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강조하고 싶은 '제주도에서'

[30일, 제주를 달리다 ③] 그 둘째 날

등록 2015.07.14 14:51수정 2015.07.2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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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보이는 한라 체육관 주위를 계속~뛰었다. ⓒ 황보름


아침 7시에 맞춰놓은 알람이 울린다.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게 얼른 알람을 끄고 화장실로 들어가 러닝복으로 갈아입었다.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에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른 후 1층으로 내려가니 벌써 아침을 먹고 있는 대만 가족이 보인다. 그들을 뒤로 하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서자 발끝에 제주의 아침이 걸렸다. 하늘색만큼 맑은 느낌이 발끝에 전해져온다. 기분이 좋다. 나는 이미 위치를 알아두었던 한라 체육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분은 하늘색만큼 좋은데, 몸은 영 찌뿌둥하다. 눈도 건조하고, 머리도 띵하다. 사실, 기운이 너무 없다. 이래서야 어디 제대로 뛸 수나 있을까. 잠을 자지 못한 여파가 온몸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다. '아우, 어머니!'


어젯밤 나는 우리 방 룸메이트들을 다 만날 수 있었다. 중국인 어머니와 딸, 한국말을 잘하는 대만인 소녀, 그리고 서울과 대전에서 왔다는 한국인 두 명. 우리는 잠을 자기 전까지 각자 조용히 자신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까 모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는 소리. 그러다 11시가 되자 한 명, 두 명 스마트 폰을 손에서 내려 놓고 침대에 눕기 시작한다. 나도 누웠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누군가가 방에 불을 껐다.

불은 꺼졌지만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고작 눈인사 한 번, 주고받은 말 몇 마디뿐인 사람들과 이렇게 작은 방에 누워 함께 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이 자꾸만 곱씹어졌다. 이 얼마나 생소한 상황인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타생지연(他生之緣). 불교에서는 이렇듯 옷깃을 스치는 등의 사소한 일도 전생의 깊은 인연에서 비롯됐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어디선가 주워 들은 이 불교식 인연에 대해 이 참에 한 번 깊이 생각해볼까, 아니면 그냥 잠을 잘까 고민을 하다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중국인 어머니를 봤다.

중국인 어머니도 나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잠을 자기에 가장 좋은 자세를 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문득 어머니와 내가 얼마나 가까이 누워 있는지를 알고는 깜짝 놀랐다. 만약 둘이 팔을 쭉 뻗는다면 손을 꼭 잡고 잠을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가까이 있었기에 어머니의 움직임은 내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아니,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움직이고 있었고 그 움직임들은 자신을 포함한 여섯 명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움직일 때 이렇게 큰 소리가 나는 줄은 정말로 몰랐다. 한 번의 움직임이 거대한 소음을 낳고 있었다.

'움직이지 말자.' 속으로 이렇게 주문을 외웠지만 움직이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움직이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하지만 결국엔 계속 움직이면서 생각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이 거대한 소음을 주고받고 있는 우리들의 인연은 도대체 몇 겁의 인연에 해당할까.


아무리 가슴 떨리는 인연을 만났다 해도 곧 그 인연에도 익숙해지기 마련이지 않나. 소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 오늘 밤 자기는 영 틀린 것 같았지만 나는 곧 그 소리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한 두 사람씩 잠이 들자 소리 또한 잠이 들기도 했다.

이제는 내가 잠이 들 차례였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스르르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나는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내가 한 발 늦었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먼저 잠에 들고 말았다는 사실을. 그런데 그만 어머니는 코를 고는 어머니였다. 그래서 어젯밤엔 잠을 거의 못 잤다. 잠을 못 잔 만큼 몸이 무겁다. 그래도 오늘은 어떻게든 뛰어야 한다. 첫날부터 핑계를 댈 순 없으니까.

