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에 멈춘 꿈의 흔적, 다시 날아오르기를

[떠나는 자와 남는 자②-2] 니시무라 히로코 선생님과의 인터뷰

등록 2015.04.22 19:05수정 2015.04.30 12:07
0
원고료로 응원
1편에 이어(관련 기사 : "일본 배우에게, 한국 배우 훔쳐 공부하라고 했다") 인터뷰가 계속 이어진다. 기자는 니시무라 선생님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고유의 정(情) 문화를 떠올렸다. 니시무라 선생님은 과거 일본에는 그런 것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우리'와 '나'의 차이, 한국과 일본의 차이 


a

연극이 끝난 후 관곽개의 대화 관객과의 대화에서 말씀 하시는 니시무라 히로코 선생님 ⓒ 이형석


- 일본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소설과 연극은 나보다는 우리, 사회 참여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이것은 장단점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 한국의 전통에서 빚어진 차이인데, 나중에 상호보완적인 측면에서 합일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좀 전에 오늘 공연의 마지막 작품인 오사카 극단 '메이'의 <영도(零度)의 손바닥>을 보고 왔습니다. 그 연극이야말로 사연극(私演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국이 없는 재일교포가 조국을 찾아 북한으로 갔는데, 거기도 또한 조국이 아니었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그동안 재일조선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매우 힘들어하고 고통받는 것을 거의 몰랐다가 이 사람들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저도 그랬지만 한국 극단들은 이런 식의 연극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끈끈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 거의 사라져 버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살아 있습니다."

극단 메이의 작품 <영도의 손바닥>은 김철의씨가 극작과 연출을 하고 메이의 배우들이 출연·제작한 연극이다. 리조로 극단원들과 아랑삶세의 김혜령씨가 현장의 진행을 많이 도와주었다. 김철의씨는 총련의 조직 활동은 따로 하지 않고 있다.

- <만주전선> 자막을 보니까 우리라는 한국말의 번역을 '개인 사(私)'자로 했는데 일본에는 우리라는 뜻을 가진, 영어의 'We'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는 건가요?
"와레와레(われわれ[我我·吾吾])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 아(我)를 두 번 쓰는 겁니다."

- 나 아(俄)를 두 번 쓴다는 것은, 나를 강조하기 때문에 우리가 되는 거군요?
"와레와레는 군대, 경찰과 같은 데서 쓰는 용어가 되고 와타시타치라고 할 경우 학교에서 쓰는 우리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와레와레(我々)라는 표현보다는 남자의 경우, 우리를 표현할 때 보쿠타치(僕たち) 또는 오레타치(俺たち)를 주로 쓴다고 한다.

 - 선생님 현대 일본 연극의 담론은 무엇인가요?
"한국과 마찬가지로 없습니다. 과거 1960년대 일본사회를 움직인 담론은 안보투쟁이었습니다. 이후 1980년대까지 저널리즘이 활발해서 호기심을 갖고 자기 눈으로 (담론을) 직접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 후 유명 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좋은 신문사에 입사하면, 점점 그런 정신이 소멸하는 것 같습니다. (일본사회가) 엔터테인먼트에는 큰 관심이 있지만, 그 외에는 이제 흥미를 갖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엔터테인먼트는 한 번에 몇 만 명을 동원할 수 있지만 연극은 50명 또는 100명 정도밖에 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단 한 명에게라도 영향을 줘 인생을 바꾸는 것이 연극입니다. 그래서 전 연극을 믿습니다."

- 그럼 일본 공연문화와 연극이 정체 혹은 쇠퇴하는 건가요?
"전체적으로 보면 쇠퇴에 가깝습니다. 호기심이 점점 사라지는 겁니다. 돌이킬 수가 없는 느낌입니다."

- 정서적 유대관계가 일본 사회에서 사라져가는 것처럼, 모든 인간관계가 철저하게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어 가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교육도 문제입니다. 암기식 교육으로 생각과 비판을 가로막거나 차단하는 교육이 문제입니다."

- 이 부분은 매우 의외입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노벨 과학상을 제일 많이 배출한 나라입니다. 그건 바꿔 말하면 그만큼 창의적인 교육 환경이 갖춰져 있다는 뜻 아닌가요? 이런 건 절대로 암기식 위주의 교육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서양(유럽)은 오페라고, 미국은 뮤지컬인데 한국은 요즘 뮤지컬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웃음) 지금 한국은 뮤지컬이 붐을 이루는 것으로 압니다. 저는 별로 좋게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탐탁치가 않습니다. 삼일로 창고 극장이 창작뮤지컬 <결혼>을 갖고 왔는데 그 작품은 참 재미있었습니다. 오늘 <만주전선>에서 볼 수 있듯 테마가 확실한 이런 연극이 미국이라는 특정 국가가 확산·전파에 앞장서는 뮤지컬에 가려질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건 단지 장르의 활성화 차원이 아닙니다.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 절대 동감입니다. 문화의 다양성은 존중하고 보호해야 하지만 특정 국가가 정점을 차지하는 문화사대주의는 반대합니다.
"부언하면 한국의 배우는 가창력이 뛰어나서 볼만 하지만, 일본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미국을 흉내 내는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 북한 극단도 초청하신 적이 있습니까?
"제 꿈은 재일교포들이 주축인 '아랑삶세나 메이' 또는 '리조로' 같은 극단들이 연극을 잘 만들어서 북한으로 가져가 공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북한 쪽 연극인들은 초청한 적이 없습니다. 실체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랑삶세의 조총련 소속 배우들은 갔다 오기도 하는데, 전 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초청도 받지 못했습니다."

