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의 속살

[김성호의 독서만세 66] <1970 박정희 모더니즘>

등록 2015.07.30 11:22수정 2020.12.2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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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박정희 모더니즘 책 표지 ⓒ 천년의상상


하나의 유령이 2015년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박정희란 유령이. 박근혜 대통령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부녀가 모두 대통령직에 오르는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또 유신시대의 핵심부서 중앙정보부를 전신으로 하는 국가정보원은 내국민 사찰 의혹에 휩싸여 연일 신문지면에 오르내리고 있다. 한국의 오늘은 결코 박정희와 유신시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오늘을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박정희와 1970년대를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다.

오늘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둘러싼 담론은 크게 경제발전에 대한 공로와 독재의 과오로 요약된다. '산업화를 이끈 지도자'와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라는 조화롭지 못한 두 가지 시각이 그의 사망으로부터 36년이 흐른 오늘까지도 어지럽게 뒤엉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던 김재규의 외침은 공허하게 허공만 맴돌 뿐이다.


일상과 대중을 중심으로 1970년대를 조망하다

박근혜 정권은 자주 '유신독재'에 비유된다. 물론 일부 정치권과 박근혜 대통령의 머릿속에 고장난 시계가 들어 있고 바로 그것이야말로 가장 '유신'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10년 전쯤인 2004년이나 2005년을 돌이켜보면 좀 놀랍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 사회는 그때보다 하나도 좋아지지 않아 이런 것을 '퇴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민주정권의 실패와 이명박의 등장이 민주주의에 대한 대한민국 사람들의 신념과 감각을 얼마나 많이 망쳐놓았는지. 우리는 이제 한껏 무뎌져 검찰과 공권력의 공공연한 불의나 국정원의 국정개입과 여론조작 따위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분명 뒤로 물러설 수 없는 불가역적인 '발전'을 했다. 그 핵심은 개인의 자유와 욕망이 커지고 폭력과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자라났다는 데 있을 것이다. (...) 언제나 민주주의 전선이 있겠으나 '독재-민주'라는 이분법으로는 1970년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또 오늘의 모순을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다. 24,25,27p

천년의상상에서 지난 4월 펴낸 <1970 박정희 모더니즘>은 주로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다뤄져온 박정희와 1970년대를 영화·문학·교육·문화·사회 등 다양한 각도에서 사유한 책이다. 각자의 분야에서 1960, 70년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온 다섯 학자(권보드래, 김성환, 김원, 천정환, 황병주)가 공동으로 집필했다. 오늘날 한국의 정체성이 성립된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1970년대를 이들은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정치와 국가가 아닌 민생과 대중에 주안점을 두고 1970년대를 조망한다는 점이다. 새마을운동과 기능올림픽, 선데이서울과 연탄파동 등 70년대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요소가 두루 등장하는 가운데 독자는 박정희 정권과 모더니즘의 진면목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된다. 텔레비전의 보급과 영화 검열부터 총기사건과 고교 평준화, 경주와 신라사 복원, 의료보험제도의 창설, 부패한 문단권력, 대마초 파동, 그리고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될 전태일과 김남주까지 1970년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소재가 다각도에서 다뤄져 70년대를 살지 않은 사람도 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었다.

책은 유신시대를 상징하는 다양한 사건을 통해 1970년대가 사회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조명한다. 이를 통해 보여진 70년대는 신자유주의로 접어드는 초입으로 자본이 정치권력의 파트너가 될 만큼 성장했고 텔레비전이나 영화, 잡지 등 대중매체는 통제를 위한 도구인 동시에 다양성을 표출하는 창구로 다양한 역할을 요구받기 시작한 시기였다. 기능올림픽과 신라유적지 발굴은 민족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박정희 정권을 상징하는 새마을운동과 함께 선전의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다. 억압된 시대적 욕구는 때로 전위적이고 저항적인 청년문화로 발산되곤 했는데 이조차도 정권에 의해 묵살되고 부서지기 십상이었다.


