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 중 부역혐의자들을 사살한 군인들이 그 자리에다 시신을 묻고 있다(대구 근교(1951. 4.). 박도 기자 제공
NARA, 눈빛출판사
하루는 소 등에 짐을 가득 싣고 산을 넘어오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국군이 곧 들어온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국군이 벌써 여기까지 왔나'하는 생각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일러주길 면사무소에 가면 소비조합에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으니 누구든지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하였다. 국군이 들어오면 어차피 다 빼앗기니 그 전에 하나라도 빨리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그 말에 부지런히 가보니 쓸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고 남은 것은 소금에 절인 고등어와 소금뿐이었다. 나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다시 길을 재촉하여 작은 고개를 넘어 맹산서 영원읍으로 향하는 큰 길에 도달했다. 어느 농가에 들어가니 식구들이 피난 짐을 꾸리고 있었다. 북으로 피난 가려고 짐을 꾸린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 집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나는 등에 지고 다니던 가닥가루를 주면서 조반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피난 준비하는 피난민, 양식으로 엿 만들었지만...떡국을 해주어 맛있게 먹었는데 부엌에서 엿 냄새가 났다. 아주머니는 피난길 양식으로 엿을 달이는 중이라고 했다. 모두 분주한 가운데 부엌에선 엿을 달이고, 방에선 남편이 피난 보따리를 열심히 싸고 있었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북으로 피난 가면 다시 집에 돌아 올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글쎄요. 작전상 후퇴라고 하니 다시 올 수도 있겠지요. 가다가 죽지만 않는다면 ……" 하고 말을 흐렸다.
밖에는 공습이 심해서 마음대로 나다닐 수가 없었다. 그때다. 별안간 "국군이 들어온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마을 어귀를 보니 수백 명의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지프 앞에 단 지뢰 탐지기도 선명히 보였다.
놀란 집주인 내외는 허둥지둥 짐 보따리만 가지고 황급히 집을 떠났다. 주인이 떠난 집에는 우리 일행만 남았다.
나는 졸이다만 엿을 먹으려고 부엌에 들어갔다. 하지만 엿이 너무 뜨거워 한 입도 먹지 못했다. 나는 아쉽지만 엿 먹기를 포기하고 불씨가 남아있는 아궁이의 불을 서둘러 껐다. 우리는 울타리를 타고 집을 빠져나와 옥수수 밭을 타고 뒷산으로 도망쳤다.
우리 일행은 산등성이를 타고 다시 남으로 길을 걸었다. 경사가 심한 비탈을 걷다 보니 힘이 부쳐 얼마 가지도 못했는데 날이 저물었다. 어둠이 깔린 산골짜기에는 골짜기마다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큰 길로는 국군이 진격해 오니 피난민, 패잔병 그리고 도망병 모두가 산속으로 도망쳐 온 것이다.
우리는 인민군을 피해 캄캄한 길을 걷다가 조그만 농가를 하나 발견했다. 염치불구하고 다짜고짜 "하룻밤 쉬고 갑시다"하고 집에 들어갔다. 젊은이는 없고 노인만 홀로 남은 집이었다. 노인이 말하길 "우리는 쌀은 없고 먹을 것이라고는 강냉이밖에 없어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강냉이라도 좋아요"라고 답했다. 우리는 노인이 건네 준 이삭 강냉이를 맛있게 먹었다.
강냉이를 다 먹고 나니 노인이 우리를 불렀다. "여보시오, 돼지를 소리 안 나게 잡을 수 있소? 우리 집에 소와 닭, 돼지 몇 마리가 있었는데 군인들이 후퇴하면서 닭은 다 잡아 먹고 소도 끌어가고 송아지와 돼지 한 마리만 남았소. 암만 생각해 봐도 그냥 두었다간 이마저 뺏길 것 같소. 그러니 돼지를 소리 안 나게 잡아 주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의용군 일행을 보고 "혹시 누가 돼지를 소리 나지 않게 잡을 수 있소?"라고 물었다. 그중 한 사람이 자기가 잡을 수 있다고 나섰다.
