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이 잘 보이는 명당자리 반구정에도 철책이 둘러서 있다.
김종성
서울에서 경의선 전철을 타고 북쪽으로 1시간쯤 달렸을까, 경기도 일산과 파주를 지나면서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 들판이 전철 창에 가득 찼다. 마치 가을 들녘을 찍은 큰 사진작품을 연달아 보는 것 같았다. 추색이 완연한 들녘 연작(連作)을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종점인 문산역이다.
원래 종점이었던 경의선 임진강역은 오전, 오후 하루 두 번만 오가는 DMZ 관광열차로 바뀌면서 일반 열차는 더 이상 오가지 않는단다. 하는 수 없이 자전거 여행의 출발지가 임진강역이 아닌 문산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몰랐던 문산 오일장, 임진강역 가는 자유로 옆 임도길, 임진강변의 아름다운 정자도 알게 되고 오히려 여행이 풍성해졌다.
문산역 앞 문산읍엔 매 4일, 9일마다 오일장이 펼쳐진다. 장터 입구에 시장을 모조리 빨아들이기라도 하려는 듯 이마트가 거대한 진공청소기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큰 오일장은 아니지만 많은 주민들이 찾아와 먹거리와 물건을 사고팔고, 흥정하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정겨운 동네 장터다. 추수의 계절답게 밤, 대추, 배, 감들이 흔히 보이고, 어느 식당 앞에서 홍보용으로 전어를 굽는 냄새가 집 나갔던 식욕을 한껏 돋우었다.
단 냄새를 풍기며 아저씨가 만드는 '달고나 뽑기'와 애완용으로 파는 귀여운 새끼고양이들 앞은 동네 아이들 세상이다. 타지역 아시아 국가에서 이주한 젊은 어머니들과 아이들도 장터에서 흔히 마주쳤다. 한핏줄, 한민족이라며 순수혈통을 강박적으로 주입 시켰던 학창 시절 교과서와는 달리 원래 한반도는 몽골, 중국, 인도사람까지 도래했던 다민족국가였다. 이제 서남 아시아인까지 섞인 다음 세대는 새로운 다민족 국민의 얼굴을 가지게 될 듯싶다.
문산읍에서 '반구정' 이정표를 따라 차도와 농로 옆 임도를 이삼십 분 달리다 보면 어느새 임진강변으로 들어서게 된다. 함경남도 덕원군 마식령 산맥에서 발원한 임진강은 황해북도 판문군과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로 들어와 연천, 적성, 고랑포를 적시다 문산에서 비로소 하류가 되면서 서울 한강으로 유입되어 황해 바다로 흘러드는 강이다. 한강으로 유입되기 전 임진강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는 문산이지만, 자유로와 높다란 군용 철책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런 방해물에서 벗어나 임진강을 잘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반구정'이라는 전망 좋은 정자다.
반구정은 경기도에서 관리하고 있는 공식 문화재로 조선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었던 황희(1363∼1452)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그래서 정자 이름이 반구정(짝 伴, 갈매기 鷗, 정자 亭)인가 보다. 6·25전쟁 때 그만 불타 버렸다가 황희의 후손들이 1967년 옛 모습으로 다시 개축했다. 이웃의 한강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바다의 내음이 느껴지는 강 하류 특유의 모습과 널찍한 모래톱 등 임진강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새롭다.
맑은 날 정자에 오르면 멀리 개성의 송악산까지 볼 수 있다지만 지금 반구정과 임진강 사이엔 날카로운 철조망이 쳐져 있고 초소엔 총을 든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던 황희 할아버지는 못난 후손들로 인해 이런 살풍경이 펼쳐질 줄 상상이나 했을까. 반구정 옆 반구정 나루터는 큰 장어식당이 되어 운영 중인데 이 식당의 자랑이었던 임진강 경치 또한 철책으로 빛을 잃었다. (반구정 운영시간 오후 6시까지, 입장료 천 원, 문의는 031-954-2170 )
남한의 최북단 유원지가 된 임진강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