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셀프'에 담긴 자영업자의 애환

[국수로 만나는 세상 ③] 손님에게 호출 당하다

등록 2015.10.29 14:00수정 2015.10.2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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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지난 4월, 700만 자영업자 대열에 합류한 초보 국수장사입니다. 새로운 길에서 새로운 세상을 봅니다. 몰랐던 부분을 새롭게 알게 되며, 깊숙히 숨어 있던 실체를 만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곳 '국수로 만나는 세상'에 풀어 놓겠습니다. - 기자 말


"산은 산이요. 물은 셀프(self)로다."

우리 가게 정수기 위에 써 놓은 문구다. 창작한 것은 아니고 인터넷을 뒤지다 재밌어서 써놨다. 어느 날, 한 어르신이 이 글에 시비를 건다.

"사장! 이리 와 보슈."
"저거는 왜 저렇게 써 놓은 거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셀프는 무슨…."

가끔 손님 중에는 별 것도 아닌 일에 시비를 거는 분들이 있다. 사실 시비라기보다는 오지랖이 넓어서 그런 것인데, 한두 번 겪다 보면 속으로 짜증이 쌓인다. 국수 장사를 하기 전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작은 걸림돌 중 하나다.

손님이 눈치 보는 세상? 그게 아니라...


물은 셀프 국수 가게 정수기 위에 써 있는 ‘물은 셀프’ ⓒ 전병호


우리 국숫집은 '물은 셀프'다. 거기에 '추가 반찬도 셀프'로 운영한다. 국숫집을 하다 보니 이 같은 셀프제에 대한 반응이 세대별로 조금씩 차이가 난다는 걸 알게 된다. 순전히 경험에 의한 주관적 판단이겠지만, 대체로 50세 전후로 나뉘는 것 같다.

50대 이전의 세대는 셀프제에 대해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 들인다. 아무래도 패스트푸드점이나 각종 분식집이 범람하는 시대에서 살아 온 경험이 많기 때문이리라. 반면 50대 이후, 나이가 있는 세대들은 거부 반응을 보인다. 분명 "추가 반찬은 셀프"라고 써 있는 것을 보고도, 가져다 달라고 한다. 읽기는 '셀프'로 읽고, 행동은 '여기 빨리 주시오'다.

물론 진짜 못 본 사람도 있다는 점은 안다. 대체로 그렇다는 말이다. 가끔 어떤 사람은 주인 들으라는 듯 혼잣말로 불만을 표시 한다.

"요즘은 여나 저나 다 셀프구먼. 손님이 눈치 보는 세상이여 참나."

사실 우리 가게에서는 반찬이나 물을 달라고 하면 군말 없이 가져다 주고 있다. 그럼에도 셀프제에 대해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에 따라 왜 다른 반응이 나타나는 걸까? 사회학자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국수장사의 입장에서 해석해보았다. 셀프제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세대는 대체로 베이비붐 세대와 일치 한다. 대한민국 성장의 주역인 산업일꾼으로 오늘날 이 나라를 이 정도까지 이끌어온 주축 세대가 바로 이들이다.

어느 신문의 분석 기사를 보니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베이비부머들은 대체적으로 경쟁에 익숙하고, 자기 경험을 믿는 보수적인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그 분석대로라면 내 돈 주고 먹는 식당에서 물이나 반찬을 가져다 주는 서비스는 기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관점이라면 '호텔 식당처럼 비싼 음식을 파는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에 좀 억울한 마음도 든다.

사실 국수 장사를 하기 전에는 나 또한 그랬다. 음식점에 가면 물은 셀프라는 문구를 보면 그리 좋은 감정이 들지 않았다. 회사 생활을 했을 때 고객 서비스 만족도를 늘 강조했던 습관 때문인지, 그런 식당은 일단 들어서면서부터 낮은 점수를 주곤 했다.

그런데 국숫집을 해보니 알겠다. '물은 셀프'라는 말 속에는 우리나라 자영업자의 애환이 들어 있다는 걸. 그야말로 '셀프'로 살아 남아야 하는 현실이 녹아있다.

아사 직전 자영업자, '셀프' 아니고는 도리 없다

반찬도 샐프 추가 반찬은 셀프입니다. ⓒ 전병호


국세청 자료에 의하면 지난 2004년부터 10년간 우리나라 자영업자 생존율은 16.4%라고 한다. 매년 문을 여는 점포 100만 개 중 80만 개가 폐업하는 꼴이다. 특히 음식업 생존율은 겨우 6.8%라고 하니, 오늘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수많은 음식점 중 90% 이상이 폐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현실의 뿌리에는 지나치게 많은 자영업자 수, 높은 임대료와 장기적인 내수 침체 등 치명적 악재가 자리잡고 있다. 거기에 정부의 무능과 무관심이라는 이 나라의 고질병도 존재한다. 대부분 자영업자들이 아사 직전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렇게 현상 유지조차 힘든 상황에서 살아 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인건비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 사람 한 명 안 쓰고, 본인 노동력으로 대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선택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바로 '물은 셀프'다.

세계 여러나라 중 우리나라처럼 식당 벽에 "물은 셀프"라는 문구가 많이 붙어 있는 곳도 없을 듯하다. 오죽하면 물을 영어로 '셀프(SELF)'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인터넷 유머로 떠돌겠는가? 이처럼 '셀프제' 속에는 이 나라 자영업자들의 고단한 현실이 묻어 있다.

하긴 요즘은 물만 셀프가 아니다. '셀프 빨래방', '셀프 인테리어', '셀프 주유소', '셀프 세차' 등 셀프가 대세다. 정치권에서도 얼마 전부터 새정치민주연합이 셀프디스(selfdiss)로 홍보 캠페인 벌이고, 정부는 말이 많았던 국정원 개혁도 자체적으로 한다고 하여 '셀프개혁'이라는 말이 탄생했을 정도다. 바야흐로 '셀프의 시대'다.

셀프의 시대라고 적고 나니, 세월호 사건 이후 우리 사회 전반에 퍼졌던 '각자도생'(各自圖生, 제각기 살아갈 방법을 도모함)이란 말이 겹쳐진다. 지난 메르스 사태 때 이 말은 더욱 피부에 와 닿았다.

국가 재난 상황에서도 자기 밥그릇 지키기에만 관심있는 정치권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정부를 보면서 절망했다. 손님은 하루가 다르게 푹푹 줄어 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을 보면서 이 말밖에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각자도생. 나아질 조짐이 없는 이 암울한 불황 속에서 자영업자는 그냥 스스로, 알아서, 셀프로 살아 남아야 한다.

이 셀프의 시대에서, 힘 없는 영세 자영업자는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우리 국수 가게도 셀프의 시대에 동승하련다. 어르신들이 뭐라고 해도 우리 국숫집은 당분간 물은 셀프요, 반찬도 셀프다.

그런데 말이다. 아무리 셀프의 시대라지만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자신들의 가족사를 위해 친일과 독재를 미화 하려는 역사관이 올바르다고 우기는 마이 '셀프'(Myself)는 좀 과하지 않은가? 거참.

○ 편집ㅣ손지은 기자

#국수만세 #국수 #락락국수 #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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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공작소장, 에세이스트, 춤꾼,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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