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도 둘째도 아토피, 죄인 같았던 나를 구한 건...

[그림책 육아일기②]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반이나 차 있을까, 반밖에 없을까>

등록 2015.07.19 21:11수정 2015.09.1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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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 보면 아이보다 내가 더 빠져들 때가 있다. 폴란드 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가 그린 <반이나 차 있을까, 반밖에 없을까>는 아이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 그림책이다. 바로 이 그림책이 최근 첫째에 이어 둘째까지 아토피 판정을 받아 힘들었던 나에게 엄청난 힘을 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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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피로 고생중인 첫째와 둘째 ⓒ 송은미


첫째가 어렸을 때 아토피 판정을 받았지만, 많이 좋아져서 아토피가 있었다는 사실도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근래에 첫째가 밤마다 가렵다고 몸을 긁어대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다시 병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께서 첫째보다 내가 안고 있던 둘째가 더 심각하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태열이 좀 오래간다 생각했는데, 둘째도 아토피라니…. 눈앞이 캄캄했다.

이제 백일을 앞둔 둘째는 모유만 먹고 있었기에, 수유부인 나부터 식단 조절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온·습도 조절과 보습만으로는 나아지지 않던 둘째의 피부가 놀랄 만큼 깨끗해졌다. 엄마가 식단조절만 잘하면 그래도 좋아지겠구나 생각해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울긋불긋한 둘째 얼굴만 보면 식욕이 '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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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구식품 유발 검사 식단조절표 오른쪽의 대체식품이 엄마에게 허락된 기본 식단이다. ⓒ 송은미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엄마가 먹는 음식과 아기의 피부 반응을 통해 식품 알레르기를 알아보는 '경구 식품 유발 검사'를 하자 상황은 더 나빠졌다. 이 검사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지 않을 만한 기본 식단을 유지하되, 알레르기 유발 가능성이 큰 음식 하나를 선정해 충분히 먹은 후 아이의 피부 변화를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두부, 돼지고기, 멸치와 고등어 같은 등푸른생선까지, 하는 족족 양성 반응이 나왔다. 알레르기 테스트를 하면서 열심히 구워 먹었던 돼지고기가 수유 중 마지막 돼지고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다.


첫째는 토마토와 달걀흰자에만 양성 반응이었는데, 둘째는 검사를 하는 족족 양성 반응이 나왔다. 속이 타들어 갔다. 음식 테스트만 하면 빨갛게 달아오르고 심하면 진물까지 생기는 둘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착잡했다. 식단 조절을 하면서 먹을거리도 별로 없거니와, 확실한 반응을 보겠답시고 테스트하는 식품만 미련스럽게 꾸역꾸역 먹다 보니 식사시간만 되면 우울해졌다.

그 와중에 나는 남편과 첫째를 위해 내가 먹지도 못할 음식들을 요리해야만 했다. 간도 못 보며 음식을 만드는 것도 힘들었지만, 식사 시간마다 나는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을 보는 일이 더 힘들었다. 나도 한입만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가도, 울긋불긋한 둘째 얼굴만 보면 식욕이 뚝 떨어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식단조절을 하면서 식품 섭취를 제한하고, 밤중 수유하는 둘째와 밤마다 가려워 깨는 첫째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우울함은 더 심해졌다. 밤마다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 오대수로 빙의해, '도대체 내가 임신 기간 중 무엇을 잘못했던 걸까'를 되새기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입덧이 심할 때 그나마 입에 들어가던 맵고 짠 음식을 너무 사 먹어서 그런 걸까? 평소에는 먹지도 않던 햄버거를 여러 번 사 먹어서일까? 아토피를 다룬 책에서 아빠보다 엄마의 유전 영향을 조금 더 받는다는 글만 읽어도 눈물이 나왔다. 그저 내가 죄인 같았고, 앞으로 이 식품 알레르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지 생각하면 너무나 막막했다.

