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항 중앙입양원장
김지영
지난 4월 1일 서울 충정로에 있는 중앙입양원을 찾아 신언항(70) 원장을 인터뷰했다. 지난 2013년 1월 초대 중앙입양원장으로 취임하고 한 번의 임기를 마무리한 후 올 3월 다시 재임을 하게 된 신 원장은 보건복지부 차관을 거친 관료 출신이다. 11년 전 삼십 년 공직생활을 마감한 그가 다시 공직으로 돌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신언항 원장 자신이 입양부모이기 때문이다.
신언항 원장이 지금은 열네 살 동영이를 막내아들로 입양한 때는 십 년 전인 2005년이다. 오랫동안 보육원에서 봉사를 해왔던 아내 눈에 밟힌 어린 남자 아이를 함께 봉사활동을 다니며 보아오다 입양을 했다. 당시 스물일곱 스물여덟 장성한 아들이 둘이나 있었지만 육십 목전에 덜컥 입양을 결심할 만큼 동영이에 대한 애착이 컸다. 동영이 나이 네 살이었다.
- 그래도 연장아 입양인데 시설에 봉사하러 오가면서 보는 거하고 실제 집에 와서 살을 부대끼면서 사는 거하고 다르잖아요? 많이 힘드셨을 거 같은데요? "힘들었죠. 시설에 있는 애들은 참 불쌍한 애들이에요.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입양하기 전 우리 집에 5월 5일 날 데려와 가지고 한 이삼 일 있으면서 아파트 놀이터로 가서 미끄럼틀 위에 안아서 세워놨는데 거기서 발을 못 떼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 보육원에도 놀이터가 있을 텐데요?"있죠. 거기서 뛰어 노는 모습을 봤으니까. 그런데 여기에만 딱 갖다 놓으면 발을 못 떼고 로봇처럼 서 있더라고요. 그걸 보고, 아 시설이 그런 곳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시설이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시설과 가정에서의 차이를 말하는 거죠. 공동으로 집단생활을 하는 거하고 저만 사랑해주는 부모하고 사는 거하고의 차이가 그렇게 클 수밖에 없어요."
- 동영이 입양하시고 몇 년 정도 힘드셨어요? "가장 힘들었던 기간은 동영이 오고 한 일 년이었던 것 같아요. 그 뒤로도 계속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아이가 조금씩 좋아졌으니까요."
시설에 찾아가서 만날 때 그렇게 잘 웃고 안기고 달라붙던 동영이가 가족이 돼 집으로 와서는 돌변을 했다. 말을 안 듣고, 표정이 굳어지고, 모르는 단어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말을 안 들어요. 이리 오라고 하면, 들은 척도 안하고. 그러다 목소리가 커지면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요. 증오하는 눈빛인 거야. 일반화 시키면 안 되지만 동영이 키우면서 시설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어요. '아이스찌리니'가 무슨 말인 줄 알아요? 아이스크림을 시설에 있는 아이들은 그렇게 발음을 하더라고요. 왜 아이스크림을 모르겠어요. 저희들끼리의 사회가 있다 보니까 그 안에서만 쓰는 언어가 있는 거예요. 시설에서만 자라면 언어능력이 그래서 떨어지는 것 같았어요. 당연히 학습능력도 떨어질 거고요. 인간이 그 나이에 맞는 발달과정이 있는 건데 어릴 때부터 가정이 아닌 시설 속에서 자라면 전체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모르는 사람들은 시설이나 입양된 아이들에게서 문제를 발견하면 그게 마치 생모가 임신 중에 술 먹고 담배 피고 하는 나쁜 환경 속에서 낳아서 그렇다고 단정을 하죠. 공부 못하면 원래 머리도 나쁘고 불량한 엄마 아빠가 임신해서 낳은 아이라고 낙인을 찍어 버리죠. 근데 당사자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눈치가 뻔한데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인가 이렇게 돼버리는 거죠.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렇게 아이가 태어난 게 아니라 제가 볼 때는 결국 시설의 문제인 거예요. 아이 인생으로 봐서는 정말 너무 억울한 운명인 거죠. 결국은 어른들 문제인데."십 년 입양부모로 살아온 경험이 신언항 원장에게 커다란 성찰의 기회가 되었던 듯싶다. 신 원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이 때 보통 일반가정에서 자란 아이도 자기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고 들었어요. 내가 애착관계를 맺고 있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존재를 확인 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요. 시설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런 욕구가 더 강한 것 같더라고요. 아무래도 그게 부족하니까 더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러다 보니까 어떤 경우는 의도적으로 나쁜 행동을 하는 것 같고요. 입양부모도 사람인 이상은 그런 걸 보고 참아내고 교정시키는 게 상당히 어려운 일인 거죠."- 중앙입양원으로 오게 된 배경은 어떤가요? 죄송한 표현이지만 보통 이런 정부산하기관은 흔히들 낙하산 타고 내려오신 거 아니냐는 의문을 많이 가지거든요? "제가 동영이 입양하고 2년 뒤부터 한국입양홍보회(공개입양가족 자조단체) 이사를 했어요. 2012년까지 했으니까 5년 동안 활동을 했네요. 또 이전 현직에 있을 때도 제가 아동복지 쪽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된 글을 기고도 하고 그랬지요. 아마 그런 활동들이 인연이 되었지 싶습니다."
설립 당시 8명으로 시작된 중앙입양원의 현재 근무인력은 25명이다. 사설입양기관에 의존하던 입양 관련 업무들이 국가에 귀속되었다는 점만으로도 의미를 둘 수는 있지만 한 나라의 입양관련 업무를 전적으로 책임지기에는 작은 규모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 우리나라 최초의 입양관련 정부기관인데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일단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중점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신지?"전 세계적으로 입양인들을 사후관리해주는 이런 기관을 만들어서 운영하는 나라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나라가 과거에 외국으로 입양을 많이 보냈잖아요. 공식적으로는 14만여 명인데 실질적으로 한 20만 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 많이 있었던 일인데 그렇게 고국을 떠난 해외입양인들이 이제는 성장을 해서 고국으로 돌아오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시기가 맞물렸어요. 그래서 그런 입양인들을 위한 사후관리 서비스가 필요한 시점이 된 것 같습니다. 법적으로도 해외입양인 사후관리서비스가 주어져 있죠."
- 국내입양 관련해서 하는 업무도 있으신가요?"있죠. 아이들을 키우는 게 일반 가정에서도 어렵잖아요. 제 경험으로도 입양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라는 단계에 따라 각별히 신경 쓸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장 단계별로 어떻게 아이들을 양육할 것인지 이런 것도 연구할 생각입니다. 아직은 기획단계이긴 한데 그렇게 연구해서 입양부모한테 교육도 지원해 줄 계획을 하고 있지요. 지금은 입양가족들 운영하는 자조단체에서 자체 기획하고 운영하는 행사나 캠프 등에 사업비를 지원하는 형식으로 사후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중앙입양원의 중점 사업은 해외입양인들의 뿌리찾기 사업이다. 2012년 입양특례법 시행 이후의 입양관련 인적 자료는 법원 허가제여서 자동으로 데이터가 중앙입양원으로 모이게 되어 있다. 이전 자료는 국내 입양기관들의 협조를 받아 데이터베이스화를 진행하고 있으며 폐쇄되거나 사라진 입양기관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 중이다.
"입양이라는 단어 보고 저절로 생기는 벽 있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