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로 출국 당시 오신일씨 여권오신일 씨는 3년 넘게 파독광부 시험을 본 끝에 출국하게 됐다.
고기복
1차 광부 파견 시기(1963~66년)가 지나고, 2차 파견 시기가 시작되면서 독일에서 인력을 빨리 보내달라는 연락이 오니까, 먼저 시험 보고 떨어졌던 사람들 중에 몇 번씩 떨어졌던 사람들을 덤으로 뽑았다는 게 오씨의 설명이다. 첫 시험에선 폐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6개월 넘게 산을 오르내리며 체력을 키웠다. 다행히 두 번째 시험에선 신체검사를 통과했다.
그런데 이번엔 적성검사에서 떨어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주위에선 헛바람이 불었다고 수군덕거리며 무시하기 일쑤였지만 영어와 독일어 공부를 하며 파독광부 공고가 나기만을 기다렸다. 오씨는 운이 좋았다고 했지만, 3년 넘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한 것이 합격이라는 결과를 안겨준 것이었다.
어렵게 합격한 파독 광부들은 3년을 약정하고 출국했다. 그러나 1년도 안 돼서 중도 귀국하거나 제3국으로 떠나는 사람도 많았다. 오씨는 "2년 지날 때쯤에는 대학 나온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은 캐나다로 미국으로 가 버려서 남은 사람이 절반도 안 됐어요."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오씨라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러나 "나만 잘 사면 뭐하냐. 한국 가서 어머니 모시고 살겠다"는 각오로 3년을 꾹 버텼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오씨는 3년 8개월을 하루 평균 16시간씩 석탄을 캤다. 그렇게 3년을 다 채운 사람이 142명 중 고작 7명이었다. 3년 약정 기간이 끝날 즈음, 독일 정부에서 성실근로자들에게 체류 연장 허가를 해줬는데, 오씨는 특별체류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후배들이 다 부러워하는 비자를 받았던 그는 자신이 일하던 막장에서 갱도 쇠기둥인 스템펠 설치작업 중 한국인이 죽는 사고가 발생하자 급하게 귀국을 결정한다.
"3년간 병가 한 번 끊지 않고 개근한 사람이 나를 포함해서 딱 두 사람이었는데, '일하기 싫을 때까지 일해도 좋다'는 노동 허가 비자가 나왔어요. 그때만 해도 4~5년 더 일할 각오였죠. 그런데 1974년 5월에 탄광사고로 한국 사람이 한 명 사망했어요. 가슴이 철렁하는데 나도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더라고요. 다들 말렸지만 간다 했어요."체류기간 연장을 받기 전까지 큰 사고를 경험하지 않았던 오씨는 막장 생활을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가 지하 1천 미터 막장에 내려갈 때면 '글뤽 아우프(Glück auf)'라고 인사했어요. '죽지 말고 살아서 지상에 올라오라'는 뜻이에요. 매일 같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일하면서도 두려움을 몰랐는데 막상 옆에서 사람이 죽고 나니까, 그게 아니더라 말이에요. 그래도 악착같이 번 돈을 모아뒀으니 가도 되겠다 싶었지요."석탄가루 날리는 갱도에서 희미한 헬멧 램프가 가물가물해질 때마다 신을 의지하며 이를 악물었던 그의 귀국은 그렇게 급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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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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