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름다운 곳에 중국 카지노라니..."

[30일, 제주를 달리다 5] 그 넷째 날

등록 2015.07.22 15:45수정 2015.07.27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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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도로 벤치에 앉아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 봤다. ⓒ 황보름


여자 사장님이 정갈하게 차려준 아침을 먹고 있으니 남자 사장님이 커피 한잔 하겠냐고 물어온다. 당연히 하죠! 유명 브랜드 커피숍의 커피콩보다 더 질 좋은 커피콩을 사용한 거라며 커피잔을 건네는 남자 사장님의 얼굴에 자부심이 스친다. 조만간 제주에 커피숍을 열거라는 남자 사장님이 손수 내려준 커피 맛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정말 좋았다. 다만, 양이 너무 적어 아쉬웠을 뿐. 적은 양의 커피를 아껴가며 홀짝이고 있으니 자연스레 앞에 앉은 게스트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긴 생머리가 잘 어울리는 그녀가 눈웃음을 가득 안고 묻는다.

"혼자 여행하시는 거예요?"
"네."


이번 여행을 하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바로 이 질문이었다. 혼자 여행하고 있느냐는 물음. 그렇다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대게 놀란 표정을 살짝 보여주고는 곧바로 대단하다는 류의 칭찬의 말을 흩뿌려주었다. 바로 이 생머리가 잘 어울리는 그녀처럼. 커플 여행 중이던 그녀는 옆에 앉아 있던 남자친구와 잠시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혼자 하는 여행."
"네, 해보시면 좋을 거에요. 저도 며칠 안 됐지만, 생각보다 괜찮아요."

생각해 보면 나도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여행할 때 혼자 여행하는 사람을 만나면 우선은 놀랐던 것 같다. 그리고는 부러웠었다. 내겐 없는 어떤 것이 그 사람에겐 있는 것 같아서.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염려스러웠다. 위험하진 않을까, 길을 잃으면 어떡하려고, 심심하면 누구랑 이야기하지, 밥은 혼자 먹나 등등 괜한 걱정이 들곤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도 혼자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강해지고 싶었는지도. 아니면, 삶은 원래 홀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이것도 아니라면, 나를 알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 안 깊숙이 숨어 있는 내 본래의 모습을 여행을 통해 끄집어내고 싶었는지도.

혼자 여행하느냐는 질문 다음에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을 생머리의 그녀가 또 해주었다.


"얼마나 여행하시는 건데요?"
"한 달이요."
"한 달이요? 와, 시간을 어떻게 내셨어요? 정말, 부럽네요."

한 달을 혼자 여행한다는 나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그의 남자친구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숙소는 어떻게 정했는지, 짐은 얼마나 많은지, 외롭진 않은지, 이동은 어떻게 하는지, 돈이 많이 들지는 않는지 등등을 물어온다. 나는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몽땅 다 해줬지만 할 수 없는 건 해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외롭지 않으냐는 물음엔 아직은 외롭지 않지만, 앞으론 어떻게 될지 몰랐으므로 그냥 웃기만 했다.

커플은 오늘 하루 아주 바쁘게 돌아다닐 예정이라고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제주도 전체를 하루 만에 다 훑으려는 듯 보였다. 그러려면 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텐데 그들은 아직 나와 박자를 맞춰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다. 그렇게 여유를 부리며 생머리의 그녀가 또 묻는다.

"오늘은 어디를 가시는데요?"
"이호테우해변이요."

이호테우해변의 검은색 모래에 와 닿는 바다의 포말 ⓒ 황보름


그녀도 그도 이호테우해변이란 해변을 들어본 적 없는 눈치였다. 이해가 갔다. 나도 이곳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이호테우해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었으니까.

제주국제공항에 내려 차를 타고 시내로 접어들면 누구나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드디어 여행이 시작됐다! 부푼 가슴을 안고 생각한다. 어디를 먼저 갈까. 그러다 내린 결론이, 가장 가까운 해변에 먼저 가볼까, 라면 이들이 찾는 해변이 바로 이호테우해변이다. 이호테우해변은 제주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으로 7km 거리에 있다.

내가 묵은 게스트하우스에서도 이호테우해변은 가까웠다. 걸어서 가면 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커피잔을 싱크대에 넣어 놓고 2층으로 올라와 옷을 갈아입었다. 아침에 달릴 때 보니 오늘 날씨는 어제완 달리 흐릿하고 싸늘했다. 여차하면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이다. 반팔 위에 긴 난방을 걸치고 바람막이 점퍼를 가방에 넣었다. 오늘은 어제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이호테우해변을 가는 도중에 만난 말 ⓒ 황보름


비행기는 나를 덮치지 않고 착륙을 향해 날아가는 중이다. ⓒ 황보름


5분 남짓 걷다 보니 해안도로는 끝이 나고 작은 동네로 접어들었다. 왼편에는 펜션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도두항이 보인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 걸까. 마치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동네인 것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왠지 나 역시 조용히 이곳을 빨리 벗어나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이렇게 조용한 가운데 비행기 이착륙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왔다. 해변으로 가는 내내 심심치 않게 커다란 비행기가 전속력을 다해 내게 돌진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행히 비행기는 나를 덮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공항이 있는 왼편으로 내려갔다. 비행기가 내려앉는 모습을 보려 발꿈치를 최대한 올려봤지만, 턱도 없었다. 대신 다시 바다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다. 분명, 저기 어딘가에 이호테우해변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길을 헤매다 마침내 해변에 도착했다. 