우리는 돼지우리에서 돼지 한 마리를 끌어냈다. 의용군 하나가 도끼를 높이 쳐들어 도끼날을 돼지 머리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아뿔싸! 순간 놀란 돼지가 머리를 모로 돌리는 바람에 도끼날이 골통을 빗나가 뺨에 비켜 맞았다. "꽥" 돼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마당을 길길이 뛰어다녔다. 혼비백산한 우리 여섯은 돼지를 쫓아 마당을 이리 저리 헤맨 끝에 돼지를 간신히 잡았다.
그런데 돼지를 잡고 보니 어느새 마당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돼지 잡는 소리가 워낙 요란하여 그 소리를 듣고 산에 있던 군인, 당원들이 모두 모여든 것이었다.
그들은 작전상 후퇴 중이라 매우 시장하니 고기를 조금만 달라고 하였다. 가만히 보니 굶주린 그들에게 고기를 나눠 주지 않고 우리끼리만 처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주지 않는다면 강제로 빼앗아가도 어쩔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노인에게 어떻게 처리할까를 물었다. 노인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였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 그들을 불러 모았다. "여러 동무들, 이리 오시오. 이 돼지의 절반을 줄 테니 가져가서 나누도록 하시오"라고 말하고 돼지를 반으로 갈랐다. 그들은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고 절반을 가지고 돌아갔다. 나는 나머지 반을 노인에게 주었다. 노인은 내게 고맙다며 앞다리 하나를 주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돼지 날고기를 소금에 찍어 먹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비린내도 나지 않고 고소한 게 매우 맛있었다. 나는 그날 생전 처음으로 날고기를 먹었다. 우리는 배불리 먹고 퍼져 앉았는데 노인이 돼지 내장을 삶아 와 허리띠를 풀고는 또다시 먹었다.
노인은 우리를 보고 "우리 아들도 군대에 갔는데 아직 소식을 모르고 있소"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돼지를 반이나 뺏겨서 죄송합니다"라고 인사를 하였다. 노인은 "할 수 있나요, 몽땅 뺏기는 것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지요"라고 답했다.
나는 태어나 돼지고기 날것을 처음 먹어 보았는데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내장을 실컷 먹고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조반으로 강냉이를 삶아 먹은 후 앞다리 남은 것을 달아보니 열 근도 안 되었다. 간밤에 우리가 엄청나게 먹어 치웠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노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낮에는 산으로 올라가 조용히 숨어 하루를 보내며 어둡기를 기다렸다. 늦가을 날씨인데 북녘의 산은 한낮에도 불구하고 매우 추웠다. 해발 1000m 정도의 산에 불과했지만,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북풍이 매서워 발길을 더디게 했다.
저녁에 다시 한 농가에 들어가 잠을 청하였다. 집에는 아낙네와 아이 둘만 있었다. 아주머니 말이 전쟁이 나자 남편은 군대에 가고 시동생은 김일성대학에 다녔는데 지금은 소식을 전혀 모른다고 하였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너무 걱정마세요.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나요? 틀림없이 살아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시간이 늦어 집안 식구들은 식사를 이미 끝냈고 남은 밥도 없었다. 아주머니는 쌀이 없어 밥은 못해 주지만, 감자라도 좋으냐고 물어 우리는 아무래도 좋다고 대답했다. 아주머니는 마당에서 감자 한 대야를 담아 가지고 와서 물에 씻은 후 찌기 시작했다.
나는 의용군들에게 감자 지식을 늘어놓았다.
"동무들, 이런 감자를 먹어봤소? 이 감자는 봄에 심어서 겨울에 서리가 올 때 캐는 감자요. 속이 딴딴하고 녹말도 많지요. 녹말로 국수를 만들어 먹는 감자요." 의용군 한 명이 신기한 듯 "아니, 감자로 국수도 만듭니까?"하고 반문했다. 나는 감자로 찰떡도 만들고 엿도 만들고 또 얼키설키하여 감자국수와 떡도 만들어 먹는다고 설명을 했다. 이어 감자는 두부만 못 만들고 어지간한 음식은 다 만들 수 있다고 말하니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아주머니가 삶아 온 감자는 큰 것은 20cm가 넘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조금도 아리지 않고 맛이 좋았다. 우리는 감자를 마음껏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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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없지만 돼지는 있소"... 6·25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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