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선생된 열혈 IT교사, 교육부는 '천박'했다

교육과정 개정 '유탄' 맞은 한 선생님의 '과목 방랑기'

등록 2015.09.09 10:45수정 2015.09.0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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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인데요. '정보와 컴퓨터'(정컴) 선생님 좀 바꿔주세요."
"(수화기를 손으로 막은 채 옆 교사에게) 우리 학교에 정컴 과목이 개설돼 있나요?"

"몇 년 전 졸업한 학생인데요. 한문 선생님과 통화할 수 있을까요?"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최윤영(가명) 선생님이에요."
"(수화기를 손으로 막은 채 옆 교사에게) 최 선생님이 한문도 가르치셨나요?"

"예전 학부모입니다. 최윤영 전문상담 선생님 계시면 부탁드립니다."
"지금 휴직 중이신데, 무슨 용건이신가요?"

선생님은 하나인데 호칭은 여러 개

a  찾는 사람은 하나인데, 그의 직책을 묻는 질문은 여러 개였다. 정컴 선생님, 한문 선생님, 전문상담 선생님...

찾는 사람은 하나인데, 그의 직책을 묻는 질문은 여러 개였다. 정컴 선생님, 한문 선생님, 전문상담 선생님... ⓒ pixabay


외부로부터 최윤영 선생님을 찾는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겪는 상황이다. 흔히 가르친 과목명으로 선생님을 부르다 보니, 그를 찾는 전화는 어김없이 성함을 되묻는 절차를 한 번 더 거치게 된다. 그는 대학에서 전산학을 전공한 정컴 선생님이면서, 한 해 동안 한문도 가르쳤다. 지금은 전문 상담교사다. 졸업한 해에 따라 아이들도, 학부모도 그를 부르는 과목명이 각기 다른 이유다.

학생 수가 얼마 되지 않는 시골학교의 경우, 교사 한 사람이 인접한 서너 과목을 가르치는 게 예사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학교마다 교사 정원이 엄격히 제한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며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전공 분야를 버리고 생뚱맞은 과목의 교사로 장돌뱅이처럼 옮겨 다니며 아이들을 만나야 했던 그의 경우와는 다르다.

대학에서 전산학을 전공한 그는 내로라하는 컴퓨터 전문가였다. 초임 시절이었던 10년 전 당시 유행했던 온갖 IT 경진대회에서 상을 휩쓸다시피 했고, 교육청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강의 요청도 쇄도할 정도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대학 전공에 맞춰 취업하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되느냐고 눙치지만,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학교 교사라면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10년 가까이 동료교사로서 지켜봐 온, 컴퓨터 전문가로서의 그의 사명감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자신이 가진 지식을 미래 정보화 사회의 주역인 아이들과 나누기 위해 기꺼이 교직을 선택했고, 아이들 역시 그의 탁월한 능력과 열정에 반해 자발적으로 교내에 IT 동아리를 꾸리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은 그 동아리를 '최윤영 팬클럽'이라고 불렀다.

원치 않는 '방랑' 떠난 최 선생님


그런데, 제7차 교육과정을 끝으로 수시 개정 체제가 도입되면서 그의 원치 않는 '방랑'이 시작됐다. 학기당 이수과목을 최대 5개로 줄이고, '집중 이수제'를 도입해 예체능 등의 과목을 특정 학기에 몰아서 수업하며, 학교 자율에 따라 교육과정을 20% 범위 내에서 증감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2009 개정 교육과정이 시행됐다. 학습 부담을 줄이고 창의적 체험활동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였지만, 철저히 '비수능' 과목이었던 정컴은 더욱 존재감을 잃어갔다.

의도야 어찌 됐든, 학교의 교육과정 편성의 자율성 확대는 수능이 엄존한 현실에서 기초과목이라는 국·영·수 교과의 비대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선택 교과의 기준도 철저히 수능에 도움이 되느냐 여부였다. 특목고·일반고 가릴 것 없이 전국 대부분의 학교가 예외 없이 '똑같은' 선택을 했다. 정컴이 밀려나고, 비슷한 처지였던 한문이 그 자리를 꿰찬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학교에서는 계면쩍었던지, 컴퓨터에 도통한 아이들이 부지기수라 정컴을 굳이 학교에서 가르칠 필요가 없다거나, 향후 중국이 대세이니 중국어를 잘하기 위해서라도 한문이 더 필요하다는 등의 정컴 교과를 향한 황당한 '위로'가 난무했다. 수능 한방에 모든 인생을 걸어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조차 먹혀들 수밖에 없었다. 이내 승승장구하던 IT 동아리도 해체됐다.

결국 그는 상치교사(전공 외에 비전공 과목까지 두 과목 이상 가르치는 교사)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쳐야 했다. 컴퓨터 언어와 정보 보안 관련 책들이 가득 꽂혀있던 그의 책상에는 그와는 당최 어울리지 않는 책들이 쌓여갔다. 한문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 심지어 생뚱맞은 한자능력인증시험 문제집 등이 자리를 대신했다. 최고의 컴퓨터 전문가는 교육과정 개정의 유탄에 맞아 그렇게 '훈장 선생님'(아이들은 한문 교사를 훈장 선생님으로 부르곤 한다)이 됐다.

