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아픔과 현안 침묵하지 말라"

[인터뷰] 1980년대 공주 민주화운동을 이끈 세광교회 이상호 목사

등록 2014.10.04 17:31수정 2014.10.05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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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5일 오전 10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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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공주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이상호 목사는 1984년 충남 공주에서 세광교회를 세우고 1985년에 설립공인예배를 드렸다. 20년 전 이인면 주봉리로 옮겨왔다. ⓒ 송영옥


'시대의 아픔에 침묵하지 말라'는 이상호 목사는 1980년대 충남 공주에서 민주화운동과 농민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4대강 사업과 국정원 정치개입, 세월호 사건까지 그는 사회 문제에 침묵하지 않았다. 

공주지역에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역사의 기록을 되새기기 위해 이 목사를 만났다. 그는 현재 615공동실천 남측위원회 대전본부 공동대표, 대전충남 우리겨레하나되기 운동본부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다음은 이상호 목사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세월호 사건, 여전히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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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공주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이상호 목사는 평소에 즐겨 입는 생활 한복을 입고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 송영옥


-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다.
"4대강 사업의 삽질이 난무 할 때는 강으로, 세월호 사건이 터진 후에는 서울 광화문과 집회현장에 다니고 있다. '평화 통일 골든벨 행사' 등 사회운동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 세월호 사고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가 일었다. 대통령부터 모든 관련 기관이 관망할 때 배가 가라앉았다. 그동안 새로운 법을 만든다면서 합의가 되느니, 유가족은 배제되었느니...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에 차 거리로 나갔다. 광화문으로 달려가고, 성명을 발표하고, 세월호 유가족 도보행진단이 우리 지역을 통과 할 때도 격려하고 함께 했다."

- 목사님의 젊은 시절을 회고해 본다면.
"한신대를 나왔지만,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군에서 배운 게 많다. 보안사에 차출이 되어 철원에 근무했다. 행정업무를 맡으면서 간첩 아닌 사람 잡아다가 고문해 간첩으로 둔갑시키고, 술 한잔 마시고 철책선 근처에 얼쩡거리는 사람들 잡아다가 '월북 기도했다'고 강제 자백을 받아내는 걸 봤다. '아!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복학을 하고 한신대를 다니면서 1980년 5월의 서울의 봄을 맞았다. 삶의 여정에서 약자, 사회정의,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세우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 목회자의 길은 순탄했나?
"처음 28살에 목사에 되어 충남 부여에서 농민운동을 지도목사로 시작했다. 나름대로 국과관도 뚜렷하다고 생각했는데 경찰은 자꾸 와서 '정부와 농민 간 이간질시켜서 나라를 혼란하게 한다'며 사표를 내라고 종용했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농민의 권익을 위해 일하는데 경찰이 성직자에게 사표를 내라고 하느냐?'고 물러가라고 했더니, 면장과 지서장이 찾아와서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부여군에서 누구누구가 사표를 냈다, 당신만 남았다, 살려달라'고 했다. '목사가 농민회 지도 목사 한다고 면장이 목이 날아난다면 민주주의가 아니지, 그렇다고 한다면 성직자의 명예를 걸고 구명운동을 하겠다'고 한 일화도 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예수를 만나다"

- 충남 공주 민주화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1984년에 공주로 왔다. 당시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나를 알고서 '부여에서 운동권 목사 하나가 공주로 왔다'는 말을 퍼뜨렸다. 20~30평밖에 안 되는 개척교회에 공주사대 등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문익환 목사님을 모시고 기도회를 할 때는 300명 넘는 학생들이 몰려서 지역에서는 난리가 났다. 또 지역 목사님들이 우리 교회에 몰래 와 보면서 '찬송가 아닌 노래를 교회에서 불렀다, 순수한 교회가 아니라 정치적 관심이 있다'며 공주시기독교연합회에 활동을 제재했다. 그 탓에 7년간 연합회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런 배경 속에서 1987년 6월 항쟁을 맞으면서 감리교회 원로 목사님 한 분과 젊은 목사님들이 6월항쟁을 공주에서도 가열차게 시작했다. 그 결과 9월 26일 민주정치국민운동 공주창립대회에 공동대표와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당일 박형규 목사님이 강사로 오셔서 중동초등학교를 빌려 행사를 하려 했는데, 경찰이 원천 봉쇄를 했다. 옥내 집회를 요구해서 사대부고 앞 우리 교회로 와서 집회를 했다. 그런데 경찰이 도중에 최루탄을 쏴 많은 사람이 다치고 경찰에 잡혀갔다. 그래서 학생들이 다 나올 때까지 성직자로 돌아가지 않고 항거했던 일화가 있다."

- 삶의 가치관과 철학은?
"8남매로 태어나 단칸방에서 살았다. 막노동으로 어렵게 살아온 어린 시절, 중3 때 예수를알게 되고 빠져들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목사가 되기보다는 예수가 너무 좋아서 더 배우기 위해 신학교에 갔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어서 열심히 해 28살에 목사가 됐다. 예수의 제자와 종으로서 시대에 정의, 평화, 인간을 위해 당연히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 기억에 남는 일이나 사람이 있다면.
"1987년 6월항쟁과 '9.15 최루탄 사건' 때 경천감리교 신두수 목사님을 평생 잊을 수 없다. 당시 그분은 은퇴를 앞둔 60대 후반이었는데, 학생들이 다쳐서 병원에 가고 경찰서에 끌려갔을 때 경찰에게 '아이들 내놓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 한다, 나를 잡아가라'고 하면서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교회가 시골로 오면서 당시 활동했던 많은 분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 등이 있다."
#이상호 목사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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