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비량 35억개, 라면의 역사가 궁금하다면

[서평] 무랴아마 도시오의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등록 2015.09.15 13:52수정 2015.09.1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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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 pixabay


느 가게 한쪽에서 커다란 솥에 무언가를 끓이고 있고 차례로 대접에 담아 사람들에게 건네주는 모습을 목격했다. 가격은 5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행렬을 따라가 보니 검게 그을린 얼굴에 허름한 옷가지를 걸친 사람들이 잔뜩 등을 구부린 채 100m 정도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중윤도 맨 뒤에서 차례를 기다려 보았다.

당시 고급 담배가 한 갑에 50원. 버스 요금이 8원이었으나 한 끼 식사치고는 꽤 싼 편이었다. 20분 정도 기다려서 그가 받아든 것은 하도 오래 끓여서 건더기 형체마저 사라진 잡탕 같은 것이었다. 돼지고기인지 소고기인지 잘 모르겠지만 고기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으니 이 사이에 뭔가가 낀다. 꺼내 보니 깨진 단추 조각처럼 생겼다. 대접을 휘저어보았다. 세상에나, 담배꽁초까지 나왔다.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중에서


1950~60년대 수많은 사람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음식. 미군기지에서 나온 잔반(남은 밥)을 다시 끓여 팔던 꿀꿀이죽에 대한 어떤 사람의 회고한 부분이다. 그 사람은 우리나라에 라면을 탄생시킨 전중윤. 제일생명 6대 사장에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61년 어느 날, 회사에서 가까운 남대문 시장에서 꿀꿀이죽을 사 먹고 그는 충격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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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책표지. ⓒ 21세기북스

그는 그날 사건 이후 가난한 사람들이 값싸게, 그리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어떤 음식을 꿈꾸게 된다. 그리하여 제일생명 6대 사장이란 안정된 직장을 놓게 된다. 그런 그가 몇 년 후 우연히 접하고 우리나라에서의 생산을 꿈꾼 것은 당시 일본에서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던 인스턴트 라면이었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라면 생산에 도움이 될 것은 당시 미국에서 원조를 시작한 때문에 다른 음식 재료보다 상대적으로 풍부한 밀가루뿐. 어떤 기계를 어느 정도 갖춰서,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대략의 짐작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낯설었다. 우리의 경제 사정과 수준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열악했다.

게다가 라면의 본고장 일본에선 몇 년 전부터 라면을 둘러싼 특허전쟁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지라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전수하려면 천문학적인 기술료를 지급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1인당 라면 소비량 74.1개, 한국이 압도적 1위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은 오늘날 우리의 소울 푸드 중 대표 음식인, 일본에서 개발된 라면이 어떻게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는가. 즉 우리의 라면 탄생 그 이야기다.

일본 오사카 이케다시 인스턴트라면 박물관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인스턴트라면협회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2014년 세계 라면 판매량은 1027억 4000만 개로 2012년 이후 3년 연속 1000억 개를 넘어섰다. 세계 70억 인구가 한해 15개씩 소비하는 방대한 양이다.

우리나라에서 소비된 라면은 35억 9000만 개로, 중국(440억 개), 인도네시아(1343억 개), 일본(55억 개), 인도(53.4억 개), 베트남(50억 개), 미국(42.8억 개)에 이어 7위이다. 그러나 1인당 라면 소비량은 74.1개로, 일본(43개), 중국(33개)을 압도한다. 통계발표 이래로 한국은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중에서.

전중윤의 꿀꿀이죽 회고는 본문 92쪽 내용이다. 28세의 청년 오쿠이가 막 날아든 한국전쟁 소식을 들으며 자신의 군인 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 책은, 그런 그가 '안도 모모후쿠'가 발명한(1958년) 인스턴트 라멘을 어떤 과정을 거쳐 스프 별첨 라면을 개발했는지, 전중윤이 남대문 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의 라멘을 우리나라에서 생산하기까지 등의 과정을 소설 형식으로 들려준다.