그의 몸에 새겨진 '정컴 DNA'

a  컴퓨터실 모습. 소외당했던 '정보와 컴퓨터' 과목이 '소프트웨어 과목'으로 다시 태어난다. 도외시할 때는 언제고 다시 살리는 모양새다.

컴퓨터실 모습. 소외당했던 '정보와 컴퓨터' 과목이 '소프트웨어 과목'으로 다시 태어난다. 도외시할 때는 언제고 다시 살리는 모양새다. ⓒ pixabay


그해 그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차라리 영어나 수학을 가르치라면 하겠는데, 한문은 정말이지 못 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수업 종이 울리고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이 너무 힘들어, 하루에도 몇 번씩 사직서를 썼다 찢기를 반복했다고 말했다. 짬이 날 때마다 연수를 받고, 고3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기란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를 정작 힘들게 했던 건 따로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조롱하는 듯한 눈빛에 의기소침해졌고, 전에 없던 자격지심까지 생겼다. 사실 그가 상치교사라는 걸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를 가르치려니 얼마나 힘드시냐'는 몇몇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 앞에서 그는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교사로서 정체성의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하루하루 고통 속에 지내던 그를 살려낸 것 역시 '또 바뀐 교육과정'이었다. 병 주고 약 준 셈이 됐다. 자신의 전공을 되찾진 못했지만, 적어도 그가 관심을 갖고 있던 분야의 교직 영역이 생긴 것이다. 전문상담교사. 그는 곧장 자격 연수를 신청했고, 드디어 상치교사라는 멍에를 벗을 수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고 그는 지금 학교에 한 명뿐인 전문상담교사다.

한문이라는 몸에 맞지 않은 옷을 벗었고, 또 공인된 자격 연수를 거쳐 전문상담교사로 거듭났다지만, 그의 몸에 흐르는 정컴 교사라는 'DNA'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한문 교사 시절에도 사라진 IT 동아리를 어떻게든 복원할 궁리를 했다. 이젠 더 이상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그토록 컴퓨터 분야에 집착하고 있는 건 어쩌면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몸짓 아니었을까.

그런데, 몇 년 전 그렇게 학교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던 정컴이 '소프트웨어 과목'이라는 이름으로 2018학년도부터 필수 교양 교과로 지정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부는 소프트웨어 중심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우선 학교에서 소프트웨어 교육을 필수로 이수토록 할 계획이다. 또, 시행령을 따로 만들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일정을 앞당겨 시행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고등학교의 경우에는 현재 심화선택 과목으로 분류돼, 사실상 버려진 정컴을 소프트웨어라는 이름의 일반 선택 교과로 전환할 방침이다. 나아가 수능 등 대입 전형 과정에 반영할지도 적극 검토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만약 그렇게 되면 국·영·수까지는 아니더라도 탐구 과목, 한문 등과 당당히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어엿한 수능 교과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되는 셈이다.

'백년지대계'라는 말 무색한 교과과정 개편

그는 자신의 전공을 찾아 소프트웨어 교사로 되돌아갈까, 아니면 천신만고 끝에 정착한 전문상담교사로 교직 생활을 이어가게 될까. 그의 선택이 자못 궁금하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조변석개하는 교육과정의 문제를 꼬집지 않을 수 없다. 언감생심 '백년지대계'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우리 교육이 10년, 아니 5년 앞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는 이 천박함을 무어라 변명할 것인가.

시쳇말로 '정권에 따라 춤을 추는' 교육과정의 폐해는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이다.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고, 교사는 교육과정의 주상 같은 령(令)을 거역할 수 없다. 요동치는 교육과정에 교사도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는 탓이다. 혹 다음 정권에서 이를 주도하고 있는 미래창조과학부가 해체되면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경험적 예측'조차 곳곳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다급히 '안전교육'이라는 과목이 신설됐다. 얼마 전 성범죄가 뉴스에 오르내리자 지금 학교에선 부랴부랴 성폭력 예방교육이 이뤄지느라 경황이 없다. 이들 또한 머지않아 흐지부지 될 거라는 건 정부 관료들도 다 알고 있다. 수년 전 동일본 대지진 때 한 해 동안 지진 해일 대피 훈련이 봇물을 이루다 이내 사라진 게 그 예다. 어차피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하나같이 면피성 대책이니 말이다.

지금 느닷없는 소프트웨어 과목의 필수 교양 교과 지정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S사와 L사 등 대기업의 로비가 먹힌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주력 사업이었던 스마트폰과 디스플레이 부문의 수익이 한계에 다다르자 '학교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는 것이다. 일례로, 수업을 위해서 그동안 버려지다시피 했던 컴퓨터실의 대규모 리모델링이 불가피할 터이니 말이다. 부디 뜬금없는 교육과정의 변화가 불러온 오해이길 바란다.

사족 하나. 17년 차 현직 교사로서 교육과정에 대해 정부에 조언 하나 하자면, 애먼 교육과정을 레고 블록 가지고 놀 듯 헤집지 말고, 온존한 학벌구조를 해체할 대안 마련에 '올인'해 달라. '꼬리'인 대학입시가 '몸통'인 교육과정은 물론, 초·중·고등학교 모든 아이들의 학교생활 전부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건, 기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

○ 편집ㅣ김지현 기자

#정보 교과 필수 지정 #교육과정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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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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