1970년대는 근대화와 산업화가 뿌리내린 시기였다. 동시에 1972년 10월 발포된 유신이 8년간 지속되며 자유와 민주주의에의 열망을 억누르기도 했다. 민주주의와 산업화가 함께 도래한 서구 선진국 모델과 달리 이 시기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가 확연히 엇갈리는 모습을 보였다. 한 편에선 급격한 산업화가 이뤄지는 가운데 다른 한 편에선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전근대적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책은 이 같은 상황을 문화 창작물에 대한 검열과 새마을운동·기능올림픽 등 대민 선전작업의 전개, 대마초 파동과 스트리킹 해프닝 등 일상의 구체적 장면으로 형상화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유신에서 선데이서울까지를 관통하는 세 가지 관점

다섯 명의 저자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통일성이 그리 높은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1970년대를 바라보는 세 가지 일관된 관점이 있어 그 의도를 명확히 한다는 점은 인상적이었다. 책은 첫째로 근대화와 산업화가 어느 특정 정권의 공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미국의 적극적 중재로 일본자본이 유입되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 등 미국 주도의 세계체제에 편입한 결과로 주어진 과실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산업화 대 민주화'의 이분법적 구도와 '박정희 리더십론'을 넘어선 새로운 관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종류의 산업화과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졌는가, 그 내용을 돌아봄으로써 1970년대를 바라보는 기존의 틀을 탈피하려 한다.

세번째로 책은 1970년대가 박정희 개인과 그 정권의 전유물이 아님을 분명히 인식한다. 시대의 주인은 그 시대를 살아간 대중이었고 그럼에 대중문화와 문화적 모더니즘은 결코 부차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공유한 모두 27장의 다채로운 글이 1970년대와 박정희, 모더니즘이라는 키워드로 묶여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유신에서 선데이서울까지'라는 부제는 바로 이를 뜻한다.

조금만 더 객관적이었다면...

전반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적지 않았고 흥미로운 부분도 많았으나 일부 지나치다고 느껴지는 대목도 있었다. 천정환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교수가 쓴 '유신 시대 한국의 자살'이라는 장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검찰·군·국세청 등 권력기관의 남성 관료란 남성들 중에서도 웬만해서는 자기를 방기하지 않는, 자기관리와 보신에 확고한 부류의 인간 아닌가. 오늘날 지배계급 남성이 룸살롱 마담과의 사랑 때문에 목숨을 함께 버리는 사건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물론 가정을 가진 고위 관료나 현직 검사 또는 중년의 교육자 중에 '이루어질 수 없는' 진실하고도 비극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상식에 가까운 것은 사랑은커녕 성상납을 받는 검사와 경찰, 술자리 후 함께 성매매에 나서는 관료와 장교, 부하직원이나 제자를 성추행하는 공직자와 교육자다. 352, 353p

이와 같은 대목을 읽을 때 나는 스스로가 검사와 경찰, 관료와 장교, 공직자와 교육자가 아니고 심지어는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경멸해온 사람임에도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이웃을 오직 검사와 경찰, 관료와 장교, 공직자와 교육자라는 이유로 매도하고 있다. 설사 이같은 행위가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만연해 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근거 없이 이렇게 매도하는 건 폭력이며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유신 시대에는 자살률뿐 아니라 살인·강도·강간 등 강력범죄 발생률도 1960년대보다 훨씬 높았다. 경제 문제 때문이든 가족이나 농촌 전통사회의 해체 때문이든 유신 시대는 일종의 위기 국면이자 인간적 삶의 '비상 상태'였던 것이다. 354p

이 부분 역시 문제가 있는 대목이다. 자살률과 강력범죄 발생률이 치솟은 1970년대는 이전에 비해 치안이 대폭 강화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통계수집이 활성화되어 자료상 범죄 및 자살 수치가 증가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에 치안과 통계수집의 미비로 포착되지 못한 경우가 표면에 드러났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에 대한 고려 없이 수치 증가를 곧바로 유신이 위기 국면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쓴 것은 무리한 주장이라 생각한다.

저자들은 이 책을 '1970년대를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고 '박정희의 유산이 여전히 흘러넘치는 이 땅의 오늘을 헤쳐나갈 지혜의 일단을 함께 도모'하기 위해 썼다고 적었다. 책을 끝까지 읽고난 뒤 돌아보면 집필의 의도는 어느정도 이룬 저작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존과 다른 관점에서 시대를 조명하고 40여 년을 초월해 여전히 유효한 물음을 던지려는 저자들의 노력이 곳곳에서 묻어났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책이 할 수 있는 건 질문을 던지는 일까지다. 이로부터 해답을 찾는 건 오롯이 독자의 몫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1970 박정희 모더니즘>(권보드래, 김성환, 김원, 천정환, 황병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5.04. / 1만9천원)

1970, 박정희 모더니즘 - 유신에서 선데이서울까지

권보드래 외 지음,
천년의상상, 2015


#1970 박정희 모더니즘 #천년의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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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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