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 출신 인문사회 저자가 들려주는 '공부법'

나에게 공부란 무엇인가... 호기심이 내 공부를 이끌어 왔다

등록 2015.05.16 15:19수정 2015.05.16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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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 고등어가 다시 살아나 헤엄을 치지 않을까 싶어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집어넣어 본 적이 있는가? 컴퓨터 바이러스라는 것에 걸리면 도대체 컴퓨터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바이러스 걸린 플로피디스크를 손수 실행시켜 봤는가? 나는, 그랬다. '도를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너무 궁금해 그들의 본거지까지 따라가 얼굴 붉히며 논쟁을 하다 집에 우환이 있을 거라는 악담까지 들었다. 그야말로 '호기심' 덩어리가 바로 나다.

적어도 대한민국 제도권 교육에서 '호기심'이란 그렇게 환영받는 놈은 아니었다. 학교라는 곳은 '왜'라는 질문에 답을 주는 곳은 아니었다. 옷장에 양말과 내복 구겨 넣듯, 지식을 두뇌라는 저장창고에 우겨 넣는 곳이 학교 아닌가. '왜' 이 양말을 내 머릿속에 우겨 넣어야 하는지 질문하면 반기는 선생님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내가 우리 반의 학습 진도를 늦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학교란 호기심을 발산하는 곳이 아니라 인내심을 기르는 곳이 됐다. '학업 성적은 우수하나 주의가 산만하고 학습태도가 불량하다'라는 문구는 호기심을 인내하기 시작하자 서서히 생활기록부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 버릇 개 주겠는가? 학교에서 인내한 호기심은 학교 밖에서 분출됐다. 소싯적 교회를 다녔는데, 교회에서 가르쳐 주는 내용 하나하나가 내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예수가 지구에 태어나기 전에 죽었던 사람들은 몽땅 지옥에 가야 하는가? 교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지옥 간다고 했다.

호기심을 못 이기고 이 엄중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성경을 뒤지던 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그래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육체로는 인간이 받는 심판을 받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을 따라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베드로전서 4장 6절) 유레카를 외치며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죽은 사람도 구원 받을 기회가 있는 것 아니냐고 질문했더니, 당황하며 제대로 답을 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이 구절이 맞으면 육신이 죽은 이후에도 영적으로 구원을 받을 기회가 있다는 얘기인데, 기독교 입장에서는 포교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겠는가. 꼭 지금 믿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니.

성장하면서 머리가 커지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조금씩 눈을 뜨며 사회의 빈부격차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빈부격차가 심할까? 게으른 사람만 가난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가난한 사람이 많은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부자는 천국에 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성경에 나오는 데도, 왜 교회에서는 헌금 많이 내라고 하고 그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부자가 되려고 안달일까?

그러다가 대학에서 우연히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게 됐다. 학생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딱히 무언가 사명감을 가지고 읽었던 것도 아니었다. 대학생 쯤 됐으면 그래도 마르크스 <자본론>은 읽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약간의 지적 허영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계기야 어쨌든 결과는 어마어마했다. 내가 항상 궁금해 했던 빈부격차의 근본원인이 아주 과학적으로, 그러니까 사칙연산을 통해 숫자로 증명되어 있는 것 아닌가.


이공계 전공자로서 사회과학은 변수가 너무 많은 인간을 다루기 때문에 사실상 과학일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편견은 마르크스 <자본론> 앞에서 여지없이 깨져나갔다.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모피어스에게 빨간약을 받아먹고 세상의 참모습을 봤을 때의 충격과도 같았다.

태어나서 나의 호기심이 가장 크게 충족된 때가 바로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었을 때였다. 호기심이 충족되는 그 짜릿한 느낌은 내 삶을 뒤흔들었고 결국 나는 전공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문사회 분야의 저자로서 책을 쓰고 강의를 하는 삶을 선택하게 됐다.


마흔이 넘어 중년이 된 지금도 호기심이 내게 내리는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다. 설사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행위가 나에게 풍족한 미래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재미있는 사실은, 결국 호기심이 밥 먹여주더라는 사실이다. 직장 그만두고 저자로 사는 내 삶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나. 끝없이 호기심을 충족시켜나가는 과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내 미래를 이끌어 가고 있다.