일본의 '인스턴트 라멘'이 한국의 '라면'이 되기까지

우리의 라면 역사에 오쿠이 혹은 묘조 식품의 비중은 매우 크다. 일본의 라멘 제작 기술을 도입하는데 지급해야 하는 돈은 우리 형편으로는 감히 천문학적인 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쿠이가 최소한의 기본적인 액수로 기계 설치와 기술협약을 약속, 나아가 우리의 라면 생산이 안정될 때까지 기술자를 파견해 생산에 많은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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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성분표. ⓒ 21세기북스

일본의 '인스턴트 라멘'이 '라면'이란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첫선을 보인 것은 일본이 인스턴트 라멘 개발에 성공 후 5년이 지난 1963년 9월 15일.

이름도 모양도 재료도 생소한 데다 조리법도 특이하고, 값도 비싸고 국물까지 밋밋한 이 음식은 처음에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한다. 아니 심지어는 '라면'을 새로운 옷감 이름으로 오해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런 라면은 2015년 현재 쌀보다 많이 팔리는 먹거리로 우리의 2번째 주식이 된 지 오래다. 또한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울 푸드 중 하나다. 라면은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을까? 면발이 꼬불꼬불한 이유는? 끓이지 않아도 잘 익는 컵라면의 조리 그 비밀은? 라면스프는 정말 몸에 해로운 걸까? 재료인 팜유는 어떤 기름이며 과연 안전할까? 10원으로 출발한 라면값은 시대별로 어떻게 바뀌어 왔을까? 책은 라면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들려준다.  

일본인이 들려주는 한국인과 라면 이야기

(저자에게) 왜 하필 고려대에 갔느냐고 물었다. 외국인을 위한 어학 과정은 당시 연세대학교의 한국어학당이 훨씬 더 유명했기 때문이다. 혁명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순간 난 많이 당황했다. 이 무슨 뜬금없는 혁명? 무라야마 선생은(저자) 고등학교 때부터 일본사회의 근본적 개혁은 천황제가 폐지되고 자본주의 모순이 극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군사독재에 대한 격렬한 투쟁을 벌이던 한국 학생운동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

바로 일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당시 데모가 가장 격렬했던 고려대학교의 한국어 어학과정에 입학했다. 데모만 일어나면 고대생들을 쫓아 다니며 '짱돌'을 날랐다. 최루탄 가스에 괴로워하는 고대생들이 눈을 씻을 수 있도록 물 주전자도 날랐다. 이제 그는 일본 교토 중심가에서 작은 한국어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학원 이름이 녹두학원이다. 일본 교토 한복판에 웬 뜬금없는 '녹두'냐고 물었다. 계급질서를 넘어설 수 없었던 봉건제의 조선과 서양 제국주의 흉내를 내며 한반도를 침탈해오던 일본 사이에서 사회변혁의 꿈을 저버리지 않았던 녹두장군 전봉준을 존경해서라고 했다.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추천사' 중.

내용에 앞서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고 공부하는 일본인(프로필에서)'인 저자 '무라야마 도시오'에 대한 이야기 한 부분이다. 덧붙이면 저자가 우리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읽고 주인공 김산에 매료되면서라고 한다. 저자는 앞서 배우 안성기를 일본에 소개한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를 썼으며, 이소선 여사의 일대기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를 일본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라면을 둘러싼 어떤 이야기가 늘 궁금했다. 누구든 선뜻 라면과 관련된 사연 혹은 추억 몇 가지 정도는 쉽게 풀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에게 막연히 친근하고 중요한 먹거리인 때문이다. 이런 라면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좀 많을 것이며 흥미로울 것인가. 당연 책이 반가웠다.

하지만 일본인 저자라 망설였다. 일본인의 시각에 치중해 썼을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선입견과 한국인의 시각으로 쓴 한국의 라면 이야기를 먼저 접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런데 버려야 할 선입견이라는 걸 여러 번 느꼈다. 한국에서 오래 부대끼고 살아야만 가능한 그런 매우 한국적인 시각과 정신이 자주 느껴졌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무라야마 도시오 지음/ 김윤희 옮김/ 21세기북스/2015년 8월 /1만5000원)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 한국과 일본, 라면에 사활을 건 두 남자 이야기

무라야마 도시오 지음, 김윤희 옮김,
21세기북스, 2015


#라면 #전중윤 #오쿠이(묘조식품) #삼양라면 #인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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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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