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자 성은을 입지 못한다

[당신에게, 실크로드 30] 부하라

등록 2015.07.18 13:35수정 2015.07.18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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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실크로드 30] 어설픈 자 성은을 입지 못한다 ⓒ 정효정


여행을 마친 후 이야기다. 하루는 아빠가 메시지를 보냈다.

"실크로드여행에서 어느 나라 남자가 멋있더냐? 하나 업고 오지. 아빠는 내심 기대를 했는데..."


이모티콘을 버무려 애써 장난인 척 하려는 아빠의 노력이 보인다. 잠시 한숨을 쉬었다. 혼기가 꽉 차다 못해 넘치는 딸을 걱정하는 심정은 이해가 간다. 딸이 중앙아시아 어디에서 납치혼을 당할까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아무 남자라도 납치해오길 바라는 마음.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어쨌든 이 상황에서 기분 나빠하거나 삐치면 내공이 부족한 거다. 나는 여유 있게 여행 중 남자와 찍은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아빠.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의 왕인데, 알림칸이라고... 남편감 어때?"

아빠와의 카톡 이모티콘을 사용해 장난인 척 보낸 메시지이지만, 아빠의 진심이 느껴졌다. ⓒ 정효정


부하라에서 알림 칸의 모형과 찍은 사진이다. 알림칸은 부하라 칸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1920년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에 맞서는 반란군을 조직해 1931년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퇴위 되고 말았다.

그렇게 아빠가 장난인 척하며 떠본 말은 장난으로 맞받아쳤다. 하지만 어쩐지 씁쓸하다. 설사 그가 살아있었고, 내가 그의 후궁 중 하나였더라도 그의 눈에 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분이 알림칸 부하라 칸국의 마지막 왕, 사진은 1911년에 촬영되었다. ⓒ wikipedia


부하라에 있는 시토라이 모히 코사는 알림 칸의 여름 궁전이다. '달과 별의 궁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자이크로 치장된 화려한 내부와 그가 모아온 각국의 귀중한 보물들을 관람할 수 있다. 이 궁전은 당시 러시아 건축가를 초빙하여 지었다고 한다.


궁전의 구석에 가면 작은 연못이 있고 야외 테라스가 있다. 들리기로는 왕의 후궁들이 이 연못에서 수영하고 있으면 테라스에서 지켜보고 있던 왕이 사과를 던졌다고 한다. 그 사과에 맞으면 그날 성은을 입는 거다. 아마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피라니아 떼처럼 미녀들은 서로 사과를 맞기 위해 달려들었을 거다. 나는 운동신경이 둔하니 분명 우물쭈물하다가 밀릴 터였다.

시토라이 모히코사 내부 방 전체가 형형색색 거울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각국에서 받은 선물이 전시되어 있다. ⓒ 정효정


왕의 테라스 알림칸은 이 곳에서 연못의 미녀들을 향해 사과를 던졌다고 한다. ⓒ 정효정


키질쿰 사막을 넘어 400km 떨어진 히바에 가면 이런 하렘의 내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히바 칸국은, 코칸트 칸국, 부하라 칸국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의 3대 칸국 중 하나다. 히바성이라고 불리는 이찬칼라는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성안에는 궁을 비롯해 모스크, 50여 개가 넘는 역사적 건축물, 고택 들이 있다. 그 오래된 집들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세계문화유산에서 살면서 밥 짓고 빨래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큰 재미다.

히바 이찬칼라 내부 사진에 보이는 건 호자 미나레트, 45미터로 히바의 전망대 역할을 했다. ⓒ 정효정


이곳에 타쉬 하울리 궁전이 있다. 왕의 집무실에서 통로를 따라가면 하렘으로 향하는 비밀문이 나온다. 하렘 자체가 높은 담에 둘러싸여 진 하나의 성이다. 내부는 사마르칸트에서 가져온 대리석에 각기 다른 무늬가 새겨진 나무 기둥을 세웠다. 벽은 초록색 마요르카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들어가면 왼쪽에 왕과 공식적인 부인 4명의 거처가 있고, 오른쪽에 37명의 후궁의 거처가 있다. 이곳 역시 비슷한 사과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장식이 아름다운 발코니에서 후궁들이 놀고 있으면 왕이 사과를 던져, 그 사과에 맞는 사람이 성은을 입는다는 이야기다. 후궁들의 암투는 치열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어설프면 성은 한번 입지 못하고 인생이 끝날 터였다.

