로, 먹다 버린 깡통처럼 찌그러진 버스가 보였다.

'저거군. 만약 버스가 낭떠러지 옆으로 굴러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버스 내부에 있는 것보다 지붕 위에 있는 게 탈출에 훨씬 용이할 테니 위로 타는 거야.'

버스와 도로의 상태로 봐서, 버스 사고가 날 가능성은 매우 농후하다. 비행기 사고가 잦은 네팔이라지만, 비행기보다 도로 사고가 훨씬 잦다지 않나. 두려움에 등 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벌써 두렵다. 트레킹(등반)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4시간 남짓 구르던 버스가 베시사하르에서 바퀴를 멈췄다. 도착한 버스에서 서양 트레커(등반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트레커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미 대기 중인 다음 버스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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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라 페와 호수. ⓒ Dustin Burnett


우리는 일단 밥을 먹기로 했다. 산으로 올라가면 밥값이 비싸진다는 소문을 하도 들어, 히말라야에 첫발을 딛기 전 배를 채우기로 하고 식당에 들어갔다. 산 위 밥값이 비싸다는 걸 걱정하는 관광객은 우리뿐인지, 식당에는 설산이 반사하는 하얀 햇볕에 그을린 네팔 사람들뿐이었다. 기름에 달달 볶은 쵸우민을 한 접시 먹고, 차도 한 잔 여유 있게 마시고 길을 나섰다. 한 차례의 관광객 배달이 끝났는지, 거리를 메우던 트레커들은 보이지 않았다.

안나푸르나 라운딩이 시작되는 지점은 베시사하르지만, 불불레까지 도로가 닦여 있는 까닭에 지프를 타고 불불레까지 가서 트레킹을 시작하는 트레커들이 많다. 걷기가 싫다기 보다는 차가 뿜어내는 먼지를 맞으며 걷고 싶지 않은 것이다. 배도 채웠겠다. 우리는 이왕 걸을 거 여기서부터 걷기로 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의 시작. 한 발. 두 발. 시작한다. 이래서 한 바퀴 도는 데 2주가 걸린다는 이 거대한 산을 언제 올라갔다가 내려갈까 싶지만. 일단 한 발 내딛는다. 그렇게 시작한다. 나는 히말라야를 걷고 있다.

"우리는 포터도 안 데리고 왔으니까, 둘이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야 하잖아. 근데 만약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그러니까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어느 쪽이 나을까?"
"음... 아무래도 네 쪽이 낫겠지?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점차 익숙해지고..."


낄낄대다 이내 서로 상처받고 서운해하며 눈을 흘겼다. 상처도 상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농담이 농담 같지 않다. 안나푸르나를 등반하다 목숨을 잃는 일은 1년에 몇 번이라도 일어나는 일이다. 안나푸르나 ABC 코스를 등반하다 눈사태로 목숨을 잃었다는 한국인이 올해(당시 2012년)만 4명이다. 정신 차리자.

투닥투닥 다투면서 오르는 히말라야

흙먼지로 뒤덮인 울퉁불퉁한 평지 위를 걷는 멍한 내 두 발이 느껴진다. 뒤에서 우리를 졸졸 쫓아오던 지프 한 대가 머지않아 우리를 따라잡았다. 또 한 대. 그 뒤로 또 한 대. 얼굴을 먼지로 뿌옇게 덮은 지프에 짜증이 나서 안나푸르나 통행증을 검사하는 첫 검문소까지 가는 3시간 동안 더스틴과 세 번을 싸웠다. 포터를 데리고 오지 않은 걸 후회한다는 건 취소다. 포터건 누구건 옆에 있다고 눈치 보며 싸우지 않는 우리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고속버스터미널, 여고 앞 떡볶이집, 제주도, 부산, 통영, 거제도, 고성...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싸웠던 우리 아닌가. 포터를 데리고 왔다면 네팔까지 와서 체면 구길 뻔했다.

검문소로 가서 히말라야에 발을 들였다는 첫 번째 도장을 찍었다. 히말라야에 오다니. 히말라야에 발을 들인 것만으로도 인생의 절반은 성공한 기분이 든다고 하면 오버일까. 괜히 마음이 우쭐해져 노래를 흥얼대며 흙길을 따라 걸었다. 더스틴은 내가 너무 느리다고 아까부터 투덜댄다.