모르는 것을 무모하게 계속 읽어 내려가지 않는다

모르는 것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면 결국에는 이해할 수 있고 통달할 수 있다는 얘기를 많이들 한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초등학생이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나오는 중력장 방정식을 아무리 반복해서 읽는다고 이해할 수 없다. 뭔가 조금만 노력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내용이라면 모르겠지만, 전혀 이해할 가능성이 없는 내용을 반복해서 읽는 행위는 그저 한심한 시간낭비다.

내가 공대생으로서 처음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을 때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무작정 활자의 발음만을 따라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었다. 그래서 마르크스 <자본론>과 관련된 각종 해설서들을 구해서 비교 및 대조해 가면서 한 걸음씩 힘겹게 내딛었다. 만약 내가 그런 해설서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자본론>을 이해하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테고 어쩌면 여전히 <자본론>을 읽지 못하고 포기했을지 모른다.

진짜 열풍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위 인문학 열풍이 불면서 인문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심지어는 인문고전을 많이 읽어야 성공할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는 어이없는 책들도 나온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에게 사마천 <사기>, 아담 스미스 <국부론> 등의 고전을 느닷없이 들이밀며 읽으라는 부모들도 있는 것 같다.

내가 장담하는데 그 부모들도 사마천 <사기>와 아담 스미스 <국부론> 안 읽었다. 왜냐면 그것을 제대로 읽어 본 부모라면 애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 것이고, 그런 것을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떠밀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그런 인문고전을 읽게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새로 쓴 책을 권해야 한다.

이것은 성인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다. 철학에 관심이 생겼다고 느닷없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부터 읽기 시작하면 어떡하나. 철학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일 리가 없지 않은가. 자본론에 관심이 생겼다고 앞뒤 재지 않고 30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소화하겠다고 덤비면 10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소화불량에 책을 덮고 만다. 칸트랑 마르크스만 그렇겠나, 사실상 어떤 분야든 파고들자면 만만한 것이 없다. <자본론>에 관심이 생기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같은 책부터 읽어주는 것이 순서다. 누가 쓴 책인지 모르겠지만(?), 참 쉽고 좋은 책이더구먼.

어떤 분야에 관심이 생겼다면, 그 분야에서 잘 알려진 입문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차근차근 발판을 하나씩 놓는다는 느낌으로 단계적으로 읽는 책의 수준을 높여주면 어느덧 고개를 끄덕이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있는 자신의 낯선 모습과 조우하게 된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따위의 책을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이 창피하다고? 솔직히 그런 책을 쓴 사람은 더 창피하다.

강연 가서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라고 소개 받아 본 적 있는가?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럼에도 모욕을 각오하고 책 제목을 지었다. 책을 더 팔겠다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목적도 마르크스 <자본론>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하는 것 아니었나? 그렇다면 지금은 설사 돌아가는 것 같아도, 정말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쉬운 것부터 과정을 밟는 것이 오히려 지름길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따위를 들고 다니는 것보다는 무지(無知)한 쪽이 더 부끄럽지 않은가.

매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계획을 짜자

이런 얘기 하면 망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성적은 항상 최상위권이었지만 공부하는 것은 참 싫었다. 공부가 싫으면 안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쉽게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라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을 함께 공유한 사람이라면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학생으로서 이 사회에서 얼짱 얼굴을 보유하지 않은 상황에서 근사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 그러니까 '오! 대단한 걸' '이야~ 짱인데'라는 반응을 이끌어 내는 방법은 그저 공부 잘 해서 소위 명문대학교 가는 것뿐이었다, 적어도 당시에는 말이다. 얼굴도 그저 그런데 여자한테 잘 보이려면 공부라도 잘 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막상 명문대 가려고 열심히 공부를 해도, 며칠 못 가서 세워놓은 공부 계획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잦았다.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이제 얼굴만으로 인생 승부를 걸어야 하는데, 이게 나에게는 참 불리한 게임이었다.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고 왜 계획을 어기게 되는지 차분히 따져 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당시 일주일이나 한 달 정도의 호흡으로 계획을 짰는데, 아직 6일이나 남았으니, 아직 28일이나 남았으니 라는 한가한 생각에 하루하루 나가야 할 진도를 미루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계획을 하루 단위로 바꿨다. 하늘이 두 쪽 나도 하루 분량은 마치고 잔다는 각오로 매일매일 수행해야 할 계획을 짜고 그때그때 달성 상황을 점검했다. 그랬더니 거짓말 같이 문제집과 참고서를 계획에 맞춰 끝내는 낯선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매일매일 계획을 달성하며 느끼는 성취감과 뿌듯함에 있다. 하루 단위로 성취감을 느끼니 그 성취감을 통해 동기부여가 되고 힘들고 어려운 시간도 이겨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하루단위의 계획을 지키지 못했다면, 이후 스케줄을 다시 작성해서 마음자세를 새로 가다듬었다.

