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깎을 땐 연필만 깎아라, 그게 '명상'

[독서에세이] 연필 깎기 장인의 '현재에 깨어있는 방법' <연필 깎기의 정석>

등록 2015.02.13 15:30수정 2015.02.13 15:30
0
원고료로 응원
 <연필 깎기의 정석> 표지

<연필 깎기의 정석> 표지 ⓒ 프로파간다

성의 없이 대충 둘둘 말아놓은 파란색 요가매트가 방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난 그 위에서 새롭게 거듭날 나를 기대하며 명상을 하곤 했다. 하루에 한 시간 명상을 목표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길 100일. 내게 더는 실망을 느끼고 싶지 않아 명상을 그만뒀다.

명상의 대가들은 명상을 하는 이유로 '현재에 깨어있기'를 든다. 하지만 명상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현재에 깨어있으라'는 이 말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져, 도통 현재에 깨어있지 못하게 되는 현실을. 현재에 깨어있지 못한 채 1시간 동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일이 얼마나 무료하고, 고되고, 다리 저린 일인지를.


현재에 깨어있지 못한 나를 탓하다가 만난 책은 틱낫한 스님의 <삶에서 깨어나기>였다. 책에서 스님은 눈이 번쩍 뜨이는 명상 비법을 소개했다. 설거지를 하라는 거였다. 대신 명심해야 할 것이 있었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는 설거지만 해야 한다는 것. 자신이 설거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깨닫고 모든 신경을 설거지 그 자체에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쉬운 듯했지만 쉽지 않아, 나는 설거지 명상법에도 실패했다. 그렇게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연필 깎기의 장인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 깎기의 정석>을 읽으며 나는 설거지를 생각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필 깎기에만 온신경을 기울이라는 말 아닌가. 그가 내 귓가에 대고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연필을 깎는 동안에는 연필만 깎아야 한다.'

연필을 깎는 데 이런 준비물이 필요했다니

요즘에도 연필을 쓰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매일 쓴다. 매일 들고 다니기도 한다. 책을 읽다가 밑줄을 긋거나, 표시를 하기 위해서다. 연필로 글을 쓰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심이 빨리 닳지 않아 사실 연필을 깎은 적은 별로 없다. 두 달에 한번 꼴로 연필을 깎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연필 깎기의 오묘하고 숭고한 세계란. 연필 깎기 장인의 그 섬세함과 그 자부심이란. 창의성과 용기는 어떻고…. 저자인 데이비드 리스는 무엇보다 기본을 중시했다. 연필을 깎으려면 준비물을 꼭 챙겨야 한다.


연필을 깎을 때 필요한 준비물들은 다음과 같다. 연필, 작업용 앞치마(앞치마를 두른 남자는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법), 주머니칼, 족집게(연필밥 채취를 위해), 연필밥을 담을 비닐 봉투, 다양한 종류의 연필깎이, 사포(연필끝의 뾰족함을 위해), 줄, 비닐 튜브, 5달러 지폐와 잔돈(샌드위치를 사먹기 위해), 머리띠형 확대경("연필 깎기는 장시간에 걸친 정밀 작업을 요하기 때문에 눈에 무리를 줄 수 있다"는 설명), 칫솔, 이쑤시개, 손수건, 방진 마스크(표정을 감추기 위해) 등이다.

준비물을 갖췄다면 연필을 깎으면 된다. 깎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에서 내 호기심을 가장 끈 방법은 (역시 나도 따라 해야 할 것이기에 꼭 알아둘 필요가 있었던) 칼로 연필을 깎는 방법이었다.


저자 데이비드는 초보자가 연필을 깎을 때는 무리하게 완벽성을 추구하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처음부터 대박을 노리려는 마음을 거두라는 게다.

"절대적 완벽함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건 좋지만, 아무리 노련한 연필 깎기 전문가라도 그게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연필 깎기는 냉엄한 현실을 마주해야 하는 일이며, 세상만사가 그렇듯 돌발 사태와 재난을 피하기 어렵다."(본문 중에서)

그의 충고를 들으며 나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완벽을 추구해야 하지만, 또 완벽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는 대상이 어디 연필깎기뿐일까.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하든 '빡세면서도 빡세지 않은 듯'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하지 않나. 완벽을 요구하지만, 여유 또한 바라는 이 냉엄한 세상. 현실은 그의 말처럼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세심한 충고는 계속 이어진다.

푹 파인 흑연... 그 좌절감

 <연필 깎기의 정석>의 저자 데이비드 리스가 출연한 동영상 중 한 장면

<연필 깎기의 정석>의 저자 데이비드 리스가 출연한 동영상 중 한 장면 ⓒ Pricefilms


"주머니칼로 연필을 깎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한 가지 위험은, 칼이 연필축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서 흑연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은 아직 심이 나오려면 멀었는데 흑연을 푹 파버렸을 때의 좌절감을 이내 맛보게 될 거다.

