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점 아줌마를 "엄마"라 부르는 학생들
교사와 함께 점심...교장은 과자 사주고

[현장] 서울지역 첫 고교 사회적협동조합 매점 연 금천구 독산고

등록 2015.01.15 08:28수정 2015.02.2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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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낮 서울 금천구 독산고등학교 독산누리 사회적협동조합 매점에서 학생들이 조합원들과 함께 카레를 먹고 있다. ⓒ 선대식


"카레를 준다고 해서 왔어요."

14일 오후 1시 서울 금천구 독산고등학교 매점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들이닥쳤다. 학생들은 자리에 앉아 카레를 입에 넣더니 "엄마, 정말 맛있어요", "엄마, 카레에 오징어도 들어가 있네요"라고 말했다. 박영인(44)씨는 학생들의 밥에 카레를 퍼서 올려줬다. 기자가 박씨에게 "아들이 왔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학교 학부모인 박씨는 "예전의 매점 분위기였으면 '매점 아줌마'라고 불렸을 텐데, 학생들은 엄마라고 부른다"면서 "독산고 매점은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 학교 교사들도 학생들과 같이 카레를 먹었다. 김홍섭 교장도 매점을 찾았다. 30인분의 카레는 금세 동났다.

2학년인 정수경양은 "예전에 매점은 간식거리만 사는 곳이었다, 탁자에 앉아 수다를 떠는 것도 전자레인지를 이용하는 것도 매점 아줌마의 눈치를 봐야했다"면서 "매점 분위기가 푸근하고 친근하게 바뀌었다, 최근에는 매점에서 주먹밥, 떡볶이, 부대찌개를 얻어먹었다"고 말했다.

매점의 변화는 지난해 11월 교사·학부모·학생이 힘을 합쳐 직접 매점을 운영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들은 매점 수익을 학생 복지비로 쓰기 위해 '독산누리 사회적협동조합'을 꾸렸다. 조합원들이 낸 출자금에 빌린 돈을 얹어, 최고가 입찰액을 내고 매점 운영권을 얻었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첫 사회적협동조합 매점이 탄생한 것이다. 사회적협동조합은 일반 협동조합과 달리, 수익이 나더라도 조합원이 갖지 못하고 공익적인 일에 사용하는 등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울먹이며 "매점 운영권 양보해 달라" 했지만...


독산고에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적지 않다. 또한 고교선택제와 자율형 사립고(자사고)로 심화된 고교서열화로 성적이 낮은 학생들이 늘었다. 지난 2011년 교사들은 학생을 위한 학교로 바꾸기 위해 예비혁신학교 신청을 준비했지만 곧 벽에 막혔다. 홍태숙(43) 교사는 "당시 재직하던 교장은 전교조로 인해 학교가 어려워질 수 있다'며 반대했다"고 전했다.

교사들은 다른 방안을 고민했다. 홍 교사는 2013년 4월 학교 예·결산을 다루는 학교운영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한 해 2000만 원을 웃도는 매점 임대 수익을 학생 복지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행정실장은 "학교 운영비로 쓰고 있다, 매점 임대 수익은 학교운영위원회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교장은 홍 교사의 말에 공감을 나타냈다. 현 조합 이사장인 학부모 김현미(48)씨는 조합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후 교장·교사·학부모가 힘을 모았다. 8월 조합원 20명이 모여 독산고건강매점협동조합을 꾸렸다. 그 해 10월 매점 입찰에 참여해, 2000만 원을 써냈다. 하지만 최고가 입찰 방식 탓에 더 많은 돈을 써낸 업자가 계약을 따냈다.

조합원들은 낙찰자에게 찾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학생들을 위해 매점을 운영하려고 하니, 양보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왜 입찰금을 높게 쓰지 않았느냐"는 핀잔이 돌아왔다. 당시 조합 이사장이었던 학부모 강혜승(46)씨는 "'멘붕'이었다, 의지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학교 구성원들은 2014년 6월 사회적협동조합을 다시 꾸렸다. 학부모와 홍 교사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친환경 먹거리와 사회적협동조합 교육에 나서는 등 분위기를 띄웠다. 조합은 그 해 10월 입찰을 앞두고 출자금으로 400만 원 가량을 모았다. 여기에 빌린 돈을 합쳐 800만 원을 써냈다. 조합은 2014년 10월부터 오는 2월까지 4개월 매점 운영권을 얻었다.

