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올인했던 싸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사람들이 만난 사람들⑮] 스타케미칼 해고복직투쟁위원회 대표 차광호, 부대표 홍기탁

등록 2015.09.25 17:58수정 2015.09.2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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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고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프로젝트입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획하여 인터뷰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 기자말

2013년 1월 스타케미칼은 공장을 폐업하고 권고사직을 거부한 노동자 29명을 일방적으로 해고했다. 해고자들은 스타케미칼 해고자 복직 투쟁 위원회(해복투)를 결성하여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이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2014년 5월 27일, 차광호씨는 마지막 벼랑 끝에서 45m 스타케미칼 공장의 굴뚝을 부여잡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선택했다. 25살에 처음으로 입사하여 청춘을 다 바친 공장을 잃은 그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몸뚱이뿐. 그 몸을 이끌고 올라가 기약 없는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홀로 굴뚝에서 타는 듯한 여름부터 혹독한 추위의 겨울까지 살아냈다. 계절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 그리고 지난 7월 8일, 고공농성 408일이라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슬픈 신기록을 달성하고서야 사측과의 합의를 이뤄내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지난 9월 초 하늘에서 싸운 차광호, 그리고 지상에서 싸운 스타케미칼 해고자 10명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자 차광호씨와 스타케미칼 해복투 부대표 홍기탁씨를 만났다.

그들은 함께 덤덤하고도 날카롭게 '하늘'과 '지상'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풀어나갔다. 인터뷰 내내 그들의 표정과 내뱉는 말 속에는 오랫동안 힘겹게 투쟁해온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나있었다. 아래는 인터뷰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우리는 사측과 어용 노조, 둘에 맞서 싸워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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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세월호 팔찌를 하고 있는 차광호 대표 인터뷰 질문을 유심히 듣고 있다. ⓒ 이민경


- 스타케미칼 해복투가 만들어진 과정은 어떠했나요?
홍기탁 : "이 싸움을 보려면 그 전의 한국합섬 투쟁부터 연계하지 않으면 보기가 힘듭니다. 2006년 당시 한국합섬 시절, 1월 1일부터 공장의 모든 하청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2월에 사측은 일방적으로 정리해고에 들어갔고 이후 약 800명 중에 120명 정도가 희망퇴직을, 회사의 편으로 300명이, 민주노총을 지키고자 한 사람은 400명이 남게 됩니다.

그렇게 한국합섬 5년 투쟁(2006~2010년)을 시작했죠. 그 후 사측은 노조를 깨기 위해 250억~300억 원 정도를 투입해 가면서 용역과 구사대를 250명 가까이 동원합니다. 결국 노사합의 처리 되었으나 회사는 2007년 파산하게 되고, 돌아가지 않는 빈 공장을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지켰습니다. 그리고 2010년 7월 스타플렉스(모기업)가 한국합섬을 인수하여 스타케미칼이 되었죠. 동시에 우리는 3승계(고용, 노동조합, 단체협약)를 쟁취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5년간의 싸움이 결코 헛된 싸움이 아니었음을 보게 된 거죠."

차광호 : "인수 후 2012년 7월, 직원 인원 문제와 또 다시 개악되었던 호봉 문제 등을 바로 잡기 위해 24시간 전체 파업을 했었습니다. 일주일 간 부분파업 하기도 했고요. 이에 90%정도 호봉 문제가 해결됐고, 인원 문제는 파업부터 일단 끝내고 그 뒤에 재논의하자고 진행이 됐었습니다.

그리고 11월, 사측에서 인원문제 관련하여 대화를 시도해왔고 노사협의회가 열렸습니다. 공급 과잉이어서 회사 직원 인원을 줄여야겠다는 사측의 말에 순환 휴직하는 것으로 합의를 했죠. 그런데 이듬해 1월 2일 시무식에서 공장 문을 닫겠다고 사측이 일방적으로 통보했습니다. 전면으로 공장을 세우려면 6개월 전에 노사 합의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전혀 없었어요.

