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2월 히틀러는 "앞으로는 내가 전군의 지휘권을 직접 행사한다"라고 공표했다. 이 선언으로 200년 전통의 독일 총참모부는 괴멸됐다.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1938년 1월 25일 저녁. 헤르만 괴링은 게슈타포가 작성했던 서류철을 들고 히틀러를 찾았다. 서류에는 한스 슈미트라는 한 사기꾼의 진술이 적혀 있었다.
이 사기꾼은 "베를린의 한 거리에서 젊은 남성과 동성애에 빠져 있는 육군 장교를 목격했는데, 그는 다름 아닌 폰 프리츠(Werner von Fritsch) 육군 총사령관이었다"라고 말한다.
괴링은 직접 재판장이 돼 동성애를 했다는 추문을 재판했고, 프리츠 장군은 숙청됐다. 그 다음 차례는 전쟁성 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원수였다. 오랫동안 홀아비였던 블롬베르크는 그해 1월에 재혼을 한 부인이 성매매를 했었다고 날조됐다.
괴링은 이를 이유로 독일 육군의 최고위 장교를 파면시킨다. 군부 숙청은 히틀러에게 비판적이던 16명의 장성을 예편시키고, 44명을 좌천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이어 1938년 2월 4일 히틀러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앞으로는 내가 전군의 지휘권을 직접 행사한다"라고 긴급령을 공표한다. 이어 히틀러가 국방군 최고사령부(OKW)를 신설해 육·해·공군을 모두 장악하자 히틀러에게 감히 직언을 할 수 있는 군인은 아무도 없었다. 200년 전통의 독일 총참모부는 이렇게 괴멸됐다.
그리고 이듬해에 2차 대전이 일어났다. 군권을 직접 행사하는 히틀러의 독단으로 독일군은 1941년 러시아 원정에서 30만 기갑부대가 궤멸됐고, 마침내 독일은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된다.
육군총장 사무실 찾은 한 장군... 그의 손에 들린 건 2010년 12월의 어느 날. 정권 실세의 비호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한 육군 준장이 황의돈(육사 31기) 육군 총장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황 총장 전임인 한민구(육사 31기) 총장에게도 똑같이 제출했던 문건 하나를 꺼내놓으며 당시 군의 작전통으로 알려진 핵심 장교들이 '좌파정부에 부역한 좌파장교들'이라며 날조된 내용을 설명했다.
그러나 황 총장은 "수용할 수 없다"라면서 이를 물리쳤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12월 9일 치 <조선일보>에 황 총장이 8년 전에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역대 정부가 다 검증하고 "이상이 없다"고 한 일을 새삼 들춰낸 것이다. 청와대는 기다렸다는 듯 황 총장의 사의를 수용하는 형태로 경질해버렸다. 이후 12월 15일 청와대는 육군 총장에 이명박 대통령의 동지상고 후배인 김상기(육사 32기) 대장을 임명했다.
이런 식으로 미친 듯이 군 수뇌부를 갈아치운 이명박 정부에서 2년 임기의 육군 총장은 모두 5명이 거쳐 갔다. 그 여파로 야전군사령관까지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계속 교체되는 인사대란이 5년 내내 이어졌다.
이런 식의 정치 인사에 합참인들 무사할 리 없었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는 참여정부 당시에 작전의 최고 인재가 등용되는 합참 작전부의 합동작전과장 출신 4개 기수 장교들이 진급에서 탈락되고 좌천됐다.
김종배(육사 36기), 신원식(육사 37기), 김왕경(육사 38기), 장경석(육사 39기)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한직인 학교기관으로 쫓겨나거나 비작전 부서로 밀려났다. 이로 인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합참에서 연합과 합동을 구현하는, 제대로 된 작전계획을 작성할 줄 아는 사람이 없게 됐다.
MB 정부 이후 각 군의 전문성도 '붕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