나는 올해 4월 21일에 처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총 4.91키로를 달리는 데 42분 21초가 소요 됐다. 42분 21초 내내 달렸던 건 아니다. 러닝 앱의 지시에 따라 1분은 걷고 1분은 달리는 식으로 달렸다. 그렇게 제주도에 오기 전까지 열 번을 달렸다.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겨우 열 번을 달렸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처음 달리기를 시작하는 사람은 원래 매일 못 달린다. 달려보면 안다. 첫날 저렇게 달리고 나서 나는 며칠 동안 거의 앓아 눕기 직전까지 갔다.

그래서 제주도에 오기 전 내 목표는 하나였다. 다른 건 바라지 말고 그저 달리기에 적합한 몸 상태만이라도 되자. 그러니까 달렸다고 해서 근육통이 생기지 않는, 몸이 이미 달리기를 받아들인 상태까지 몸을 만들기로 했다. 몸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무리하지 않으면서 꾸준히 달리기만 하면 됐으니까. 그러니까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열 번 정도 뛰면 됐던 셈이다.

나는 어쩌다 달리게 됐을까를 생각하면 이 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이 책을 읽고부터 나는 나도 달릴 수 있겠다, 나도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다. 달리는 사람에 대한 동경도 이때쯤 싹 텄다.

학창 시절 400미터 달리기를 할 때도 나는 얼마나 쩔쩔 맺던가. 그런데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10킬로미터를, 20킬로미터를, 42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대단하지 않나! 그러다 올해 4월 나는 나도 그 대단한 일을 한 번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다면 나도 한 번 달려볼까?'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도 한 번 달려볼까?

올해 4월 나는 좀 복잡한 심정이었다. 지난 2년간 나는 아무도 시키지 않는 일을 혼자 하고 있었다. 방에 쿵 박혀(매일 박혀 있던 건 아니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었다. 그 전엔 물론 일을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들어간 대기업에선 휴대폰을 만들며 7년을 일했고, 그 뒤로도 몇 가지 다른 일을 했다. 그리고 2년 전부터 나는 처음으로 내가 원하던 삶을 살아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 말이다.

그런데 나는 혼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의미를 알고는 있었을까. 이게 얼마나 껌을 씹듯 고독을 씹어야 하는 일인지, 이게 얼마나 더딘 진행을 자랑하는 일인지, 이게 얼마나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 막상 대답할 말이 없게 만드는 일인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정작 나는 나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는 아이러니. 아무것도 아닌 나에 대한 초조함, 불안함, 두려움이 자꾸만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결국 알았다. 더디더라도, 결과가 신통치 않을지라도, 초조하고 불안하고 두렵더라도, 내가 선택한 이 일, 내가 원하던 삶을 내 스스로 축복하며 계속 이끌고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달려보기로 했다. 달리면서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나약한 생각들, 어리석은 편견들을 다 날려보낼 수 있기를 바랐다.

오늘의 목표는 5킬로미터였다. 5킬로미터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리는 것. 지금까지는 3킬로미터가 쉬지 않고 달린 최고 거리였다. 생각해보니 3킬로미터를 뛸 때도 정말 죽을 것 같지 않았나. 그런데 5킬로미터라니. 5킬로미터를 뛸 생각을 하니 갑자기 겁이 덜컥 난다. 중국인 어머니가 더 원망스러워 진다. 내가 오늘 5킬로미터를 완주하지 못한다면 다 어머니 때문으로 칠 거다!

'아우, 어머니!'. 2킬로미터를 넘어서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3킬로미터가 되자 힘들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고, 4킬로미터가 됐을 땐 잠깐 멈춰 서서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 내게 묻고 또 물었다. 쉬면 안 될까, 쉬면 안 될까, 쉬면 안 될까, 머릿속 돌림 노래가 절정에 달했을 즈음에 러닝 앱에서 5킬로미터를 완료했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0.1초도 안 돼 딱 멈춰 섰다. 그 자리에 서서 스트레칭을 하고 다리를 풀었다. 발목도 돌돌 돌리고, 목도 앞뒤좌우 늘려줬다. 나는 오늘 해냈다. 해냈으니 빨리 가서 아침을 먹자.

시뻘게진 흉한 얼굴로 방에 들어서니 서울과 대전에서 온 한국인 두 명이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아참, 들어올 때 보니 중국인 어머니는 아침을 먹고 있었다). 내 얼굴을 보더니 흠칫 놀란 대전에서 온 그녀가 묻는다.

