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중인 페멘 활동가 폴린 일리에. 사진은 페멘의 전속 사진작가 쟈콥 크리스트(Jacob Khrist)가 찍었다.
Jacob Khrist
1년 6개월 전, 한 프랑스 기자가 내게 페미니스트인지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럼 페멘(FEMEN)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페멘? 처음 들어본다고 했더니, 그는 페미니스트라고 했던 내 대답의 진정성에 강한 의문을 표하는 표정을 지으며 더 묻지 않았다. 그러고 돌아선 뒤, 어떻게 페멘을 모르고 살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페멘이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요란한 악명(!)을 떨치는 새로운 여전사 그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반라의 몸 위에 구호를 적고 머리에는 화관을 쓴 채 가부장제에 포섭된 굴욕적인 세상에 맞서는 페미니스트 그룹. 이들은 2008년 우크라이나에서 탄생한다. 키예프에서 만난 네 명의 소녀는 자본주의에 힘없이 투항해 버린 세상을 혐오하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섹스 산업, 독재, 종교의 교조주의'를 가부장주의가 발현시킨 3대 악이란 결론에 이르자, 이에 저항하기 위해 페멘을 결성한다.
페멘은 여성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주요 방편이 바로 여성의 몸이었기에, 그것은 역으로 여성 해방을 넘어 모든 인간 해방을 위한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렇게 해서 페멘의 유명한 트레이드마크가 된 '벗은 상반신, 머리에 얹은 화려한 화관'이 탄생했다.
그것은 남성에게 지배 당하는 대상이던 여성의 육체를 행동의 주체로 변신 시키는 드라마틱한 반전이었다. 효과적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그리하여 단숨에 적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이 무기를 통해 페멘은 순식간에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페미니스트 그룹이 되었다.
2년 전, 창립 멤버 4인방 중 이나(2013년,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마리안느 우표의 새 모델이 되기도 했던 바로 그 인물)가 나무 십자가를 전기톱으로 자르면서 우크라이나 감옥에 수감될 위기에 처해지자 이들은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이들은 주요 활동 무대를 프랑스 파리로 옮기고, 지금은 빠른 속도로 전 세계로 그 조직망을 뻗어가고 있다.
페멘의 적은 섹스 산업의 고객, 다보스포럼에 모이는 기업인들, 정치와 결탁해 여성의 몸을 억압하는 데 앞장서는 종교, 극우정당 등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여성과 약자들을 억압하는 모든 세력이다. 교회 종탑에 올라가 십자가를 잘라내기도 하고, 이슬람 국가의 법원 앞에서 반라의 시위를 벌이며, 의회에 진출하게 된 프랑스 극우정당 앞에서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변장을 하고 파시즘이 멀리 있지 않음을 만천하에 경고하기도 한다.
가장 많이 주목받는, 동시에 가장 많은 시련과 수난을 겪으며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페멘. 지금껏 만나왔던 파리의 생활좌파들과는 결이 많이 다른 그들이지만, 만나야만 했다.
'섹스 산업·독재·종교의 교조주의'... 분노하고 저항하라
파리 북부. 클리시(Clichy)라는 동네에 위치한 페멘의 사무실을 찾은 날, 강가에 자리 잡은 이 마을 위로 나른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두 발자국만 가면 북쪽으로 뻗은 센강이 굽이쳐 흐르는 항구의 거리(Rue du port). 문 앞에 도달하자 담 너머로 삐죽 튀어 나온 대나무들이 싱싱한 얼굴을 드러내더니, 발랄하고 소박한 모습의 아가씨 폴린 일리에(Pauline Hilier, 27)가 밝은 얼굴로 문을 열어준다.
파리 18구에 있던 그들의 첫 공간이 화재로 전소한 후 여기로 옮겨왔다. 페멘이 들어서기 전까지 8년간 무심하게 방치되어 있었건만, 그녀들이 들어서자 주인은 마침 이 공간에서 해야 할 일이 생긴 듯 나가줄 것을 요청했고, 법원에서는 얼마 전 퇴거 명령을 내린 바 있다. 아직은, 지독히도 느린 프랑스 사법행정의 최종 판결문에 담길 선처를 기대하며 머무는 중이다. 페멘은 장기간 비어 있는 공간을 점거해 의미있게 활용하는 점거운동단체 '검은 목요일(Jeudi Noir)'을 통해 이 공간에 들어올 수 있었다.
폴린의 안내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믿을 수 없이 넓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들에게 대체 왜 이렇게 넓은 공간이 필요한 걸까? 가끔 모여서 회의를 하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넓었다. 알고 보니 페멘의 핵심 멤버 7인이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매주 회원들과의 세미나는 물론 신체 훈련까지 한다. 폴린에게 지난 여름 한국에서 번역돼 출간된 책 <분노와 저항의 한 방식, 페멘>을 선물로 건네며 질문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