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길
김종길
김일손(1464~1498)은 '잔도를 타고 올라 한 암자에 이르렀는데, 불일암이라 했다. 암자가 절벽 위에 있어 앞은 낭떠러지였다'고 했고, 남명 조식(1501~1572)은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비로소 불일암에 도착했는데, 암자는 허공에 매달린 듯한 바위 위에 있어서 아래로 내려다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성여신(1546~1632)도 '바위 허리에 난 길이 끝나는 곳에 나무를 쪼개어 걸쳐 놓았다. 그 밑은 억만 길이어서, 스스로 목숨을 내맡긴 자가 아니면 태연히 지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당시 불일암에 이르는 길은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진양지>에도 '비탈진 골짜기가 매우 험준하여 작은 길도 없기 때문에 절벽의 허리를 파고 바위를 따라 한 사람만 용납하는 벼랑 깎아지른 곳에 나무를 깎아 잔도를 만들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암자는 또 현애 위에 있어서 높이가 100여 척이 됐다'고 적고 있다. 응윤(1743~1803) 스님도 '갈고리를 허공에 매달고 바위틈을 따라 잡아당기며 나아가면 작은 집이 우뚝하게 서 있는데 속된 생각이 없어진다'고 할 정도로 불일암은 낭떠러지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지리산 유람록의 효시를 연 이륙(1438~1498)은 <유지리산록>에서 '골짜기의 절벽이 매우 높아서 해와 달이 비추질 못한다. 위아래의 높이가 모두 몇백 길이나 되는데,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길이 나 있다. 절벽을 뚫고 오를 수 있는 곳에는 나무를 걸쳐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이 길을 오가는 사람치고 놀라 식은땀을 흘리고 머리끝이 쭈뼛쭈뼛 서지 않는 이가 없다. 또한 절벽 끝에 암자가 있는데, 그 밑은 백여 길이나 된다'고 적고 있다.
이외에도 1618년 불일암을 찾은 양경우는 불일암을 '아득히 구름 끝에 매달린 풍경'으로 묘사했다. 1651년에 불일암을 찾은 오두인은 '깎아지른 듯한 사방을 둘러보니, 반쯤은 허공에 뜬 것 같았다. 매우 깔끔하면서고 고요하여 인간 세상의 경계가 전혀 아니었다. 물외의 청정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이주대는 <유두류산록>에서 '낭떠러지 허공의 끊어진 곳에 위태로운 백 척의 사다리가 겨우 매달려 있다'며 불일암 가는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를 이야기했다.
▲불일암
김종길
지리산 유람 필수 코스불일암은 진감국사 혜소가 도를 닦았고 최치원이 청학을 타고 오가던 곳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 지리산을 유람하던 선비들에게도 꼭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였다.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 한유한, 남효온, 유몽인, 허목 등 조선시대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26세 때인 1489년(성종 20) 4월에 불일암을 찾은 김일손은 <두류기행록>에서 불일폭포를 지극히 아름다운 절경이라 했다. 그는 16일 동안 함양 등구사에서 이곳 불일암까지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가는 곳마다 기뻐하고 놀랄 만한 경치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불일암 한 곳뿐이라고 치켜세웠다.
1810년 4월에 불일암을 찾은 정석구는 <불일암유산기>에서 "(불일암은) 깊숙한 골짜기와 울창한 숲은 쌍계사만 못하고, 맑고 깨끗한 시내와 암석, 크고 화려한 도량은 신흥사보다 못하고, 편안한 형세와 안온한 언덕은 칠불암보다 못했다. 그러나 우뚝한 듯 편안하고, 좁은 듯 널찍하며, 작은 듯 크고, 완만한 듯 높아, 비할 데 없이 빼어나고 기묘하여 잡념이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는 앞의 세 곳이 불일암만 못하다"고 했다.
1935년 8월에 불일암을 찾은 하겸진은 <유두류록>에서 '이 (지리산) 계곡과 골짜기에서 가장 기이한 곳으로는 불일암에서 마무리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며 불일암을 최고로 꼽았다.