'흥, 투덜대라지. 빨리 가면 뭐 어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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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느린 속도로 걷고 있는 나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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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불레 마을을 잇는 현수교. 다리 아래로 세찬 강물이 까마득하다. ⓒ Dustin Burnett


아랑곳 않는 내 앞으로, 더스틴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휑하고 가버렸다. 이내 마음에 걸리는지 잠시 서서 나를 돌아본다. 앞서 가버린 더스틴 탓에 흥얼대던 내 콧바람은 홧바람으로 바뀐 지 오래다. 식당에서 빌려온 대나무로 한 대 쳐주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안 그래도 서운하고 화가 나는데 더스틴 녀석이 한 마디 더 보탠다.

"앞으로 며칠 동안 나랑 같이 이 길을 걸어야 해. 그렇게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느린 속도로 걸으면 같이 걷기 곤란하다고."
'이 자식이...!'

더스틴이 하는 말의 함정은, 화가 나긴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는 데 있다. 다시 한 번 대나무를 쳐들고 폭력으로 일갈하고 싶지만, 평화로운 인간이 되기로 한다. '그래. 내가 좀 느리긴 하지.' 조금 더 인간다운 속도를 내며 더스틴의 뒤를 따라 흙 덮인 도로를 걸었다.

검문소를 지나 1시간쯤 됐을까. 히말라야에서의 첫날밤을 지낼 불불레 마을이 나왔다. 힘차게 흐르는 굵은 강줄기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나 있는 마을이다. 강 건너 있는 숙소에 짐을 풀기로 하고, 강 사이에 세워진 허름한 다리를 따라 건넜다. 철근을 얽어 만든 기다란 현수교. 중간 지점이 불룩하니 내려간, 다리의 양쪽 끝만 고정해 놓은 다리가 매우 엉성해 보인다. 다른 곳도 아니고 히말라야인데, 다리를 이렇게 엉성하게 만들어놓아도 되나. 만약 다리의 한쪽이 잘못돼 끊어진다면, 저 깊은 강물 속으로 빠져들 텐데.

낭떠러지 옆 도로 위를 마구 구르는 버스, 트레킹을 하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는 자각, 위태롭게 걸쳐져 흔들대는 현수교. 이제 좀 알 것 같다. 나, 여기 놀러 온 거 아니다. 목숨을 걸고 걷고 걸어 산을 오르고 내리는 거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에베레스트가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2주간 걷는 거다. 심각한 일이다. 만만찮은 일이다. 정신 바짝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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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에서의 첫번째 숙소. ⓒ Dustin Burnett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내 무게를 실감한다는 듯 아래로 푹푹 꺼지던 현수교는, 다행히 나를 무리 없이 통과시켜 주었다.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통나무 숙소로 가니, 이미 지프를 타고, 혹은 걸어서 도착한 트레커들이 테라스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있다. 검문소 근처에서 만난 미국인 브렛과 이스라엘에서 온 엘리의 테이블에 합석했다.

주문을 받은 주인 아주머니가 분주히 음식을 준비한다. 시원한 강바람이 4시간의 버스 여정과 4시간의 도보 여행에서 흘린 땀을 식혀준다. 독일에서 온 두 여자 친구, 프랑스에서 온 남자, 네덜란드에서 온 커플.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모여든 산장에서 맞는 히말라야의 첫날밤이다.

여행자들이 테이블 여기저기에 옹기종기 앉아, 자신의 출신과 지나온 여정, 앞으로의 계획을 나눴다. 조곤조곤한 말소리와 웃음소리, 따뜻한 차 향기.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감에 석양이 지는 강가 마을의 공기가 달뜨다. 저녁을 먹고 나니 이내 밖이 어두워졌다. 손전등을 들고, 나무로 만든 작은 오두막 같은 우리 방으로 들어갔다. 식사 시간 동안 내린 비에 젖은 통나무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삐걱대는 나무 바닥 위를 더듬으며, 손전등으로도 잘 비켜서지 않는 어둠을 가르며 침대 위로 올랐다. 나무로 만든 방문 틈새로 브렛과 엘리의 말소리가 새어나온다.

작은 산장. 히말라야라는 인생에 남을 경험을 위해 이곳에 모여든 트레커들. 아직은 서로를 잘 모르는 우리. 아마 산에서 내려갈 즈음에는,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사이가 되지 않을까. 머리 위로 강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한 바람에, 달뜬 밤 뜨거워진 머리를 조금씩 식히며 잠에 들었다.
#안나푸르나 #히말라야 #네팔 #트레킹 #안나푸르나 라운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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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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