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모델몸을 젖혀 뒤를 누군가를 바라보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현광
"자, 그럼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결국 누드모델을 하기로 약속한 토요일 아침,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누드모델협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 회장의 안내로 탈의실에 들어갔다. 옷을 홀딱 벗고, 자주색 가운을 몸에 걸쳤다. 보호막 한 꺼풀이 벗겨진 기분이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야 한다니. 탈의실 밖에서는 화가 5명이 무대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준비하고 있었다. '목욕탕에 왔다고 생각하자',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여자도 있는 '목욕탕'은 처음이었다.
"일단 그냥 하세요, 연기한다고 생각하시고, 어떤 포즈든 괜찮아요, 몸을 통해 살아온 삶이 드러날 거예요, 화가분들은 그걸 그릴 거예요."하 회장의 충고는 간단했다. 알아서 하라! 시간이 다가왔고, 무대에 섰다. 무대 가운데 매트가 깔려 있었고, 삼면의 벽에 거울이 붙어있었다. 화실은 새하얀 형광등 불빛 때문에 환했다. 고요한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드디어 가운을 벗었다. '민망해하면 민망해지는 거야'를 속으로 외치며 담담한 듯 행동했다. 다행히 쿵쾅거리던 심장도 진정됐다.
그래, 해보자. 내게 주어진 2개의 초시계 중 1분에 맞춰진 초시계를 눌렀다. 초시계는 포즈를 바꿀 시간을 알려주는 용도였다. 처음 15개 포즈는 1분, 그 다음은 3분 포즈를 취해야 했다. 포즈는 입상(서 있는 자세), 좌상(앉은 자세), 와상(누운 자세) 등 몸의 방향을 돌려가며 다양하게 취해야 했다. 그래야 화가들이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모습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오른발을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디고, 왼팔을 쭉 뻗었다. 고개를 15도 들어 허공을 봤다, 허공에 그리운 대상이 있는 것처럼. 순간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제 와 돌이킬 순 없었기에 최대한 감정을 살리고자 애썼다. 감정이라는 가면 속에 얼굴을 숨기고 싶었다.
1분이 지나자 포즈를 바꾸라는 초시계 알람이 울렸다. '무슨 포즈를 취해야 하지?' 허둥대다가 앉지도 서지도 않은 상태로 멈췄다. 양손은 갈 곳을 잃어 허리쯤에서 덜덜거렸다.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너무 우스꽝스러울까봐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작업 동안 취해야 할 포즈가 총 40개였는데, 그 많은 포즈를 다 다르게 선보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슥슥, 삭삭. 1분 포즈 15개를 끝내고 3분 포즈를 시작하다 보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 화가들이 데생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곁눈질로 본 화가들은 바빴다. 자신들 앞에 놓여 있는 벌거벗은 몸을 한 번 보고, 도화지 한 번 보기를 반복했다. 파스텔, 먹, 연필 등을 이용해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림에 집중하는 화가들 눈빛에서 '왜 민망해 하는 거야?'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조각상이 된 기분이었다. 조각상이 민망함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