▲불일폭포
김종길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다. 1708년 두 달여 동안 영남을 유람한 김창흡은 <영남일기>에서 '(불일)폭포의 전체를 다 거론해도 일컬을 만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명승으로 이름나 유명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며 '최치원 이래로 1천여 년 동안 식견을 지닌 이가 없음'을 한탄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 선비들의 명산 유람 기록인 지리산 유산기에서 불일암과 불일폭포에 대한 묘사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곳을 이야기한 조선시대의 유산기는 수없이 많으나 하나같이 엇비슷한 내용으로 대략 이러하다. 불일암 가는 길의 험함과 허공에 위태하게 매달린 암자의 아득함, 불일폭포의 웅장함, 주위 산세의 기이함을 묘사하고 있다.
청학봉(향로봉)과 백학봉(비로봉)이 좌우에 있고 기이한 봉우리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학담(鶴潭)과 용추(龍湫)의 두 못과 '불일폭포를 완상하며 노니는 바위'라는 완폭대(翫瀑臺) 바위 글씨, 옛날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청학동인 신선의 세계로 이 일대를 묘사하고 있다. 지리산을 유람한 이들은 불일폭포를 일러 개성 송악산의 박연폭포와 자웅을 겨룰 만하다고도 했으나 골짜기의 기이하고 웅장함, 폭포수의 웅장함은 박연폭포보다 더 낫다고 했다.
▲불일암
김종길
햇살이 비치는 곳의 작은 암자 벼랑을 돌자 폭포 소리가 세차다. 아마 두꺼운 빙벽 아래를 흐르는 소리일 것이다. 산모롱이를 돌면 폭포가 있겠지만 잠시 쏟아지는 햇볕에 걸음을 멈췄다. 오른편에 서 있는 장대한 전나무 한 그루 옆으로 철옹성같이 돌담을 둘러 암자의 형체라곤 겨우 그 지붕 끝만 내밀 뿐이다.
평상에 앉는다.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져 살을 뻗는다. 빛은 하늘로 이어진다. 티베트 <사자의 서(바르도 퇴돌)>에서 죽음에 이르면 강렬한 빛이 보인다고 했던가. 너무 밝아서 똑바로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순수한 지혜의 빛을 따라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그 자체가 원래 자신의 본래면목임을 깨닫게 되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을 것이라 했다.
▲불일암
김종길
법당 뒤로는 폭포 위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있다. 눈이 쌓여 계곡을 건널 수 없었다. 작은 텃밭에 우두커니 섰다. 저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수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아득한 산봉우리와 그 너머의 푸른 허공만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옛날 이곳을 지나던 이가 봤다는 바위 글씨는 찾을 수 없었다.
깊은 절간에 붉은 꽃비 내리고우거진 대숲에 푸른 연기 자욱하네.흰 구름은 산마루에 엉키어 자고푸른 학은 스님을 짝하여 조는구나.- <불일암> 서산대사 휴정, <청허당집>
▲불일암
김종길
불일암 일대 명소 |
불일암은 대부분의 옛 문헌에 쌍계사 위쪽 10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지금은 2.5km 정도로 1시간 남짓이면 이를 수 있다. 불일암은 진감국사가 창건하고 고려 희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수도하던 암자로 전해진다. 암자와 폭포에 붙은 '불일'이라는 이름은 보조국사 지눌의 시호이다.
보조국사 지눌이 이곳을 언제 다녀갔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삼정산 상무주암에서 40세 때인 1198년부터 1200년까지 3년을 머물렀던 보조국사는 수선사(지금의 송광사)에서 결사를 하게 된다. 삼정산에 머문 3년 동안 이곳을 들렀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으나 기록은 없다. 암자의 이름을 흔히 불교에서 부처를 가리키는 '불일(佛日)'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 불일폭포 그림에는 '佛一庵 瀑布'로 나온다. 불일암은 수차례에 걸쳐 중건됐다. 1983년에도 소실되었다가 2008년에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불일암 가는 길에는 예전 청학동으로 불리던 불일평전, 최치원이 학을 불렀다는 환학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다녀갔다는 마족대 등이 있다. 불일폭포는 지리10경 중의 하나로 남한에서 설악산 대승폭포 다음으로 높은 60m의 거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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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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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내맡긴 자 아니면 태연히 지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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