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립장군 묘갈
이상기
왜적은 어땠을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4월 25일 상주에서 이일의 군사를 격파하고 26일 문경에 도착한다. 문경에서 충주까지는 하루면 갈 수 있다. 그러나 문경새재의 복병 가능성 때문에 선봉을 보내 정탐하고, 27일에야 충주를 향해 진군한다. 왜군은 안부역에 도착해 충주의 상황을 파악한 다음, 28일 아침 일찍 단월역을 향해 출발한다. 그리고 탄금대 전투는 이날 정오 이후 벌어진다.
이때 왜군의 병력은 2만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은 고니시가 맡고, 좌익은 마츠우라 시즈노부(松浦鎭信)가, 우익은 소 요시토모(宗義智)가 맡았다. 이때 탄금대는 섬처럼 해자로 둘러싸여 있어 요새이긴 했으나, 앞 들이 논이기 때문에 기병이 싸우기에는 적절치 못했다. 또 진영이 정비된 왜군과 달리, 조선군은 위계와 전략이 부재했다. 탄금대 전투는 전략과 전투에서 실패한 조선군이 지고 말았다.
신립장군묘 위로 현손과 손자의 묘가 있다. 신립장군묘 위에는 현손인 신완(1646-1707)의 묘가 있다. 신완은 1762년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장(文莊)이고, 문집으로<경암집(絅菴集)>이 있다. 둘레석이 있는 묘의 오른쪽에는 묘표가 세워져 있다. 전면의 절반에는 평천군(平川君) 신완과 그의 부인 임천조씨가 왼쪽에 묻혀있다고 쓰고, 그 다음부터 측면과 후면에 걸쳐 음기(陰記)가 새겨져 있다.
신완의 묘 위에는 신완의 할아버지이자 신립의 손자인 신준(1572-1638)의 묘가 있다. 신준은 음사로 관직에 나가 찰방과 현감을 지냈으나,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고 평흥군(平興君)에 봉해졌다. 이후 강화 유수를 거쳐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묘의 오른쪽에는 묘갈이 세워져 있는데, 이를 통해 부인 안동김씨와 합장묘임을 알 수 있다. 다른 묘와 달리 신준의 묘 앞에 장명등이 있다. 이로써 우리 일행은 신립장군 묘역 답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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