"운동하시는 분이세요?"
"아니에요. 그냥, 아침 조깅 하고 온 거에요."

나는 대답을 한 뒤 신속히 샤워장으로 들어가 뻘게진 얼굴에 찬물을 연신 뿌려줬다. 땀이 넘쳐 흘렀던 몸에 시원한 물이 닿으니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아, 밥이 정말 맛있을 것 같았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한국인 두 명은 아직 이야기 중이었다. 머리를 말리려 헤어 드라이기를 꺼내자 서울에서 온 그녀가 내 눈을 보며 말한다.

"오늘 저녁 어떻게 드실 거에요?"

나는 얼른 대답했다.
"같이 먹을까요?"

그녀도 얼른 대답했다.
"흑돼지 어때요?"

나도 또 얼른 대답했다.
"저녁 6시에 여기서 만날까요?"

오늘 저녁 어떻게 드실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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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재 해수욕장에서, 해 뜨는 모습 ⓒ 황보름


우리 셋은 저녁에 다시 뭉치자는 약속을 나누고 각자 흩어졌다. 서울에서 온 그녀는 스쿠터를 타고 떠났고, 대전에서 온 그녀는 버스를 타고 떠났으며, 나는 아침을 먹으러 떠났다.

사실 대전에서 온 그녀를 따라 바다를 갈까도 했다. 그런데 내겐 굳이 버스를 타고 멀리 나가 바다를 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난 이번 게스트하우스를 제외하고는 내내 바닷가 근처의 게스트하우스에 묵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할 수 있을 걸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제주 시내 구경. 마침 노트북도 고장 난 상태였고, 운동화도 하나 구입해야 했다. 버스를 타고 서비스 센터에 들러 노트북을 고치고, 마트에 들려 운동화를 사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만약 내일쯤 친구 중 한 명에게서 전화라도 온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어제 뭐했어?"
"어, 노트북 고치고 운동화 샀어. 제.주.도.에.서." (운동화는 결국 못 사고 인터넷 쇼핑을 했다.)

흑돼지가 구워지던 불판 앞에 앉은 우리 셋은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별 얘기를 다 하고 있었다. 대전에서 온 그녀는 미술을 전공했지만 지금은 일반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우리 나라 미술계는 아주 썩어 문드러져 있는 것 같았다.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미술계에서 그녀는 운이 좋게 탈출 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그림 사랑은 여전한 듯 했고, 그렇게 썩어 문드러진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어느 교수이자 화가의 오랜 팬이기도 한 것 같았다.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쁘장했던 그녀는 말도 참 맛깔나게 잘했다. 이런 이들을 만나면 참 편하다. 이야기가 재미있으니 절로 웃음이 나고, 애써 내가 말을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온 그녀는 원래는 물리치료사였는데, 지금은 잠깐 쉬면서 필라테스를 배우고 있단다. 앞으로는 물리치료와 필라테스를 융합해 일을 하고 싶다는데, 그 일을 하기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본인의 살이라고 했다. 살이 찌면서 필라테스 동작이 점점 더 어려워만 지고 있다는 거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너무나 해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반한 나는 흑돼지를 넣은 쌈을 들고 건배 제의를 했고, 우리 셋은 낄낄 거리며 쌈으로 건배를 했다. 건배의 여운은 게스트하우스로도 이어졌다.

오늘은 나 혼자가 아닌, 다른 두 명과 함께 공짜 맥주를 마셨다. 내가 어제 그렇게나 바라던 일이 오늘 이뤄진 것이었다. 여행을 하며 앞으로도 계속 깨닫게 될 것이기도 하지만, 이날도 역시 깨달은 것이 있었다. 함께 즐기고 싶으면, 먼저 말을 걸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을 걸면 되냐고? 이렇게 걸면 된다.

"오늘 저녁 어떻게 드실 거에요?"
덧붙이는 글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도 여행을 연재 기사로 싣고 있습니다.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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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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