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아자르는 어떻게 수쉴라의 딸을 죽였을까

[김성호의 독서만세 39] <말라리아의 씨앗>

등록 2014.12.31 16:56수정 2020.12.2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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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리아의 씨앗 책 표지 ⓒ 후마니타스


갠지스 평야에 자리한 어느 마을. 과도한 노동과 못된 시어머니의 괴롭힘에 시달리며 서른 둘의 나이에 일찌감치 중년으로 접어든 수쉴라가 고열에 시달리는 딸을 데리고 보건소를 찾는다.

해가 뜨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 아침식사 준비를 마치고 잠든 아이를 깨워 업은채 꼬박 3시간을 걸어 도착한 곳이다. 이미 100명도 넘는 사람들이 줄지어 대기하는 보건소 마당에서 수쉴라 역시 순번을 받아들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혹시 몰라 챙겨온 거금 7루피는 오늘 중으로 의사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접수원의 주머니로 사라지고 수쉴라와 딸은 마침내 의사 앞에 선다. 의대를 졸업하면 1년가량 지방 보건소에서 의무 근무를 해야 하는 인도의 법에 따라 이 지방에서 일하게 된 젊은 의사는 고압적이고 사무적인 태도로 수쉴라의 딸을 진료한다. 그리고 곧 수쉴라의 딸이 죽음의 질병 칼라아자르(Kala Azar)에 걸려있다는 선고를 내린다.

칼라아자르는 말라리아성 전염병으로 인도와 아프리카 일부 지방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무서운 질병이다. 치료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차원에서 공급을 책임지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가난한 지역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약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경우가 적지 않다.

공급은 적고 수요는 많아서 칼라아자르 치료제는 병원 밖에서 고가에 거래되는 경우도 많다. 의사의 조언에 따라 찾아간 약국에서 약사는 수쉴라에게 300루피를 약값으로 요구한다. 그리고 몇 주 뒤 수쉴라의 딸은 갠지스의 흙으로 돌아간다.

<말라리아의 씨앗>은 열대 의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로버트 데소비츠가 지금 이 순간에도 가난한 나라의 주민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는 말라리아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저자는 수쉴라의 짧은 이야기를 통해 열악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말라리아에 의해 어떻게 희생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독자는 수쉴라의 딸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으로부터 해당 국가의 의학뿐 아니라 사회·경제·정치·문화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이해하고 그 부조리함을 실감하게 된다.


한국인에게는 해외여행을 가게 될 경우에나 관심사가 되는 일이겠지만 말라리아는 제3세계의 여러 국가들에게 당면한 보건문제 가운데 하나다. 수쉴라의 딸을 죽음으로 몰아간 리슈만편모충증만 해도 연간 130만 명의 신규 감염자와 3만여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고 있는 중대한 질병이다. 특히 에이즈의 유행은 수혈이 필요하지만 수혈을 위한 장비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말라리아 유행 지역 병원들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상식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는가

아프리카 대륙은 물론 인도와 동남아시아 등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저자는 인류가 말라리아에 어떻게 대항해왔는지 그 과정과 결과를 다양한 사례를 들며 흥미롭게 풀어놓는다. 말라리아 유행지역의 국가들은 물론 세계보건기구의 야심찬 프로젝트가 어떻게 실패했고 현대 제약회사와 연구자들은 어떻게 현장을 외면하게 되었는지를 현장에서 활약해 온 전문가 입장에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의 펜 끝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제약회사와 현장연구를 기피하는 연구자들, 보건기구의 시대착오적인 의료정책과 비도덕적인 과학자들을 가리지 않고 겨냥한다. 오랜 전쟁에도 말라리아라는 질병을 제압하는데 실패한 인류의 무능이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진다. 그럼에도 인류가 어떻게 말라리아를 이해하고 대항할 수 있게 됐는지도 빼먹지 않고 기록한다.

책의 인상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말라리아의 전파경로를 추적한 지난시대 과학자들의 업적에 있다. '모기를 매개로 한 기생충의 전파'라는 말라리아의 전염경로는 이제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상식이 상식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있었는지 읽다보면 놀라울 지경이다.

말라리아의 원인충과 전염경로의 발견은 인류가 말라리아에 대항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줬고, 그로부터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 간의 자존심 싸움과 보건당국과 학계의 부정·비리·무능 등의 문제가 불거져나오며 인류는 말라리아와의 싸움에서 여전히 열세에 있는 형국이다.

인류의 천형에 대항한 과학의 싸움

현대 인류의 보건을 위협하는 최악의 질병 가운데 하나인 말라리아를 전문가적 견지에서 폭넓게 서술한 이 책은 단순히 질병사를 넘어 사회사적으로 의미있는 부분도 적지 않다. 납세자들의 세금으로 연구를 진행하면서도 결과물에 대해 특허를 신청하는 학자들의 부도덕을 지탄하는 대목이나 말라리아의 원인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잘못된 믿음과 이로부터 비롯된 서구 연구진과의 갈등 역시 흥미롭다. 살충제 등을 통한 매개체의 박멸과 약을 통한 환자치료 사이의 격렬한 대립이 노벨상과 관련한 학자들의 자존심 싸움에서 이어졌다는 내용 역시 재미있는 부분이다.

전반적으로 말라리아라는 질병으로부터 인류사회 전체를 돌아볼 수 있는 확장성 있는 책이었다는 점이 신선했다. 더불어 말라리아라는 질병이 전세계적으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상황에서 인류의 대응이 비인간적이고 무능하기까지 하다는 점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무분별한 화학요법으로 내성을 가진 기생원충이 생겨나고 무책임한 방역정책으로 살충제에 내성을 가진 모기가 늘어난다는 점도 위기로 느껴졌다. 더구나 질병을 정복한다는 명목으로 지나치게 많은 생명들을 실험실에서 희생시켜온 연구의 이면 역시 오만하며 잔혹하게 생각됐다.

책은 이 같은 과학의 어두운 부분을 밝히고 그럼에도 희망을 가져야 하는 부분을 언급한다. 은근과 끈기로 학문을 발전시키고 타인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사람들의 존재 그리고 그들에 답지하는 기부금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책은 현장에서 활약하는 학자 특유의 냉소로 긍정적인 부분보다 관료주의와 정책·제도 등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지만, 그럼에도 엿보이는 긍정적 요소가 적지 않다는 점은 일말의 희망으로 읽힌다고 생각한다.

말라리아가 매년 수십 만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류의 천형이라고까지 불렸던 말라리아에 대항한 선배들의 노력과 좌절을 읽는 것이 곧 우리의 양심적 지성을 성숙시킬 수 있게 도와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덧붙이는 글 <말라리아의 씨앗>(로버트 데소비츠 지음 / 정준호 옮김 / 후마니타스 펴냄 / 2014.11. / 1만 5000원)

말라리아의 씨앗 - 열대 의학의 거장 로버트 데소비츠가 들려주는 인간과 기생충 이야기

로버트 데소비츠 지음, 정준호 옮김,
후마니타스, 2014


#말라리아의 씨앗 #후마니타스 #로버트 데소비츠 #정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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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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