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사회학> 표지
민음사
끼니를 챙기지 못할 경우 김밥이나 빵을 사러 회사 역 근처 편의점으로 가고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잠 한 숨 안 주무시고 기다리는 엄마를 위해서 딸의 작은 눈속임이 시작되는 술 냄새를 없애기 방법으로 사탕이나 껌을 사서 오물오물 거리며 집에 도착하곤 한다.
회사는 높은 빌딩이 즐비하여 편의점이 아니고서야 물건을 살 수 있는 곳을 찾기 어렵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편의점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집에 다다르게 되면 편의점은 보이지 않고 이내 동네 구멍가게만 보인다. 비로소 우리 집에 돌아왔음을 실감한다.
1년 365일, 24시간 불을 밝히는 편의점이 언제 부터 우리 일상에 성큼 들어와 있는 것일까?
전통시장과 구멍가게라는 전통적 소매업의 쇠퇴는 백화점, 수퍼마켓, 할인 매장과 같은 현대식 유통 채널의 확산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편의점은 바로 그러한 현대식 유통 채널의 선두 주자 가운데 하나다. 전통적으로 가족 경영 방식이 흔한 우리나라의 동네 슈퍼나 구멍가게의 경우, 새벽부터 심야까지 문을 여는 것이 이미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편의점이 활성화 되지 못했는데 1989년 5월 세븐일레븐이 서울 송파구에 올림픽선수촌점을 열면서 우리나라의 편의점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했다고 한다.
2013년 12월 말 기준 현재 우리나라에는 편의점은 약 2만 5000개가 넘게 있다고 조사되고 있다. 2013년 1월에 확정된 유통산업발전법은 골목 상권 보호를 이유로 대형 및 기업형 슈퍼카켓의 월 2회 휴업을 의무화하고 있으나 편의점은 영업 시간 제한이나 의무 휴업 등에 관련된 정책적 규제가 없어 다가오는 추석에도 편의점은 나와 같은 솔로와 고향길에 내려가지 않는 사람들을 맞아 줄 것이다.
편의점이 단순히 물품을 사고 파는 행위가 일어나는 곳을 넘어 눈에 띄는 곳에서 24시간 영업을 하다 보니 호객이나 방범 등 관련하여 빌딩 주인들은 편의점 입주를 환영하는 치안, 복지 관련된 공적영역으로도 적극 진출하고 있다. 즉, 편의점이 자임하는 사회적 역할이나 문화적 기능도 크게 확대하는 순기능적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도 발생했다. "부지런히 노력해 매출이 좀 는다 싶으면 그만큼 가져갈 방안을 귀신같이 마련한다." 편의점 본사와 가맹점 사이는 이른바 '갑을관계' 의 전형으로 손꼽히는데 2013년 상반기에만 전국적으로 편의점 가맹점주 4명이 자살하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은퇴자들이 퇴직금을 들고 하는 첫 생계형 사업인 경우가 많은데 기술 없는 소규모 사업자들이 표준화된 상품과 서비스 노하우를 활용함으로써 시장 진입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장점이 커 보이기 때문에 편의점은 점차 가속도를 붙여 늘어나고 있는 현상일 것이다.
사회학 박사인 전상인 저자의 <편의점 사회학> 은 편의점에 대한 사회학적 재발견 혹은 재인식을 강조하면서 편의점을 현대 한국 사회의 축도이자 도시 생활의 단면으로 간주한다. 편의점을 알면 우리 사회가 보이고 우리 시대가 읽힐 것이라는 기대가 이 책의 출발점이다.
옛날 동네 구멍가게의 경우 파는 것이 조금씩 달랐고, 파는 방식도 손님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났다. 동네마다 물맛이 달라서 콩나물, 두부, 막걸리, 과자나 사탕 등의 맛에 차이가 났고, 가게를 찾는 이가 동네 사람인지 외지인인지, 노인인지 어린애인지에 따라서 손님맞이에도 구별이 있었다. 그만큼 소매업의 근본은 지방 산업 내지 향토 사업이었다.
오늘날 편의점은 20, 30대 젊은이들이 식사를 간단히 해결한 다음, 담배나 술 등으로 자신의 처지를 위로하는 장소로 정착되어 간다고 볼 수 있다.
편의점은 소비의 기호들이 '분위기 있게' 자리 잡고 있는 곳이라고 저자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즉 편의점에서 즐겨 구매하는 것이 물이 아니라 '제주○○○', 담배가 아니라 '디스○○○' 라는 것이다.