조합원들은 친환경 먹거리를 들였다. 인근 생활협동조합에서 싸게 사왔다. 학생들이 좋아하는 빵과 우유 가격을 낮췄다. 바나나 우유는 1300원에서 1000원으로 가격을 내렸다. 학교 앞 가게들과의 상생을 위해 가격인하 폭을 조정했다. 학교 매점에만 공급되는 저가의 저품질 빵을 없애려고 했지만, 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가격만 낮췄다. 학부모 조합원들은 소정의 임금만 받고 직접 먹거리를 판매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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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전 서울 금천구 독산고등학교 독산누리 사회적협동조합 매점에서 학생들이 먹거리를 사고 있다. ⓒ 선대식


매점은 사랑방으로... 활기찬 점심 밥상 모임

먹거리가 싸지니, 학생들이 좋아했다.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누구나 먹거리 선정과 가격 조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합원으로 가입하는 학생들이 늘었다. 조합원 71명 중에서 31명이 학생들이다. 2학년생 김수연양은 "조합에 피자치즈 빵을 들여놓자고 했더니 진짜로 생겨 놀랐다, 다른 학교 친구들한테 자랑했다"고 말했다.

조합 이사장 김현미씨의 딸인 2학년생 하늘푸른양은 매점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고 말했다. "엄마는 친구들에게 '우리 딸들 왔어'라며 친근하게 대한다, 저보다 친구들의 이름을 더 많이 외우고 있는 것 같다"면서 "친구들이 조합 어머니들과 인생 상담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김 교장도 매점을 자주 이용한다. 김수연양은 "매점에서 몇 백 원 부족할 때, 교장 선생님이 그만큼 돈을 내주신다"고 말했다. 김 교장은 "학생들이 사회적협동조합 매점을 경험하면서, 경쟁적인 교육 환경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조합은 겨울방학 때 매점을 운영해, 학생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앞서 조합은 11~12월 두 달 동안 200만 원의 적자를 봤다. 높은 임대료에도 최소한의 수익만 얻기 위해 가격을 대폭 낮췄고, 수능시험 후 3학년 학생들이 일찍 하교한 탓이다. 김현미씨는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적자가 났다는 건 그만큼 학생들에게 싸게 팔았다는 뜻 아니냐"며 웃었다.

방학 때도 매점을 운영하는 건 점심을 굶을 학생들 걱정 때문이다. 방학 중 방과후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은 전교생 1000명 중 250명 가량이다. 이날 학교를 찾은 학생은 수십여 명에 불과했다. 비용 문제로 학교 급식은 이뤄지지 않았다. 겨울방학 때 매출은 11월의 하루매출(50만 원)의 1/50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조합원들은 먹거리를 팔아 수익을 내는 것보다 학생들과 주먹밥·떡볶이 등을 만들어먹는 데 신경썼다.

매점은 어느새 사랑방으로 바뀌었다. 매점 한 편에 있는 바구니에는 라면, 스팸, 커피가 담겼다. 학생들이 놓고 간 것이다. 박영인씨는 "학생들이 점심 밥상 모임 때 같이 해먹자고 두고 간 것"이라면서 "오늘 카레를 한다고 하니 학생들이 감자·양파·쌀을 가져왔다, 기특하다"고 말했다. 홍 교사도 "학생들은 매점을 이용하면서 인성이 바뀌었다"고 밝혔다.

지역사회에서도 매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입소문이 난 것이다. 김현미씨는 "주민들이 회의를 하겠다면서 매점을 이용하기도 한다, 우리 뜻을 알아주고 후원하는 분들도 있다"면서 "매점으로 인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을 얻고 있다, 감동을 받는다"고 말했다.

"돈 많이 남기는 게 매점의 목표는 아니다"

학부모 강씨는 "조합원들의 헌신으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면서 "조합의 매점 운영이 지속가능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사회적협동조합이 학교 매점을 운영할 때 수의계약이 가능하도록 '서울시교육감 소관 공유재산 관리 조례'가 개정됐다. 오는 2월 입찰 때 임대료 부담을 낮추면서 매점 운영권을 따낼 길이 열린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은 학교 구성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앞으로 안정적인 수익 기반을 갖춘다해도, 수익을 많이 내는 게 매점의 목표는 아니다. 홍 교사는 "이윤을 많이 남겨서 학생들 복지비로 쓰는 것도 좋지만, 가격을 낮춰서 재학생이든 졸업생이든 학교 매점에서 부담 없이 친환경 먹거리를 쉽게 접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선대식 기자의 행복한 학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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