그렇게 움푹 팬 자리는 연필심을 약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빛을 받을 때마다 보란 듯이 번뜩이면서 커다란 상심을 안겨준다. 이를테면 골프 잔디가 뜯겨나간 디벗 자국과 같이 마음이 너무 앞섰음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증거인 것이다. 그러니 연필을 너무 공격적으로 파고들려 하지 말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중을 기하는 것이 상책이다."

책을 읽다 말고 나는 진짜로 연필을 깎았다. 예전과는 조금 다른 마음가짐으로 조그마한 휴지통 앞에 쭈그려 앉았다. 연필 깃(나무의 꺾인 부분) 윗단의 위치를 정하고 거기서부터 칼로 슬슬 깎아 내려갔다. 조심했다. 흑연심을 미리부터 건드리지 않기 위해. 날카로운 칼은 깃을 지나 깃 아랫단까지 파고들었다(깃 윗단, 깃, 깃 아랫단은 전문 용어). 곧 심이 나왔고 나는 심을 조심스럽게 터치했다. 두 개의 연필을 심혈을 기울여 깎았다. 하지만 나는 신중하지 못했다.

연필밥을 채취해야 하는 것을 깜빡하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투하했다. 왜 연필밥이 중요하냐고? 저자는 작업이 끝난 뒤 족집게로 연필밥을 채취한다. 그리고 "연필을 깎고 고객에게 연필밥을 돌려주지 않는 사람을 믿지 말라, 연필밥은 엄연한 연필의 일부이며 궁극적으로 고객의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또 나는 작업용 앞치마도 두르지 않았다. 연필을 깎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도구의 깨끗함이라는데 내 칼은 너무 더러웠다. 하지만 그런대로 연필은 잘 깎은 듯하다. 책에 밑줄을 긋고 표시를 하기에는 모자란 점이 없어 보인다.

연필에 관해 잊고 지낸 지 오래인 사람에게 이 책은 허무맹랑한 농담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무슨 연필 하나 깎는데 이다지도 야단법석이란 말인가. 왜 가발을 쓰고 연필을 깎고, 왜 폭포수 앞에서 그런 짓을 하며, 왜 뒤통수 근처에서 마술쇼를 해야 한단 말인가.

연필 깎기 궁극의 고급 기술은...

 <연필 깎기의 정석>의 저자 데이비드 리스가 출연한 동영상 중 한 장면.

<연필 깎기의 정석>의 저자 데이비드 리스가 출연한 동영상 중 한 장면. ⓒ Pricefilms


나 역시 낄낄대며 책을 읽으면서도 위와 같은 의문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런 독자들의 반응을 예상해서였을까. 저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필 깎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라는 견지 하에 계속 글을 써내려 간다. 상대가 너무 진지하면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진지함에 동화돼 버리는 법. 나는 이제 저자가 연필 깎기 앞에서 가벼워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연필 깎기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다.

저자는 연필 깎기의 장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연필을 깎으며 맞닥뜨리게 될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을 지혜롭게 헤쳐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불안하다고, 두렵다고 멈추지 말고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한다는 거였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다.

연필 깎기 방법 중 가장 고급 기술은 '마음으로 연필 깎기'였다. 마음으로 연필을 깎기 위해선 우리는 먼저 내면을 점검하고 가다듬어야 한다. 마음이 연필에 가 닿지 못하고 딴 곳에 기울어져 있으면 제대로 연필을 깎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외피 속에 동요나 불안을 초래할 수 있는 충동, 기억, 공포, 편견, 나약성 따위가 잠재해 있다면 그 마음은 연필 깎는 도구로 쓸 수 없다."

마음을 한 대상에 집중한 뒤 그것만을 생각하고 주시하는 것. 나는 요가매트 위에서 이것을 하다가 실패했다. 명상가들의 현재에 깨어있으라는 말은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 그것에 나의 모든 정신과 마음을 집중하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매번 과거와 연결 돼 있는 기억·공포·편견에 정신이 홀리기 일쑤였고, 미래와 연결돼 있는 동요·불안·나약성에 마음을 뺏기기 일쑤였다. 현재에 있지 못한 이유였고, 명상을 포기한 이유였으며, 내가 내게 실망한 이유였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는 설거지만 해야 하는 이유는 설거지가 바로 '현재'이기 때문이다. 연필을 깎는 동안에는 연필만 깎아야 하는 이유 역시 연필이 바로 현재이기 때문이다. 연필 깎기 장인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장인이 되려면 현재에 깨어있으라. 그럼 나처럼 누구든 연필 깎기 장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우리는 현재에 깨어있지 못해서 장인이 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HOW TO SHARPEN PENCILS from Pricefilms on Vimeo.
덧붙이는 글 <연필 깎기의 정석> (데이비드 리스 / 프로파간다 / 2013년 7월 12일 / 1만2000원)

연필 깎기의 정석 -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

데이비드 리스 지음, 정은주 옮김,
프로파간다, 2013


#연필깎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