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살 김 과장, 그가 매일 노숙하는 이유

[하이디스 릴레이 기고②] 쌍용차-하이디스 해고노동자의 만남

등록 2015.07.05 15:18수정 2015.07.05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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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하이디스는 광시야각기술(FFS) 원천기술을 보유한 TFT-LCD(초박막 액정표시장치) 제조업체다. 현대전자에서 출발한 이 회사는 LCD(액정화면)의 역사와 함께 성장했지만 현대전자의 부도 그리고 분할매각으로 2002년 중국기업 '비오이(BOE)'로 넘어갔고, 2007년부터 지금까지 대만 '이잉크(EINK)'가 대주주로 있다.

대부분의 외국투자기업이 그렇듯 중국 비오이는 기술개발이나 설비투자는 하지 않다가, 인수한 지 4년 만에 철수를 선언하며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2008년 검찰 수사 결과 중국 비오이가 4331건의 하이디스 기술자료를 유출한 것이 확인됐다. 이른바 '먹튀'였다.

2007년부터 하이디스를 경영한 대만 이잉크도 다르지 않았다. 연구개발, 설비투자는 하지 않고 특허기술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로열티를 받아서 이익을 취했고, 2014년 1000억 원 가까이 영업이익이 발생했다. 하지만 대만 이잉크는 2015년 3월, 돌연 이천공장을 폐쇄하고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이 시작된 지 얼마 후, 노동자 한 명이 5월 11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은 5월 27일부터 대만영사관이 있는 동화면세점 앞에서 정리해고 문제해결을 위한 노숙농성을 30일 넘게 이어가고 있다.

"다시 공장을 살려내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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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스 공장 앞, 몸조끼의 행렬 ⓒ 하이디스지회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노숙농성 한 지 30일 되기 하루 전 날, 수줍은 표정의 그를 만났다. 노숙농성하면 대부분 꼬질꼬질한데 그의 얼굴은 노숙농성은커녕 어디 출근하다 나온 사람처럼 얼굴이 환했다. 그와 인사를 나누기 위해 이름을 묻는데 대답 대신 깨끗한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하이디스 테크놀로지 기술팀 김○○ 과장', 노동조합 직책이 적힌 명함만 받다가 회사 과장님 명함을 받으니 생경했다. 현장에서 근무하지만 사무직 업무를 담당해서 회사가 과장 직함으로 명함을 만들어 줬다고 했다. 주머니에 넣으려고 하니 마지막 남은 명함이라 간직하고 싶다고, 조용한 목소리로 다시 돌려달라 이야기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하이디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에 1990년 8월, 입사했다. 그리고 25년 후 2015년 3월, 정리해고를 당했다. 두 명의 자녀를 둔, 나이 43살의 가장이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이 어떤 건지 지난 7년 동안 지켜보고, 겪어봤던 나로서는 한숨부터 나왔다.

"원래 노동조합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입사했을 때만 해도 한국노총 사업장이었는데 생산직 사원이 1700명이 넘었어요. 근데 노동조합 간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보다 승진만 빨리 했거든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편에 서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편만 들고. 그러다 2008년에 갑자기 회사가 어렵다며 구조조정을 하고 나서야 회사 편만 드는 한국노총에서 맞서 싸울 수 있는 민주노총으로 바꿀 수 있게 된 것이죠."

경영상의 위기가 원인이라면서 경영진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노동자들만 쫓겨나야 하는 구조조정이 하이디스 노동자들에게도 몇 번이나 이어졌다. 2006년 중국 비오이가 부도를 내고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회사에 전망이 없다며 600여 명의 노동자가 제 발로 공장 밖으로 나갔다. 2008년 구조조정을 통해 다시 600여 명이 희망퇴직으로 공장 밖으로 내쫓겼다.

