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반도주한 회장님, 우리 사회는 왜 이 모양인가

계약과 사회적합의가 지켜지지 않는 사회... 기륭 조합은 아직 싸운다

등록 2014.09.13 16:00수정 2014.09.13 16:09
1
원고료로 응원
a  회사가 야반도주한 사무실에 농성장을 차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

회사가 야반도주한 사무실에 농성장을 차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 ⓒ 정택용


나는 아직도 기륭전자에 찾아갔던 첫날밤을 잊지 못한다. 추적추적 비가 와서 몸이 힘들기는 했지만 나는 약간 들떠 있었던 것 같다. 2008년 광화문광장을 수놓았던 촛불과 비정규직 투쟁의 결합을 눈으로 보게 된다는 사실에 들떴고,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 기륭전자는 어떤 모습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찾아갔다.

그런데 현실은 언제나 상상 그 너머를 보여준다. 수천, 적어도 수백 명이 와글거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딱 두 개, 큰 천막과 작은 천막이 쓸쓸하게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게 다예요?" 소리를 눌러 참으며 나는 큰 천막에 들어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어벙벙하니 가방만 내려놓고 앉아 있었다. 그나마 그 천막 두 개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빈 자리들이 휑했다.

서서히 분한 마음이 치솟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다. 뭔지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기륭은 사회적 관심을 더 끌어야 하고, 우리는 기륭에 더 와야 한다. 이대로 한 번 오고 끝날 수는 없다. 나와 함께 온 '영화와 책' 동호회원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즉석에서 '기륭 돌아가며 오기' 모임 비슷한 것이 결성되었던 것을 보면.

그 다음에는 신문기사를 검색하면 다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2005년부터 시작해 거의 이천 일이 되어서야 끝난 복직 투쟁의 중간에 끼어들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기륭에 들르는 것만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2010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진 '사회적 합의'는 전적으로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인내와 투쟁의 힘이었다. 그때까지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곁에서 투쟁한 사람들과 함께 나 역시 멀리서나마 기뻐하고 승리감을 느꼈다.

악마도 지킨다는 계약, 우리는 뭔가

그런데 공장 점거와 삭발, 고공농성, 94일간의 단식, 크레인 올라타기 등 보통 사람들로서는 하나만 들어도 아찔한 고난들만으로는 부족했나보다.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 2010년인데 노조가 공장에 복직한 것은 2013년 5월이 되어서였고, 회사는 8개월간 노동자들에게 일도, 월급도, 4대 보험금도 지급하지 않았다. 급기야는 제야의 밤 직전에 겨우 열 명 남짓 되는 조합원들의 눈을 피해 최동열 회장은 야반도주를 하는 치사한 짓마저 저질렀다. 이제 '직접고용을 하겠다'는 회사의 약속은 저 멀리 날아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 다시 새로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소설을 쓰고 번역을 하는 나는 요즘 <더 스토어>라는 공포소설을 번역하고 있다. 시의회가 겨우 5명인 작은 소도시에 커다란 기업이 들어오면서 소도시의 삶이 피폐화되는 과정을 그린, 매우 사회적인 공포소설이다. 이 소설을 보다 보면 기업에 규제가 없을 경우 기업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악이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신문 지상을 장식했던 사건들이 소설의 외피만 쓰고 나타나 있어서 번역하다보면 내가 장르소설을 번역하고 있는지 사회고발 소설을 번역하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다.

예를 들자면 기업의 압박면접을 가장한 성희롱, 의회 매수, 환경 기준을 무시한 토지 개발 등 우리에게 '익숙해진 관행'이 셀 수도 없이 나와 있다. 미국 아마존에서 '도움이 되는 리뷰'(부정적인 시각) 1위는 "이런 일이 미국에서 일어날 리가 없다. 작가는 너무 황당하게 소설을 끌어가고 있다"였는데, 그것을 보며 나는 '우리나라에는 다 일어났던 일이야'하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결국 기업의 자중지란을 이끌어내고 선의 힘이 승리하도록 만드는 것은 자신의 소도시 지점 매니저가 된 주인공에게 '점내의 자율권을 보장하겠다'는 회장의 계약이었다는 점이다. 악마조차도 계약은 지켜야 한다는 서구권의 고집스러운 고정관념에 기댄 결말이라고 할까.

우리가 '천조국'이라고 반 농담삼아 말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제1세계'들의 힘은 결국 사회적 합의와 법이 지켜진다는 믿음, 자신들의 세금이 헛되이 쓰이지 않는다는 믿음, 이 두 가지에 기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왈칵 부러움과 질투심이 치솟았다.

악마조차도 계약은 지켜야 하는 사회. 사회적 합의가 휴지조각이 되는 사회. 어느 쪽이 더 탄탄하고 지킬 가치가 있으며, 사회 구성원을 지켜줄 사회인가. 대답은 자명하지 않은가. 마우나 리조트 사고를 군 의문사가 묻고, 군 의문사를 세월호가 묻고, 세월호를 다시 군 의문사가 묻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전진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하는 '사회적 합의'를 살려낼 때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온갖 사고와 사건에 경악하면서도, 기륭전자와 같은 사회적 합의로, 기본으로 돌아가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우리 사회 전체를 경악으로 빠뜨린 '세월호 침몰'의 원인 중 하나는 화물 과적이었다. 이행되지 않는 사회적 합의가 쌓이고 쌓이면 바로 '화물 과적'이 된다. 우리는 모두 '대한민국-세월호'에 타고 있다. 그리고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은 법과 계약을 지키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악마보다도 못한' 사회가 되지 않도록, 모두가 나서야 할 시점이다.

10년이 넘도로록 그런 사회적 정의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지치지 않고 싸우고 있는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진정한 우리 시대의 평형수임을 잊지 말자.
덧붙이는 글 글을 쓴 송경아 기자는 소설가입니다.
#기륭전자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2. 2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3. 3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4. 4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5. 5 "이러다 임오군란 일어나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 "이러다 임오군란 일어나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