그러면서 어용 세력이 비대위를 받게 되고 139명을 권고사직 시켰습니다. 2월 4일 스타케미칼 청산 관련 합의서에 명시된 내용에 따르면 이후 공장을 돌리게 될 때 권고사직 쓴 사람에 한해서 일자리를 주겠다고 되어 있었거든요. 이를 거부한 노동자 29명은 해고당한 겁니다. 이에 반발하여 고용 승계를 요구하는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이후 지부에서 저를 포함한 해복투 핵심 6명은 징계, 제명당했습니다. 우리는 금속노조 중앙에 여기에 대한 부분들을 재심의 요청해서 새로 재심한 결과 '제명의 이유가 없다'고 해서 그대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약 1년이 지나갔고 2014년 5월 26일, '139명의 직원들에게 520만 원, 해복투 조합원들 28명에게는 1000만 원 지급 후 공장을 비워주고 스타케미칼과 모든 관계를 청산하겠다' 그리고 '법적인 부분에서 제기되는 점은 개별 책임으로…'라는 내용이 담긴 2차 합의서에 노조 집행부가 일방적으로 사인을 함으로써 바로 다음날 새벽 굴뚝 위에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 고공농성을 갓 시작한 당시에 사측의 반응은?
차광호 : "정시에 밥이 올라오면 아무 탈 없이 올라오는 거고 30~40분 늦으면 정문에서 들어오는데 문제가 있는 거죠. 그런데 2/3은 정시에 올라온 적이 없었어요(웃음)."

홍기탁 : "사측이 굴뚝과 외부를 단절시키려고 했었습니다. 공장 부지는 자본가들 개인 소유로 되어 있잖아요? 올라가자마자 경찰에 시설보호요청을 한 거죠. 그렇게 올라가자마자 밥 줄 때 빼고는 아무도 근처에 가지 못했습니다. 밥 이외의 물건을 올리려면 일주일은 싸워야 했습니다. 거의 매일 싸웠죠. 싸우지 않으면 올라가지 않으니까…."

- 굴뚝에서 도중에 내려오고 싶은 순간은 없었나요?
차광호 : 2015년 4월에 고공농성을 계속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었어요. '스타케미칼 하나에만 맞서 싸우고 말 거 아니지 않느냐, 앞으로 계속해서 사회운동 해야 할 거 아니냐, 몸 상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니냐'라고. 그러던 와중에 대구에서 스타케미칼 투쟁을 다큐멘터리 영상을 만들려고 하는데 인사말을 직접 촬영해달라며 연락이 왔었어요. 그걸 셀프카메라로 촬영하고 나서 보내기 전에 직접 봤죠.

그때 내가 왜 이곳에 올라왔는지 고민하게 되면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내려가서 싸움을 이어나간다 하더라도 당장 현실에 처해있는 입장을 돌파하지 못하면서 무슨 사회운동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 물어봤던 것도 있었습니다. 동지들이 더욱 힘들게 싸워내야 하는 부분들도 생각하며 새로이 마음을 다졌고요. 아무튼 그런 계기가 없었으면 그냥 내려왔을 수도 있죠."

"너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있다"

-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문화제를 408일 동안 매일 열지는 못 했을 텐데, 문화제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힘이 빠지거나 지치지 않으셨나요?
홍기탁 : "차광호 동지야 매일 우리만 보다가 날짜가 잡히면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거죠. 위에는 늘 똑같고. 저희들도 그렇죠. 공장 멈추고 싸운 기간이 총 2년6~7개월, 고공은 408일 된 건데 돌아가지 않는 공장에서는 현실적으로 진짜 할 수 있는 일이 반도 안 돼요. 그 속에서 문화제가 열리고, 희망버스 등이 있죠.

문화제라 하더라도 일단 준비는 10일 전부터해서 땀 뻘뻘 흘리며 준비해요. 당일 날 되면 정신없이 하루가 그냥 확 흘러가버려요. 흘러가고 난 다음에 다음날 청소까지 싹하고 나면 좀 허무하죠. 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니까. 장기투쟁사업장이 가장 안타까운 것이 그거에요. 그날 준비하면서 상당히 모든 것을 소진하는데 막상 그날 지나면 그 다음 일상으로 또 돌아간다는 것. 게다가 자본은 이것에 쉽게 익숙해져요. '하루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차광호 : "제가 굴뚝에 올라가고 난 후에는 동지들이 아래서 긴박하게 움직이는 것들이 408일을 버티게 해준 힘이었어요. 또 굴뚝에서 사람들과 의견이나 상황을 공유했던 SNS, 전화통화도 제게 힘을 보태주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한겨레>의 고공신문이 만들어지게 되면서 많은 언론들이 움직이면서 부터는 정말 큰 힘을 받게 되었죠.

