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어렴풋이 보인는 위미항 등대
황보름
6시 40분, 러닝복으로 갈아 입고 밖으로 나왔다. 7시도 안 된 시간인데 벌써 햇볕이 뜨겁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뛰러 나온 이유는 오늘 달리기는 적어도 1시간은 넘게 걸릴 것 같아서이다. 처음으로 9km에 도전하는 날이다.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우선 몸을 풀었다. 다리도 풀고 어깨도 풀고 허리도 풀고. 그런데 그때 경차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조심히 들여다보니 한 여자가 운전석에서 잠을 자고 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봤다. 어딘가 눈에 익다. 아, 어제 만난 그 사람이구나!
어제 한라산 등반을 끝내고 들어온 방엔 새로 온 게스트 한 명이 짐을 풀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끼린 으레 그렇듯 서로의 지난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반갑게도 그녀는 내가 내일부터 묵을 게스트하우스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그곳이 어땠냐고 물었다. 무지 재미있었단다.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나 엄청 잘 놀았단다.
사실 내가 다음에 갈 게스트하우스는 선택하는 데 고민을 많이 한 곳이다. 밤마다 바비큐 파티가 벌어지고 떠들썩한 분위기로 유명했다. 과연 내가 그곳 분위기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의심돼 오랫동안 묵은 다른 게스트하우스와는 달리 2박만 예약한 터였다. 그녀는 말했다.
"제주에 온 지는 4일이 됐어요. 거기서만 3박을 묵었는데요. 지금 생각하니까, 흠… 그러고 보니 제주에 와서 관광한 데가 한 곳도 없네요. 첫날 바비큐 파티에서 만난 사람들하고 내내 술 먹고 놀기만 했거든요. 밤새 놀고 마시고 오후까지 자다가 또 만나서 술 마시고. 외국인 두 명도 끝까지 같이 놀더라구요. 아마 그 사람들은 오늘도 같이 놀 거예요. 그런데 여긴 정말 조용하네요."그녀의 말을 들으며 역시 2박만 예약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술판에 빠지면 도통 헤어나지 못하는 나이니, 스스로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몇 마디 더 주고 받은 후 씻으러 자리를 떴다. 씻고 돌아오니 그녀는 아까와는 달리 멋진 모습으로 변신해 있다. 이따가 보자고 말하며 그녀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나서 그날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이곳 게스트하우스는 밤 12시가 넘으면 아예 출입이 금지된다. 때문에 밖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던 듯했다. 차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힘들게 자고 있는 그녀를 깨울까 하다가 '아서라' 싶었다. 민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아침이니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개야, 제발 나를 그만 내버려 둬그녀를 뒤로 하고 공천포 해안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미리 계산해 보니 이곳 해안도로를 세 번 정도 왕복하면 9km가 채워질 것 같았다. 몇 미터 달리지도 않았는데 새삼 긴장감이 온 몸을 휘감는다. 과연 오늘 잘 달릴 수 있을까?
1.3km정도를 달리자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나왔고 그곳에서 반대로 돌아왔던 길로 다시 달렸다. 이대로만 왔다 갔다 하면 사람도 별로 없고 차도 별로 없는 이 도로를 나만의 달리기 레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이 좋다. 뭔가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악! 또, 개다!
한 마리가 아니라 이번엔 두 마리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골목 어귀에 묶여 있는 개 한 마리는 나를 죽여라 노려보며 짖어댔고, 또 다른 한 마리는 아예 자리를 박차고 나와 따라 오며 짖어댔다. 여차하면 내 엉덩이가 개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갈 참이었다. 나는 그렇게 가까이에서 개 이빨을 본 적이 없었다.
망했다. 나는 멈춰 섰다. 그리곤 개에게 손을 휘저으며 '아니'라는 제스처를 무의미하게 해 보였다. 너를 열 받게 하려고 뛴 건 아니라는 나름의 표현이었지만, 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제스처에 더 약이 올랐는지 목소리만 더 커졌다. 심장이 쪼그라든 나는 그냥 다 포기하고 가만히 서 있았다. 물려 죽으나, 겁먹어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일 것 같다는 강렬한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여기서 죽는 건 아까웠기에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 천천히 개에게서 벗어났다. 아, 정말 제주 개는 밉다.
그렇다고 개 때문에 달리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법. 개가 나타났던 반대편 방향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해안도로가 아닌 마을 속으로 들어가 달린 것이다. 그렇게 마을을 가로 질러 반대편 위미항 쪽으로 넘어가면 뛸 공간이 나올지도 몰랐다.
혹시나 개가 있나 싶어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마을을 달렸다. 바다 쪽으로 가려면 무조건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했다. 뛰다 보니 아주 귀여운 다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대서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