1700여 명이나 되던 노동자들은 377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렇게 어렵다던 공장에선 잔업 특근이 이어졌고, 일할 사람이 없어 공장 밖으로 내쫓긴 동료들 중에서 다시 비정규직으로 재입사해서 일하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라인이 돌아가면 조립하는 과정에서 불량이 나올 수도 있고, 자동화 된 설비가 고장 나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 일을 예방하고 수리하는 업무를 담당했어요. 근데 다른 관리자들은 무기력하다고 할까, 자신이 꼭 해야만 하는 업무만 했어요. 그래서 제가 매뉴얼을 하나하나 만들고, 고치고, 적용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불량률을 낮출 수 있었어요. 새벽까지 일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너무 바빠서 아이들하고 잘 지내지도 못했고요. 하지만 그렇게 일하면 회사를 살릴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는 2008년 구조조정 이후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 불량을 줄이고 제품품질만 좋아지면 회사가 다시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전망이 없다며 공장 밖으로 나간 동료든, 희망퇴직금을 받고 공장 밖으로 쫓겨나간 동료든,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대부분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고, 구한다고 하더라도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하는 일자리뿐이었다.

떠나간 동료들과 가끔 술잔을 기울이며 듣는 이야기도, 회사 말만 듣고 공장 밖으로 나간 것이 후회된다는 이야기뿐이었다. 나라도 열심히 일하자. 다시 공장을 살려내자. 그래서 누구도 쫓겨나지 말자. 그런 마음으로 그는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서 했다고 한다.

그러나 2015년 3월, 대만 이잉크는 더 이상 공장을 운영할 수 없다며 공장폐쇄를 선언했고 노동자들에게 희망퇴직을 강요했고,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그 결과 377명 노동자 중 269명이 희망퇴직으로 공장 밖으로 쫓겨났고, 108명만이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그 108명 중에 그와 그의 아내도 포함되어 있다. 그의 부인도 하이디스 해고자다.

"아내가 야무지게 보였어요. 저 여자랑 살면 재정문제는 걱정하지 않겠구나 그랬어요. 제 기준에서는 그게 좋아보였어요. 물론 예쁘기도 했지만요. 아내는 지금 하이디스 이천공장에서 노동조합 재정업무를 담당하고 있어요."

그는 아직 부모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자신과 부인의 해고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걱정할 것이 뻔하고 다시 공장에서 일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속일 수 없다. 아이들은 그냥 모르는 체 할 뿐이다.

조합원들 하나하나가 주인공으로 남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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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스 광화문 문화제 현장 ⓒ 하이디스지회


쌍용차 해고자 아이들 가운데 아빠의 정리해고를 깨닫지 못하는 아이는 적었다. 그 혹은 그의 동료들이 가족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 했으면 좋겠다. 부당한 해고에 맞서 싸우는 일이 부끄럽지 않은 일이고,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가족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결국 지지받는 일이라는 것도 이야기 하고 싶다. 또한 가족들의 지지가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그에게 물었다. 왜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냐고.

"내가 온전히 이해받고 평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에요. 전 하이디스에서 25년 동안 일했어요. 하이디스의 LCD개발의 역사는 저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회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나 제품들도 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준비 되어 있어요. 회사만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가족이라고 부르던 회사는 노동자들을 버렸지만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공장을 버리지 못했다. 그도 다시 공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해고된 지 3개월이 지나가지만 회사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침착하게 설명하던 그는, 여전히 하이디스 기술팀 '김 과장'이었다.

정리해고를 철회하라던 그의 동료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살아남은 동료들은 마냥 울 수가 없었다. 고인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이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동화면세점 앞에서 노숙 농성하는 하이디스 해고자들은 질기게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서 매일 스스로 문화제를 준비한다.

그에게 물어보니 제일 힘든 일이 문화제를 준비하는 일이었고, 제일 좋은 일이 문화제가 잘 끝나는 것이라고 힘주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그도 그의 동료들과 함께 문화제 준비를 했다. <처음처럼>이라는 노래를 합창했는데, 노래는 훌륭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과 마음은 훌륭했다. 그들 하나하나의 눈빛이 이 정리해고 싸움의 진짜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삶과 동일시하는 공장 안에서의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한 그들이 이 정리해고 싸움을 '그땐 그랬지'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까닭 없이 눈시울이 붉어지고, 활짝 웃으며 기억하길 기대한다.

다만 이 싸움이 끝나고 다시 일하게 되었을 때 조합원들 스스로가 회사가 아닌 노동조합을 지키는 하나하나의 주인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진짜 싸움에서 이기는 길이라고, '김 과장들'의 노래 <처음처럼>을 들으면서 난 생각했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고동민님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입니다.
#하이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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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복직자. 현재 쌍용차지부 조합원. 훌륭한 옆지기와 살고 있는 세아이의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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