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관의 훈계 "고졸이 어디 건방지게..."

[공모-20대 청춘! 기자상] 예비 을의 반란, 구직자 인권법 ① 예비 을의 사회

등록 2014.12.28 15:54수정 2014.12.29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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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조차 되지 못한 채 '갑'의 횡포를 이겨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직자들이다. 우리 세 사람 역시 대학졸업과 함께, 을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예비 을'이 되었다. 바늘구멍같은 채용시장에서 선택되는 것 자체도 힘든 일이었지만,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건 수많은 구직과정에서 겪은 부조리와 비인권적인 대우였다. 술자리에서 오고 가던 불평불만은 곧 채용문화를 바꾸기 위한 항목들로 구체화됐다. 우리는 이를 공론화하기로 결정하고, 입법 청원을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기사 세 편에 이 과정을 담았다.-기자 말

험난한 을로의 길

 드라마 <미생>에서 장그래는 고졸이라는 이유로 여러가지 불이익을 당한다
드라마 <미생>에서 장그래는 고졸이라는 이유로 여러가지 불이익을 당한다tvN

"고졸인 네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건방지다."

지난 9월, 한 경비업체의 최종면접장에서 김형길(가명·28)씨가 면접관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면접관이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답한 것이 화근이었다.

면접관은 "고졸인 네가..."로 시작해 김씨에게 10여 분간 훈계를 늘어놓았다. "여태까지 해 놓은 것이 없으니 네 나이에 이런 곳에 면접이나 보러 온 것"이라는 것이 훈계의 주요 내용이었다.

김씨는 기분이 상했지만, 자신의 기분보다 먼저 챙겨야 할 것이 있음을 알았다. 그는 구직자였고, 직업이 필요했다. 그는 면접관에게 "좋은 조언을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김씨의 대답이 아니었다. '구직자' 김씨의 대답이었다.

구직자들은 채용과정 곳곳에서 불쾌한 일들을 겪고 있다. 양효정(가명·28)씨는 이력서를 쓸 때마다 불이익을 받을까봐 걱정한다. 기업의 이력서는 대개 부모의 학력과 연봉을 묻는데 양씨의 부모는 중졸과 고졸이다. 양씨는 "부모의 학력 정도만 묻는 것은 양반"이라며 "자가주택인지 전세인지를 묻는 기업도 있었다"고 말했다.


"취직과 부모 학력의 관계가 궁금하다"면서도 양씨는 기업 인사 담당자에게 여태껏 그 질문을 한 적이 없다.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다. 양씨는 걸어서 15분 거리의 복사집에서 복사를 한다. 집에 프린터가 없어서가 아니다. '모-중졸', '부-고졸'이라고 적힌 이력서를 부모님이 볼까봐서다. 양씨는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효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상세한 이력서와 막말이 오가는 면접을 통과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갑작스레 합격이 취소되는 경우도 있다. 2012년 9월 박홍규(가명·24)씨는 파주의 C 출판사에 최종합격해 3일 동안 연수를 받았다.


그러나 마지막 날 박씨는 일방적으로 채용 취소를 통보 받았다. 사장이 '채용을 없던 일로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취소통보조차 출판사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 아니었다. 연수를 받고 있던 파주출판도시입주기업협의회로부터 채용이 취소됐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박씨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그냥 넘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합격을 했음에도 퇴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구직자들도 있다. 최환수(가명·28)씨는 지난 9월 D 여행사에 입사했지만 두 달 만에 그만두었다. 채용공고에 적힌 연봉과 실제 연봉의 차이가 컸던 탓이다.

최씨는 채용공고를 보고 2800만 원 상당의 연봉을 기대했지만 실제로 그가 받을 수 있었던 한 달에 140만 원에 불과했다. 채용공고의 연봉의 액수는 영업을 잘 했을 경우 받을 수 있는 인센티브의 최대치를 포함한 것이었다. 최씨는 "그런 인센티브를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동종업계에서 악평이 퍼질 것이 두려웠던 최씨는 별다른 항의 없이 여행사를 그만두었다.

예비 을의 탄생

 드라마 <미생>에서 정직원이 되기 위한 PT를 기다리고 있는 원인터내셔널 인턴들
드라마 <미생>에서 정직원이 되기 위한 PT를 기다리고 있는 원인터내셔널 인턴들 tvN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들어질수록 구직자들은 회사 하나 하나가 아쉬워진다. 그 결과 구직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회사의 입장에 맞추어서 정리하게 된다. 조영철(가명·28)씨는 무노조 경영을 하는 E 기업의 면접에 대비하며 평소 자신의 소신과는 다르게 "노조는 없어져야 한다"는 대답을 준비했다.

조씨는 "하나부터 열까지 기업이 좋아할 만한 반응을 고민하다 보면 기업이 잘못을 해도 내가 더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든다며 "기업의 잘못에 둔감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아르바이트와 구직활동을 병행하는 사람들까지 고려한 체감 실업률은 10.2%에 달한다. 취업준비생들이 채용과정에서 철저하게 기업의 입장을 고민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그러나 구직자들을 기업 앞에서 침묵하게 만드는 것은 구직난만이 아니다. 기업이 채용과정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의 법적 경계가 불분명한 것도 문제다. 대개의 관련 법조항이 권고에서 그치기 때문에, 지키지 않아도 구직자들이 항의를 할 수 없는 것이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5조는 기업들에게 표준이력서의 사용을 권장한다. 부모의 학력 같은 직무와 무관한 개인정보의 수집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공공기관에서조차 표준이력서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표준이력서의 사용에 강제성이 없기 때문이다.

윤하영(가명·26)씨는 "법이 애매해서 불합리하다고 느끼더라도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면서 "내가 잘못이라고 생각해도 법적으론 그렇지 않다고 하면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송호창 의원실의 이명행 비서관은 "구직과정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대해 다루는 법이 있지만 강제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면서 법의 개정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민병두·송호창·장하나 의원실은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의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

[예비 을의 반란, 구직자 인권법 ②] 청원, 그리고 그 이후
덧붙이는 글 20대 청춘! 기자상 응모글
#구직자 인권법 #예비 을 #취준생 #막말 면접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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