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세상에 미래는 없다

[김성호의 독서만세 40] <트라우마로 읽는 21세기 한국 영화>

등록 2015.01.02 18:47수정 2020.12.2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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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로 읽는 21세기 한국 영화 책 표지 ⓒ 한울아카데미

'역사를 잊은 국가에 미래는 없다(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윈스턴 처칠의 말이다. 지난 시간을 딛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과거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2014년에서 2015년으로 넘어가는 한국 사회에 성찰과 반성의 목소리가 적은 것은 안타까울 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다.

반성과 공감 없는 그들만의 잔치


대종상과 청룡영화상, TV에서 진행되는 각종 연말 시상식은 그들만의 잔치가 된 지 오래다. 서로가 자화자찬하며 상을 나눠 갖기에 바쁜 이들 시상식으로부터 레드카펫 행사와 아이돌그룹의 축하공연 이상의 의미를 끌어내려는 작업은 무의미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사회적 연대와 공감의 확장은커녕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반성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그들만의 잔치 속에서 지난 잘못과 실패는 모두가 꺼리는 무엇쯤으로만 여겨지는 것 같아 입 안이 씁쓸하다.

돌이켜보면 <우아한 거짓말>부터 시작해 <한공주>, <족구왕>, <누구에게나 찬란한>, <목숨>, <다이빙벨> 등을 거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 이르기까지 작은 규모의 영화들이 흥행이나 사회적 파급력 면에서 적잖은 힘을 보여주었던 한 해다. <명량>을 위시한 국산 블록버스터들의 흥행세도 대단했다.

하지만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독과점 문제가 그 어느 해보다 많이 제기되었고 CGV와 롯데시네마는 같은 계열사에서 배급한 영화에 특혜를 준 것이 발각되어 과징금을 물기도 했다. <다이빙벨> 등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영화들엔 상영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아 갈등을 빚는 등 한국영화계의 해묵은 숙제인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2014년이었다.

한국사회의 트라우마를 돌아본 기념비적 영화, <박하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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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 메인 포스터 ⓒ 신도필름

1999년 12월 31일 자정에 개봉한 영화 <박하사탕>은 한국사회가 돌아보지 않은 과거의 상처를 살피고 돌아봄으로써 새로운 천 년을 맞이하고자 한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20세기의 끝에서 제작되고 개봉해 21세기 한국영화들에 새로운 지향점을 만들어주었던 이 영화를 통해 이창동 감독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새 천년을 맞이하는 건 위태롭고 위험한 일이라고 역설했다. <박하사탕>은 영호라는 무너져버린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20년의 시간을 되돌리며 그가 왜 파멸에 이르는지를 추적하는 영화다.


영화는 IMF사태 이후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져있던 1999년부터 박정희 정권이 종말을 맞이한 1979년까지 20년의 현대사를 영호라는 인물의 삶을 중심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이 영호라는 순수했던 청년을 망가뜨리고 괴물로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박하사탕>은 구로공단 노동자에서 80년 5월 광주의 진압군, 고문경찰, 증권투자가, 가구점 사장에 이르기까지 급변하는 한국현대사의 산 증인인 영호의 삶을 통해 80년 5월의 비극을 한국 현대사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지목하고 겨냥한다. 한국영화는 <박하사탕>을 통해 비로소 금기시되었던 광주의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한 층 깊고 용감한 시선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서정남이 뽑은 21세기 한국 영화 22편

영화평론가 서정남의 신작 <트라우마로 읽는 21세기 한국 영화>는 전성기를 맞이한 21세기 한국 영화의 오늘을 진단하고 돌아볼 만한 작품들을 꺼내 다시 읽어보는 책이다. 광주의 트라우마를 치유하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새 천 년을 열 수는 없다고 했던 <박하사탕>을 비롯 우리시대의 시대상과 역사를 의미심장하게 담아낸 22편의 영화를 되짚는다.

저자가 '봉준호 영화의 최고봉이자 역대 한국영화 최고의 문제작'이라 평한 <마더>는 물론 분단의 모순을 솜씨 좋게 영화화 한 <공동경비구역 JSA>, 국가에 의해 용도폐기된 북파공작원의 실화 <실미도>, 폭력이 어떻게 재생산되는가를 한 가족을 통해 돌아본 <똥파리>,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 제주 4·3사건을 다룬 <지슬-끝나지 않는 세월 2>, 성폭력 문제와 그 후를 다룬 <소원>과 <한공주> 등이 깊이 있는 시선을 통해 재해석된다.

저자는 이 같은 영화를 따로 떼어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이유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 말한다. 지난 시간의 트라우마를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치유의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아픈 역사를 현재화하는 작업이 때로 그 역사의 희생자에게는 생채기에 다시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은 아픔이겠지만 슬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이요, 치유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스물 두 편의 21세기 한국 영화를 트라우마라는 키워드로 해석한 이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져야 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트라우마로 읽는 21세기 한국 영화>(서정남 지음 / 한울아카데미 펴냄 / 2014.11. / 4만 3500원)

트라우마로 읽는 21세기 한국 영화 (반양장)

서정남 지음,
한울(한울아카데미), 2014


#트라우마로 읽는 21세기 한국 영화 #한울아카데미 #서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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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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