기호를 소비하도록 유혹하고 촉진하는 데는 무엇이기에 대한민국의 편의점은 젊은 층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 되었을까?
구조의 타율적 통제나 감시로부터 벗어나 주체적인 자아를 형성하려는 속성이 곧 개인화인데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는 행위는 개별화된 행위 주체가 주어진 사회 구조에서 해방되려고 하는 것이며 그러면서 편의점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통해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평준화 내지 표준화되는 측면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회 구조에서 해방되려는 행위에 편의점 점포 운영 비용 중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편의점의 전면 '유리' 가 가깝고도 먼 사이의 간극을 좁혀주는데 영향을 미치어 한 몫 했을 거 라고 생각한다.
또한 도시화 정도와 지역 경제 수준에 대체로 비례하여 편의점이 늘어나는 경향을 보이는데 편의점은 수도권 및 대도시에 집중되는 모습을 드러내는 단적인 표상으로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면 나도 잘사는 중산층에 속한다는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편의점에서 무엇을, 그리고 왜 사는가 하는 점이다. 곧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건을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구매하는가, 아니면 타율적인 조건 속에서 반드시 혹은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을 무심코 사게 되는가 하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편의점에 의해 '소비하는 인간 (Homo Consumus)' 으로 만들어지고 길들여지는 측면이 있다. 필요에 의해 편의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편의점에 의해서 필요가 생기는 논리 구조라는 것이다.
나 또한 집에 화장지가 있지만 화장지가 언제 떨어질지 모르므로 화장지를 사서 집에 쟁여 놓고 있는데 이것은 소비가 끊임없이 강요되고 있는 사회로 소비는 더 이상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라 사회화 된 행위이다.
편의점은 일상생활 전반을 점점 더 가속화하는 경향이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즉시성과 처분성의 수준이 높은 상품을 환영하는데 편의점에서 파는 대부분의 물건이 이에 해당한다. 인스턴트식품이나 패스트푸드, 일회용 생활용품들이 즐비해 있다. 편의점은 앨빈 토플러가 <미래의 충격>에서 예견한 '쓰고 버리는 사회'의 전형이며 베버는 근대 사회의 특징인 관료적 합리주의가 궁극적으로 세상을 "분노도 없고 애정도 없는, 혹은 미움도 없고 열정도 없는" 곳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고 예견했다.
편의점에서 사람들끼리 서로 아는 척 하는 것인 일종의 금기다. 거래 행위에 인간적인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편의점 방문은 '쿨한' 인간관계를 선호하는 도시적 심성에 적절히 부합한다. 일종의 '무관심의 배려' 인 셈이다.
비인격성과 관련한 편의점의 대표적 캐릭터는 시간제 근무자 혹은 아르바이트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편의점 카운터에서 대하는 사람은 아르바이트생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편의점 알바생은 인격체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역할과 지위를 단지 유니폼으로 표현하기에 아르바이트생이 바뀌어도 항상 같은 옷을 입고 있어 알아차리기 어렵다.
편의점이 겉으로는 '쿨한' 관계로 비추어지지만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개인의 '모든 것'을 수집하고 있다. 편의점에서는 거의 '모든 것'을 판매하고 거의 '모든 것'을 서비스하기 때문이다. 물건을 구매하는 동시에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 저장, 분류, 분석하고 있는 빅데이터로 우리시대의 '보이지 않는 힘' 이다. 편의점을 스쳐 간 사람들이 남긴 자취, 그리고 편의점이 찾아낸 사람들의 흔적은 사회의 판세를 읽고 세상의 추이를 분석하는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면서 마무리 한다.
'촛불 시위' 때마다 주변 편의점들이 엄청난 특수를 누리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촛불집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잘못된 세상을 바꾸고 사회를 바르게 만들자는 것일 텐데, 집회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일용할 자원과 무기는 주로 인근 편의점에서 집중적으로, 그리고 실시간으로 공급한다.
양초나 우산, 우의 등은 일종의 시위 용품으로 촛불을 든 사람들은 정작 그러한 편의점의 배후가 거대 자본과 자본주의 세계체제, 혹은 신자유주의라는 세상을 미처 상기하지 못한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분노하고 이의를 제기 하는 자들과 그런 세상을 치밀하게 지배하는 자들의 기막힌 공생 혹은 태연한 공존의 현상, 바로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편의점의 현주소이다.
편의점 사회학
전상인 지음,
민음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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