하렘 내부 오른쪽 테라스가 후궁들의 숙소다. 테라스에 있다가 왕이 던지는 사과에 맞는 미녀가 그날 밤 성은을 입는다고 한다. ⓒ 정효정


왕의 침실 내부 하렘의 왼쪽에는 왕과 4명의 왕비의 침실이 있다. ⓒ 정효정


칭기즈칸이 머리를 숙인 그 건물

사막의 등대 칼란 미나레트 높이 47미터의 첨탑, 왼쪽은 미르아랍 메드레세다 ⓒ 정효정


"감히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하다니... "

높이 47m의 첨탑, 칼란 미나레트. 고개를 올려 이 탑을 바라보다 그의 투구가 뒤로 넘어갔다.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모자를 주은 칭기즈칸은 민망했는지 그렇게 핑계를 댔다. 덕분에 13세기 몽골 침략군의 광기 어린 살육과 파괴 속에서도 이 탑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

칼란 미나레트는 12세기에 지어졌다. 그 옆에는 1만 명이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다는 칼란 모스크가 있고 건너편에는 미르아랍 메드레세가 있다. 미나레트는 하루 5차례 아잔(예배시간을 알려주는 소리)을 외치는 높은 탑이다. 높은 탑이기에 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망루의 역할도 했다. 또 하나의 역할은 죄인을 처형하는 장소다. 매주 금요일마다 죄인은 자루에 넣어서 이곳에서 던져졌다고 한다.

이런 공개 처형은 단죄의 목적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한 선전의 방법이기도 하다. 히바에서는 죄를 지은 남자는 광장에 반만 거꾸로 묻었고, 여자는 자루에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넣어 매타작을 했다고 한다. 고양이가 안에서 난동을 부려 더욱 고통스럽게 하기 위함이었다.

칼란미나레트에서 본 부하라 전경 로맨틱한 이 경치는 과거 사형수가 죽기 전에 바라 보던 경치였다. ⓒ 정효정


칼란 미나레트의 또 하나의 역할은 실크로드의 등대 기능이다. 밤에는 불을 밝혀 대상들이 이 첨탑을 보며 방향을 가늠했다. 부하라는 사마르칸트에서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한다. 지라프샤 강이 흘러 실크로드를 횡단하는 대상들의 오아시스 기능을 했다. 수백 마리의 낙타와 함께 사막을 걸어오던 대상들은 밤에 이 불빛을 보며 안락한 오아시스를 꿈꿨을 것이다.

이 대상들이 도착하는 곳이 바로 구시가에 있는 굼바스다. 굼바스는 둥근 돔의 여러 건물이 서로 이어진 옛 상가건물이다. 이곳은 천 년 전에도 시장이었고 지금도 시장이다. 통로를 따라 어느 방향으로든 나가고 들어갈 수 있다. 실크로드 대상들이 낙타를 타고 이 굼바스에 들어올 수 있게 천창이 높게 설계되었다.

과거엔 이곳에서 실크로드 상인들은 비단과 카펫, 향신료, 가죽, 노예 등이 거래 되었고, 지금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부하라의 유명한 가위와 옷, 스카프, 인형 등 수공예품 등이 판매되고 있다. 가끔은 옛 화폐부터 지금은 필요 없어진 구소련의 배지나 깃발 같은 특이 아이템도 구할 수 있다.

굼바스 외경 낙타를 탄 대상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천정이 높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 정효정


굼바스에서 살 수 있는 가위 부하라에서 유명한 수공예품 가위다. ⓒ 정효정


사람은 두루 친분을 나누어야 한다

부하라는 중앙아시아 중세도시의 가장 완벽한 예로 불린다. 대부분의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이다. 도시를 돌아보면 오랜 중세도시로 여행을 떠난 기분이다. 칼란미나레트 옆에는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듯한 자르가른이라는 시장이 있다. 그 시장을 지나면 고대 부하라의 발상지인 아르크 고성이 나온다. 탄탄하게 짓기 위해 낙타 젖을 섞어 지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10세기에 지어진 현존 중앙아시아 최고의 이슬람 건물인 이스마일 샤마니왕의 영묘, 구약의 욥이 지팡이를 내리쳐 샘물을 솟아나게 했다는 차슈마 아윱도 부하라의 볼거리다.