개인적으로는 장모님이 큰 병을 앓았던 것과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인해 중환자실에 입원하셨을 때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자 살자 뛰어다니는 동지들과 함께하는 이들이 있기에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러 와서 '너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있다'라는 것을 보여 주었을 때도 마음을 다시 먹었고요. 이 세상이 변해야 한다는 의지도 있었죠. '안 하면 안 된다. 해야 한다'라는."

- 기나긴 투쟁을 끝으로 최근 7월, 해고자 11명의 복직이라는 사측과의 합의를 이뤄내셨죠. 하지만 굴뚝에서 내려오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홍기탁 : "7월 7일 오후 5시 35분에 합의했었어요. 원래는 연대자들과 함께 안에 들어가서 차광호 동지를 내리는 것에 대해 사측은 동의하고 잠정 합의했었는데 바로 다음 날 절대 안 된다고 말을 바꿨죠. 자기들 권한을 떠났다고 하면서요. 땅으로 내려오는 것 또한 순탄치 않았습니다. 실랑이 속에서 차광호는 내려오자마자 연행된 채로 우리 측이 아닌 검사가 지정한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연행된 지 30분 만에 검진까지 모두 끝내고 경찰서로 이동해서 조사를 받았죠.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이렇게 기획된 탄압에 반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사측에서 다시 결정한 순천향병원에서 재검진을 받게 되었고, 의사의 소견으로는 '전면 검진이 필요하다'였는데 다시 이동을 시켰습니다. 고공농성한 뒤 구속한 사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인생을 올인했던 싸움,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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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케미칼 공장 담벼락에 씌여진 '힘내라 차광호' 전국 각지에서 응원 온 사람들에 의해 씌여진 담벼락 예술작품 ⓒ 이정혁


- 스타케미칼 408일 동안의 고공농성이 차광호씨 본인에게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차광호 : "자본과 권력의 일방적인 횡포에 저항하며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았다는 것에 의의가 있죠. 마무리가 잘 안 된 상태에서 그냥 내려왔더라면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싸움은 차광호에게 있어서 내 인생 모든 것을 올인했던 싸움이었습니다. 제가 사회에서 배워왔던 것들을, 진실들을 그대로 실천하고 녹여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 내려온 이후에는 더욱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해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내려온 면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아직 남아있는 과제가 있습니다. 올해 12월까지 공장을 지어서 1월부터 다시 일을 하는 것으로 사측과 합의했지만 현실로 옮겨내야 한다는 거죠. 기륭전자의 경우도 사회적 합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기된 것이 현실인데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을 방지할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 있어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홍기탁 : "핵심은 자본주의죠.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상당히 힘든 삶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일상적으로는 계속 싸울 수밖에 없어요. 싸우지 않으면 기본적인 노동조건도 노동자도 각인될 수 없는 세상이니까. 싸우면서 핵심을 바꾸지 않으면 계속해서 힘들지 않겠어요? 결국은 핵심이 바뀌어야겠죠."

차광호 : "올라가기 전에는 희망에 대해 비관적이었습니다. 무언가 바꿔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힘들었죠. 내려와서 달라진 것은 그겁니다. '괜찮아. 안 바뀌어져도. 단, 바꾸기 위해 내가 끝까지 노력한다면 그 삶은 더 행복한 삶이 아닐까?' 바뀌진 않더라도 그 과정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찾을 수 있고 재미가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세상이 달라지려면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해요. 내가 가진 조건들을 바꾸어나가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와 함께 손잡고 간다면 가능할 겁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사람들>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연재됩니다. 싸우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람들 토크콘서트>가 10월 4일 대구에서 열립니다.
#스타케미칼 #해복투 #차광호 #홍기탁 #고공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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