이호테우해변의 '이호'는 무슨 뜻일까, 하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곳이 이호동이라는 걸 알게 되면 답은 즉각 나오니까. 그렇다면 '테우'는 무슨 뜻일까. '테우'는 한자어로 벌선(筏船)이라 하여 떼로 만들어진 배를 뜻한다. 테우는 육지와 가까운 바다로 나가 낚시질, 해초 채취 등을 할 때 사용했던 통나무배를 일컫는데, 이러한 배는 이미 오래전에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저 멀리 빨간 등대, 하얀 등대가 보이고 해변가엔 친구 두 명이 바다에 발을 담그고 놀고 있다. ⓒ 황보름


이호테우 해변의 백사장 길이는 약 250m, 폭은 120m 정도이다. 바다랑 장난도 치면서 천천히 걸으면 해변 끝에서 끝까지 10분 정도면 걸을 수 있는 길이이다. 그리 크지도 그렇다고 너무 작지도 않은 해변이었다. 그런데 날씨 탓일까. 아니면 시간 탓일까. 해변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친구 두 명이 바다에 발을 적시며 깔깔 웃어대는 것 외엔 나처럼 몇 명 그저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뿐이었다.

바다만 찍고 싶은데 자꾸 모래산이 카메라 앵글에 잡힌다. 모래를 파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어디서 모래를 가지고 온 건지 감이 오지 않는다. 다만 지금 다시 모래 산 사진을 보니 왠지 모래 산이 아닌 모래 무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호테우해변 앞에 놓인 슬픈 운명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이호테우해변은 조만간 그 모습이 달라질 예정이다. 제주도 개발 바람이 이곳까지 치고 들어와 버렸단다. 이호테우해변을 포함한 이호1동 일대의 부지가 몇 년 전 중국 자본에 넘어가 버렸다. 중국 자본이 이곳에 세우고 싶어하는 것은 카지노 시설이다. 제주도의 한 아름다운 해변이 카지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관광지 중 한 곳인 제주가 관광객을 마다할 일이 무얼까. 중국인 관광객이 제주를 사랑한다면 이는 매우 좋은 일일 것이다. 실제로 내가 제주 여행 중 만난 모든 중국인은 제주를 매우 좋아했다. 제주가 아름답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중국 자본이 제주를 잠식하는 일은 중국인이 제주를 좋아해 여행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우리는 제주의 모습이 아름다워 그간 제주를 찾았다. 그런데 그 제주 본연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자본의 끝없는 욕심 때문이다.

사실 지금의 이호테우해변을 걸으며 카지노를 떠올리긴 불가능하다. 흔한 커피숍 하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해변은 아직 테우가 바다 위를 떠다니던 그때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해안가에 늘어서 있는 민박집과 가정집들도 제주 일반 해안가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면 과연 이 모습들이 얼마나 달라질지 벌써 가슴이 아려온다.

검은색 모래를 밟으며 오래도록 해변을 왔다 갔다 했다. 오늘은 다른 계획이 없었으므로 한참을 이곳에 더 있어도 됐다. 그렇게 계속 있자니 사람들이 점점 몰려온다. 유치원에서 온 수십 명의 노랗고 파란 아이들이 모래를 만지며 신나게 뛰어다녔다. 한 아빠는 힘들게 모래 산을 오르며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자그마한 아들에게 뭐라고 뭐라고 말을 했고, 그러자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아빠가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해변을 즐기는 모습을 나는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모래에 새겨진 발자국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 저 너머에 있는 쌍둥이 등대도, 모래를 간질이고 있는 바다의 포말도, 유치원 아이들도, 아빠와 아들도, 그리고 내가 하는 생각도 조용히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정말 혼자 여행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들이 오롯이 내게 담겨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천천히 어떤 목적 없이 하나의 물체를, 사람을, 생각을 바라봤던 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간 뭐가 그리 바빴다고 이런 시간 하나 가지지 못했던 걸까.

하지만 지금은 바쁠 일도 없다.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다. 시간도 많다. 거기다 나는 혼자다. 해변가에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지 않을까. 천천히, 목적 없이, 하나의 물체를, 사람을, 생각을.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해변에 앉아 내가 하는 생각을 바라보았다. 나는 한참 싱클레어를 생각하던 중이었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를. 나이 든 나는 어린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떠났던 여행을 떠올렸다. 그에게 여행이란 삶 그 자체였었지. 삶을 살며 싱클레어는 얼마나 애타게 자기 자신을 찾아 헤맸던가.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뚜렷하고 확고한 개인이 되기 위해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좇고 또 좇았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을 찾아낼 수 있었지.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찾아내는 과정은 멀고도 험했다. 그러니, 그런 험한 과정을 겪지 않은 내가 나를 잘 모르겠다 생각하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라고 그냥 치부하긴 싫었다. 조금이라도 더 나를 알고 싶었다. 진짜 나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여행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 나는 나를 알고 싶어 여행을 시작한 거였다. 나를 잘 알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조금 더 용기 있게 삶을 살아나갈 수 있게 되리라 기대했던 거였다.

오늘은 이렇게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설렁설렁. 그게 무엇이든 그것을 바라보면서. 혼자 하는 여행의 가장 좋은 점이 바로 이것이다. 마음 가는 대로 모든 할 수 있다는 것. 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해변에서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런데도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다는 것, 혼자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제주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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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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