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전 허공을 오르는 스님
김종길
무릇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기운이 중요하다. 땅과 하늘의 기운을 받지 못하는 현대의 아파트 생활은 사람의 정서 또한 삭막하고 메마르게 만든다. 부드러운 대지의 기운과 푸른 하늘과 초록의 숲에서 멀어지니 그럴 수밖에. 일반인들도 이러할진대 수행을 하는 이들에게도 기운이 남다른 곳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높은 벼랑에 암자를 지었을까. 불가에서 도를 깨치는 것을 '돈오'라 하고, 깨치고 난 후 수행을 계속하는 것을 '점수'라 한다. 성철 스님처럼 단박에 깨쳐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 '돈오돈수'라면, 깨치고 난 뒤에도 중생의 습기를 없애는 등의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 '돈오점수'다.
오산은 평지에 우뚝 솟은 산이지만 넉넉하다. 너른 구례 들판과 넉넉한 지리산, 어머니 젖줄 같은 섬진강이 있으니 포용이 넓다. 비록 절벽에 들어선 암자지만 이곳에서 보는 조망은 충분히 포용력을 갖게 한다. 사방이 탁 트여 있으니 어느 한 곳 막힘이 없고 저 멀리 풍경까지 속속들이 들어온다.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을 수용하고 포용한다는 말이다.
도를 이룬 선승들이 이처럼 툭 터진 곳을 수행처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 도를 깨치기 전까지는 한 지점만 응시한 채 자신을 들여다보지만, 깨치고 난 뒤에는 자신을 넘어 세상의 모든 것을 수용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를 불가에선 '오도(불도의 진리를 깨달음)'와 '보림(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법)'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길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높은 곳에서 진리를 깨치고, 도를 이뤄 부처가 되기 위해 정진하는 동시에 저 아래 사바세계의 고해에서 헤매는 일체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보살의 일념을 되새겼을 것이다. 이렇게 확 트인 곳으로 여수 향일암, 낙산사 홍련암, 지리산 금대암, 남해 보리암 등을 들 수 있다.
다만, 이 탁 트인 곳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곳은 아니다. 아직 수행이 부족하거나 떠도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이런 곳에 있게 되면 마음을 잡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산으로 아늑히 둘러싸인 어머니 품속 같은 곳에 있어야 마음을 다잡고 공부가 제대로 된다. 지리산 벽송사가 그러하다. 벽송사가 조선 선불교의 종가라는 별칭을 갖게 된 데는 우연이 아니다.
벼랑 사이로 숨은 해를 쫓아 밖으로 나왔다. 강 건너 산 능선에 반쯤 걸려 있던 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푸른빛 어스름 속에서 스님 한 분이 붉은 가사를 입고 높다란 벼랑을 오른다. 잠시 후 벼랑을 빠져나온 염불 소리가 사방 허공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암자에서 내려다본 구례들판와 섬진강
김종길
네 명의 고승이 수도했다는 사성암, 이런 추측도 가능 |
지리산과 섬진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사성암은 오산 정산 부근의 깎아지른 암벽에 지은 암자로 원래 오산암이라 불렀다. 544년(진흥왕 5년)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산(鰲山)은 바위가 거북이(자라) 등껍질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성암사적>에 4명의 고승, 즉 원효대사, 도선국사, 진각국사, 의상대사가 수도하였다고 하여 사성암이라 부르고 있다.
사성암은 연기조사가 544년(진흥왕 5년)에 화엄사를 창건한 후 지었다고 하나 이는 다소 무리가 있다. 화엄사는 <화엄사사적>과 <구례속지>에 544년(진흥왕 5년)에 연기조사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진흥왕 당시 구례는 백제의 땅이었고 화엄사의 석조물들이 대부분 8~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미루어 이런 기록을 믿기는 어렵다.
게다가 1979년 발견된 <신라화엄경사경> 발문에는 연기조사가 754년(경덕왕 13년) 8월부터 화엄사에서 <신라화엄경사경>을 만들기 시작해 이듬해 2월에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화엄사는 8세기 중엽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성암도 연기조사가 창건했다면 이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물론 이렇게 볼 때 그 이전에 살았던 원효(617~686) 스님과 의상(625~702) 스님이 사성암에서 주석했다는 것은 후대에 오산암이 사성암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덧붙여진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연기조사는 생몰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인도의 승려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건 신라 경덕왕 때의 황룡사 소속의 승려였다는 사실이다. 연기조사의 흔적은 지리산 일대에서만 화엄사를 비롯해 대원사, 연곡사, 법계사 등에서 볼 수 있다.
약사전 암벽에는 구례 사성암 마애여래입상(전남유형문화재 제220호)이 조각되어 있다. 음각으로 생긴 이 마애여래입상이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밝혀지면서 이 암자가 언제 지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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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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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 위에 핀 꽃처럼... 지리산 사성암의 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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