매일매일의 성취감 때문에 공부하기 싫은 마음을 인내하고 성적을 꾸준하게 유지해 목표로 했던 서울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서울대학교에 진학한 이후에 펼쳐진 학교생활과 전공공부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실망했지만, 어쨌든 목표를 이루는 데에는 하루 단위의 계획이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습관은 작가로 살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어서, 단행본 집필에 들어가면 하루 단위로 써야 할 원고의 양을 정하고 어떻게든 꾸역꾸역 채워서 완성한다. 그래서 출판사로부터 이렇게 마감 잘 지키는 작가는 드물다는 상찬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에 '대한민국 경제사'에 관한 책을 쓰면서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슬럼프에 빠져 있다. 계획을 세우고 지키는 데 있어서는 꽤 충실하다고 자부했던 나인데, 최근 강의 일정도 많아 지쳤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동안의 내 삶을 돌아 봤을 때 용납하기 힘든 나태함에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있다. 하루 단위 계획을 뛰어넘는 특효약이 필요한 것 같은데,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헤매고 있다. 이럴 땐 글이 나올 때까지 푹 쉬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하고. 혹시 더 좋은 방법을 아는 분이 있다면 조언 부탁드린다.

암기식 공부는 절대 지양,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 단순암기다. 두뇌에 맥락 없고 이유 없이 단어나 문장을 쑤셔 박느니, 차라리 내 입에 양말을 쑤셔 박아라. 그런데 대부분의 학교 공부가 단순암기 위주로 진행됐고, 시험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단순암기력을 묻는 경우가 많았다. 내 공부 방법은 남들이 보기에 좀 미련했던 것 같다. 이차방정식을 풀 때 남들은 그냥 근의 공식을 외워서 거기에 숫자를 대입해 풀었다면, 나는 어떻게 근의 공식이 유도되는지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기어이 내 손으로 ax2+bx+c=0의 해를 구하는 과정을 직접 유도하고, 그 과정을 통해 이 식을 왜 외워야하는지를 나의 두뇌에게 납득시킨 후에 암기했다.

내가 수학과 물리를 그나마 다른 과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아했던 이유는 무턱대고 외우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공식이나 법칙들이 나름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과관계의 맥락이 있었다. 그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과정과 맥락을 이해하게 되면, 설사 공식을 잊어버리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져도 약간의 시간 여유만 있다면 공식을 차분하게 유도해서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이렇게 최대한 내 머리로 모든 과정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수학 정석 문제집 뒤쪽의 정답 풀이과정을 들춰볼 때는 패배자의 쓰라림이 느껴질 정도로 진지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두뇌의 근력인 '사고력'과 '문제해결능력'이 비약적으로 개발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부한 얘기이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 물고기를 잡아 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스스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가 있다.

인생이란 워낙에 버라이어티해서 과연 내 인생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싶은 일이 천연덕스럽게 오늘 저녁에 일어나기도 한다. 그럴 때 주어진 상황을 잘 극복하고 오히려 기회로 삼을 수 있는 힘은 결국 내 두뇌의 '문제해결능력'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무엇이든 그냥 단순히 머릿속에 양말처럼 구겨넣기 전에, 딱 한 번이라도 더 '왜'라는 질문을 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겠다. 그래서 남의 얘기를 자기 얘기인 것처럼 반복하지 말고, 설사 그것이 정답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뇌 근력으로 빚어낸 얘기를 토해내라고 말하고 싶다.

모두가 알다시피 삶이란 만만치 않다. 이두박근의 근력도 중요하지만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두뇌의 근력인 '사고력'과 '문제해결능력'이 중요하다. 평상시에 쉽고 편한 길만 추구해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공부법 #스터디 #학습 #인문학 #학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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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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