한국과 일본 연극계, 서로 '창조경쟁' 하기를

a

타이니 앨리스 극장 입구 타이니 앨리스 극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 이형석


- 가슴 아픈 일이지만 폐관 이후 별도의 계획은 있으신가요?
"단순히 이런저런 연극을 소개하는 해설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서로 경쟁하면서 만남이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 그 만남은 작품과 작품의 만남인가요? 아니면 작품과 관객의 만남인가요?
"저는 관객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까 <만주전선>을 보고 한 여성 관객이 저한테 와서, 저는 크리스천인데 연극을 다시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좋다고 평가한 연극을 관객들도 좋게 보고 평가해주는구나'하고 느꼈습니다. 극단 반의 박장렬 선생님 연극은, 신주쿠 양산박 출신의 곤도 니키치라는 배우가 세 번씩이나 보고 정말 좋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번 타이니 앨리스 페스티벌을 보고 큰 자극을 받았다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 폐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좋은 작품들을 이전처럼 일본에 소개하는 작업이 이어지기를 바라신다는 말씀이시죠?
"초청을 한다는 게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요되기에, 저는 이제 무리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글(논문)을 쓰는 것에 힘을 기울이려고 합니다. 후배가 맡아서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 그럼 아직 후계자가 없으신 거죠?
"(웃음) 후계자를 물색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런 페스티벌을 외부 도움 없이 개인이 진행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후계자를 결정해도 하라고 말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 대학교수 신분으로 30년 동안 수십 억 원에 달하는 비용을 어떻게 조달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극장 임대료만 15억 원 정도였기에 다른 비용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어갔습니다. (웃음) 물론 제가 다 돈을 낸 것은 아닙니다. 배우들이 열심히 활동해서 힘을 보탠 것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돈을 번 사람은 극장을 소유한 빌딩 주인과 인쇄소 업자입니다. (웃음) 이건 유머입니다."

- 평생을 연극에 몸 바치신 분으로서 지금 시점에서 선생님이 연극을 통해 도달하려고 했던 이상향을 찾으셨는지, 그렇다면 그 이상향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예전에 어느 극단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못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연극의 문 앞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지금까지 연극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 무대에서 공연할 수 없는 혹은 공연하지 못한 일반인의 삶이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연극적일 수 있다는 견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질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웃음) 제가 왜 연극을 시작했냐하면 부모가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연극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동경에 간다는 것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결국 사이가 나빠져 부모님이 돈을 안 부쳐주셨습니다. 그러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겠지 하셨는데, 기대와 달리 전 아주 많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버텼습니다. 일종의 반항심이었죠."

- 개인적으로 한국 연극인들한테 해주시고 싶으신 말씀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없습니다. (웃음) 굳이 한다면, 대극장과 대척점에 있는 소극장 연극이 아니라 새로운 또 하나의 연극이 나올 거라 믿습니다. 그러니 그런 걸 만들어서 서로(한·일 양국이) 경쟁했으면 좋겠습니다. 한마디로, 창조경쟁을 하고 싶습니다!"

예술이 가난을 구할 순 없지만, 위로할 수 있다

a

포즈를 취한 니시무라 히로코 선생님 타이니 앨리스 극장 벽간판 앞에서 ⓒ 이형석


삼일로 창고극장의 대표 공연인 뮤지컬 <결혼>이 첫 해외교류에 나선 건 지난 2013년, 타이니 앨리스 페스티벌에 초청받았을 때였다. 니시무라 히로코 선생님은 2012년 충무아트홀에서 그 작품을 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었다.

"아시아에서 소극장 뮤지컬은 가능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기대 이상이다."

그렇게 해서 삼일로 창고극장과 일본의 타이니 앨리스 사이에 민간 소극장 교류 사업이 물꼬를 트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지금, 삼일로 창고 소극장은 폐관소식을 부고장처럼 세상에 유포했다. 그보다 먼저 타이니 앨리스는 <흑백다방>을 마지막 공연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누구도 2년 전, 꿈의 소멸을 기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일로 창고 극장의 간판에는 "예술이 가난을 구할 순 없지만, 위로할 수는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그런데 타이니 앨리스 극장의 간판에는 어떤 문구가 있었던가? 내가 본 것은 무엇일까?

귀국하는 동안 비행기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보잘 것 없는 이 기록은 한 세대의 종언(終焉)을 알리는 유골이다. 그러나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만연 원년의 풋불>에서 표현한 것처럼, 뜨거운 기대는 아직 남아있다. 그 무덤엔 내가 모르는 세계가 소통하고 있다. 분명 부족함이 없을 터….

이제 크게 배움으로서(大學路) 은혜가 되는(惠化洞) 곳에서, 굶주린 손가락으로 만찬을 차리리라. '타이니 앨리스 인 서울(Tiny Alice in Seoul)' 초대장을 남발하고 싶다. 그 즐거움은 인색하지 않으리라.

소문아, 햇빛에 널어놓을 테니 날아가서 꽃을 피워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후아이엠>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타이니 앨리스 #니시무라 히로코 #만주전선 #박근형 #관객과의 대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하이브-민희진 사태, 결국 '이게' 문제였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