아르크 고성 단단하게 짓기위해 낙타젖을 섞어 반죽했다고 한다. ⓒ 정효정


차슈마 아윱 구약에 나오는 욥이 지팡이를 내리치자 샘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 정효정


부하라 여행의 중심은 라비하우즈다. 하우즈는 옛 저수지를 뜻한다. 한때 부하라에는 이런 저수지가 100여 개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다 폐쇄되고 3개만 남아있다. 누군가는 소련이 전통을 없앴다고 하지만 소련 정부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 물을 통해 전염병이 창궐하곤 했기 때문이다.

직사각형의 라비하우즈를 중심으로 여행자들을 위한 레스토랑과 환전소, 인터넷 카페, 여행자 숙소 등이 모여있다. 이 저수지 주변에는 쿠켈다쉬 메드레세와 노디르 디반베기 메드레세, 그리고 과거 대상들의 숙소인 하나카가 있다.

라비하우즈의 밤 연못 건너편에 보이는 것이 과거 대상들의 숙소 하나카다. ⓒ 정효정


라비하우즈에서 보드게임 하시는 어르신들 하는 방법은 몰라도 가면 끼워주시곤 했다. 어르신들이 훈수 주시는 대로 하다보면 이기기도 한다. ⓒ 정효정


나스레딘 호자의 동상 나스레딘 호자는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 익살꾼이자 현자로 유명하다. ⓒ 정효정


그 중 노디르 디반베기 메드레세 입구의 타일 장식에는 조로아스터교 신화 속 불사조인 세물(semurg) 한 쌍과 사람 얼굴을 한 태양이 새겨져 있어 이목을 끈다. 사마르칸트의 시르도르 메드레세처럼 이슬람 율법을 초월한 지배자의 과시욕이 결합한 특징적 건물이다.

그런데 이 건물 앞에서 뜻밖에 한 무리의 한국 청년들을 만났다. 거리 연주인가 싶었는데 기타를 치며 기도 중이었다. 이 불쌍한 민족을 구원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기도인 줄 모르고 기타 소리가 끝나자 천진하게 박수를 쳤다.

노디르 디반베기 메드레세 조로아스터교의 불사조와 사람얼굴을 한 태양이 그려져있다 ⓒ 정효정


나는 급히 경찰의 눈치를 살폈다. 무슬림 국가인 우즈베키스탄에서 불법 선교혐의로 추방당하는 한국인이 종종 있다는 기사를 읽었던 터였다. 경찰 두 명이 근처에 있긴 했지만 크게 심각해 보이진 않는다. 아마 다른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처럼 거리공연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지난번 안디잔의 주메 모스크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다. 모스크 직원은 두꺼운 방명록을 들고 나왔다. 이 모스크는 유명해서 한국인들도 많이 방문했다며 자랑스럽게 한국어가 쓰인 페이지를 보여준다.

과연 한국어가 많았다. 하지만 그 중 상당수가 '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모릅니다. 이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이들의 악한 영이 무릎 꿇고 아버지의 영광이 승리하길 바랍니다'와 같은 기도문이었다. 내가 쓴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했다. 그가 한국어를 못 읽어서 다행이었다.

안디잔 주메모스크의 방명록 찾아보면 한국어가 꽤 많다. 이 중 상당수가 이곳의 '악한 영'을 물리치고, '승리하자'는 기도문이다. ⓒ 정효정


라비하우즈를 떠나면서 보니 한국 청년들은 아직도 노디르 디반베기 메드레세에 모여 있었다. <문명의 실크로드를 걷다>란 책에는 이 건물 정문에 '사람은 두루 친분을 나누어야 한다'는 아랍어가 적혀있다고 나와 있다. 청년들은 정말 이곳 사람들이 '악한 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언젠가는 두루 친분을 나누는 여행을 하길 바랄 뿐이다.

이제 실크로드 여행은 투르크메니스탄으로 이어진다. 투르크메니스탄은 비자 발급도 까다롭고 여행정보도 부족해 여행자들 사이에선 '중앙아시아의 북한'이라고 불린다. 세계 4위의 천연가스 매장량과 대통령의 독재와 기행으로 유명한 나라다. 이곳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 편집ㅣ김준수 기자

덧붙이는 글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여행 중, 실크로드- 경주, 중국,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로마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실크로드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 진행형 이야기입니다. 더불어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노처녀의 한풀이이기도 합니다. 실크로드에서 건져낸 이야기를 점과 점으로 이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또 하나의 실크로드가 그려졌으면 합니다.
#실크로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히바 #투르크메니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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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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