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만든 대장간에서 일하는 카헬. 무척 진지하다.
목수정
- 충분히 이해가 된다. 나 역시 뭔가를 직접 손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끓어 넘칠 때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절은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였다. 그 무엇도 사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 들고 갈 가방도 직접 바느질해서 만들어 들고 다녔다. 그러나 그렇게 내 손으로 많은 것들을 직접 해결하는 삶의 방식과 직업 자체를 아예 대장장이로 전환하겠다는 생각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어 보인다. "물론이다. 약 3~4년 전부터 모든 것을 손으로 만들어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하나의 철학처럼 명확하게 내 삶을 지배하게 된 것은 사고를 겪고 나서부터다."
- 무슨 사고?"3년 전 유도를 하다가 머리를 다쳤다. 115kg이나 되는 거구의 청년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 사고로 척수를 다쳤다. 바로 병원으로 가서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검진을 받았지만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고, 의사는 아무런 치료도 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일이 있고부터 나는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내가 누구인지, 내 부모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말할 수 없이 피곤해서 이 상황을 견디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다시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역시 같은 말뿐이었다. "당신의 증세는 우울증인데, 그것은 당신이 겪은 사고와는 무관하다"면서 우울증 약만을 처방받았다. 졸업을 앞두고 학생들은 기업 연수 과정을 필수로 거쳐야 했다. 나는 연수를 위한 면접을 보던 중에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지금 난 이 모든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나를 내버려 둬요."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사실이었다. 나는 미쳐가고 있었다."
- 지금은 멀쩡해 보인다. "거의 정상을 되찾았다. 날마다 죽을 생각만 하면서 미쳐가고 있을 때 부모님이 의사 라블랑쉬에게 찾아가보자고 권하셨다. 그는 내과의사면서 동시에 정신과의사였다. 그는 대체의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의료보험관리공단에서 취급하지 않는 대체의학과 약들을 많이 사용했다. 번번이 그들과 갈등이 빚어지자 그는 의료보험관리공단을 탈퇴하고 제도권 밖의 의사가 돼버렸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가 매우 실력있고 정직하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는 정신과 신체의 문제를 함께 다룰 수 있는 의사였기에 나는 그에게 갔다.
라블랑쉬는 단번에 내 사고가 내 우울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그 사고로 뇌신경이 손상을 입었고, 잠을 잘 때면 쉬어야 할 뇌신경들이 완전히 살아 움직이면서 마치 밤새 켜놓은 컴퓨터가 가열돼 뜨거워지는 것처럼 뇌가 쉴 새 없이 돌아가서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더 피곤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악몽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죽음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도 했다.
그가 내게 내려준 첫 번째 처방은 정골사(Osteopathe)를 찾아가는 것과 해초로 만든 약이었다. 일흔이 넘은 정골사 역시 제도권 밖의 의사였다. 그는 내가 그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내 목덜미 위쪽에 손을 댔고, 마치 오래 전부터 내 문제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 두 사람의 치료를 통해 나는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나에게 마치 20여 년간 내가 지어왔던 집이 송두리째 불타버린 것과도 같았다."
- 어째서? 비교적 금방 회복된 경우가 아닌가? "그렇다. 다행스럽게도. 그런데 나는 이전까지 신체적으로 완전히 건강하고, 내가 건너뛸 수 없는 역경은 없으며, 내가 원하는 일은 그 무엇이든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유도하다가 부딪힌 그 단순한 사고로 나는 잠시나마 오직 죽기만을 열망하는 시간을 겪었고, 거기서 날 구해준 사람들은 비제도권의 의사였다. 이 사회가 내쫓은 사람들인 것이다.
내가 견고하다고 믿었던 이 세상의 모든 겉모습들이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나는 진정으로 무엇을 알고 있는지, 내 삶이 잠시라도 헛된 일에 소모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본의 논리로만 굴러가는 이 세상의 어리석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무것도 손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직 돈을 내고 뭔가를 사서 소모한다는 것, 그리고 또 뭔가를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번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델이 역겨워졌다. 대형 슈퍼마켓에 가서 산더미처럼 뭔가를 사서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게 힘들어졌다."
- 대장장이로의 전환을 꿈꾸게 된 것은 바로 그 무렵인가?"사실 그 꿈을 꾸게 된 건 아주 갑작스런 계기에서였다. 물론 사고 이후 일어난 가치관의 변화가 그 바탕에 깔려 있긴 하지만 말이다. 첫 직장인 렌느의 연구소로 이주 오게 되면서 나는 캐나다에서 지낼 때처럼 모든 것을 만들어 쓰고자 했다. 당연히 좋은 연장이 필요했다. 그러나 좋은 연장을 만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이드 인 차이나' 라벨이 붙어 있는 대충 만든 연장들을 피해 말 잘 듣는 연장을 갖는 꿈을 꾸게 됐고, 그걸 내 손으로 직접 만들고 싶어져서 그 기술을 가르쳐주는 데가 없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한 베트남 출신의 대장장이가 하는 연수 프로그램을 찾아냈다. 나는 1주일간 그의 집에 가서 먹고 자면서 고철을 두드려 연장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이 칼이 내가 처음 만든 연장이다. 30년을 달리고 폐차 처분된 트럭으로 만들었다. 내 스승이 만드는 모든 연장은 폐기 처분된 고철을 이용해서 만든다. 처음 불 앞에 서서 철을 녹여내고, 그것으로 내가 원하는 미끈한 연장을 만들어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평생하고 싶은 일을 찾은 기분이었다. 파랗게 번득이는 불꽃 앞에만 서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대장장이의 신이라도 된 듯, 온몸에 에너지가 넘쳐 흘렀다.
마치 정신없이 연애에 빠져드는 사람처럼 나는 이 일이 너무 좋아서 연구소에서 일하다가도 빨리 집으로 가고 싶어진다. 내 스승도 나를 금방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 다음 휴가 때 그는 나를 불러 무료로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 옆에서 보름 동안 일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내 대장간을 차렸다. 물론 지금은 내가 필요한 것들을 만들 뿐이지만 곧 다른 삶들을 위해서도 연장을 만들 것이다."
- 당신의 스승은 대장장이 일이 생업인가?"그렇다. 그가 만드는 연장은 품질이 좋기 때문에 전 세계로부터 주문을 받는다. 주로 칼인데, 도끼, 망치, 가위 이런 것들도 만든다. 그리고 1년에 한두 번씩 연수생을 받아서 가르친다. 한 번에 딱 한 명만 가르치기 때문에 온전히 집중해서 배울 수 있다. 그 연수를 받고 나면 직접 연장을 제작할 수 있게 된다."
- 나무집을 지었던 적도 있지 않나? "혼자서 지은 것은 아니고 나무집을 짓는 데 참여해서 함께 지었다. 대장장이 일로 생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연마하게 되면 땅을 사서 거기에 집과 대장간을 함께 내 손으로 지어서 살 것이다. 태양열과 풍력을 이용해서, 100퍼센트 에너지를 자력으로 생산해내는 그런 집으로 지을 생각이다."
자본의 하수인, 과학... 저항할 것인가, 복종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