그때 상처받은 나를 위로해준 책이 바로 이 그림책이다. 이 그림책은 내가 첫째의 가려움증과 둘째의 벌건 얼굴에만 신경 쓰느라 놓쳐버린 일상의 소중함을 보도록 시선을 바꿔줬다.

'긍정의 언어'에 집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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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나 차 있을까 반밖에 없을까> 겉표지 ⓒ 논장


아토피가 정말 심한 사람이 보면 우리 아이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아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음식 알레르기가 없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반면, 자녀를 원하지만 임신이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이가 아토피가 있어 걱정이라는 내 말도 사치처럼 들릴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좋을 수도 없고, 절대적인 것도 없으며 그렇게 서로의 처지와 입장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는 아이들의 아토피가 최대의 시련으로 느껴지지만, 난치병에 걸린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것이다. 그래서 처음 이 그림책을 볼 때만 해도 나보다 못한 상황을 상상하며 위안을 얻는 얄팍한 수를 부리곤 했다.

하지만 내 상황을 자꾸 타인과 비교하니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한창 식이 제한 중일 때는 SNS에 누가 맛있는 음식 사진을 올린 것만 봐도 짜증이 났다. 그러다가도 '쌀에도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아이도 있다는데, 우리 아이는 이만하면 괜찮지' 하면서 나를 다독이기도 했다. 내 상황은 변한 것이 없는데, 남들과의 비교에 따라 기분이 좋아졌다가 우울해졌다가를 무한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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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나 차 있을까 반밖에 없을까> 그림책의 한 장면 어떤 사람에게는 끝인 시간이 어떤 사람에게는 시작이다. ⓒ 논장


그러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첫째와 찬찬히 이 그림책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 책에 나온 대비되는 반대말을 넘어, 긍정적인 언어들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나보다 못하거나 잘난 상황과 비교하기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직면하게 됐다. 남들과 굳이 비교하지 않고도 그냥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된 것이다.

아토피 때문에 당장 생활은 불편하지만 그래도 빨리 알고 대처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아이들이 잘 때는 힘들어하지만 그래도 낮에는 밥도 잘 먹고 신나게 놀 수 있으니 감사하다고 긍정하게 됐다. 반밖에 없다고 불평했던 컵 안의 물이 반이나 있다고 대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가려워할 때 과몰입해서 염려하기보다는 아이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됐다. 더불어 하루하루 예쁘게 자라나는 아이들과 부대끼며 사는 일상의 소중함도 다시 찾게 됐다.

세상의 끝 그리고 세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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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나 차 있을까 반밖에 없을까> 그림책의 한 장면 어떤 사람에게는 높고, 어떤 사람에게는 낮다. ⓒ 논장


"하늘과 물이 만나는 그 경계선이 물고기에게는 세상의 끝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새에게는 세상의 시작일 거예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그림책 뒤에 실린 작가의 말을 읽으면, 이 그림책의 면지(책의 앞뒤 표지의 바로 안쪽에 있는 종이, 표지와 속지를 이어주는 장)가 더 잘 이해된다. 아토피는 불치병은 아니지만, 만성질환이다. 기나긴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됐다. 꾸준한 치료와 관리를 통해 아이가 지금보다 더 좋아지고 결국에는 아토피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토피와의 기나긴 전쟁을 결국에는 끝냈다는 다른 사람들의 성공담처럼, 나와 아이들 역시 긍정의 힘으로 아토피를 이겨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나처럼 자녀가 아토피여서 마음이 힘든 부모들이 이 그림책을 보면서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

[그림책 육아일기-1] 아이 둘 키우며 나도 다시 아이가 된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덧붙이는 글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아이보다 더 그림책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책을 보면서 느낀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 기사에 소개된 그림책: <반이나 차 있을까 반밖에 없을까> /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지음 / 논장 펴냄
#그림책 #그림책 육아일기 #반이나 차 있을까 반밖에 없을까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아토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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