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4. 세월호 희생자 유민 아버지가 단식투쟁을 하며 진실규명을 외쳤던 장면을 다룬 ‘아버지의 눈물’
김종신
'첫 번째 사람'이라는 정용국의 설치 작품 뒤로는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는 카운트 다운이 벽에 비쳐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좁다란 계단 밑은 분홍빛이 퍼져 나온다. 네온사인으로 '카드 결제일'이 적혀 있다. 월급 받은 날엔 지난달 사용한 카드빚이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경험을 하는 내게 카드 결제일은 결코 분홍빛이 아니다. 잔인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단을 올라갔다. 오른쪽, 왼쪽, 위아래가 하얀 공간이 나온다. 그 가운데에 덩그러니 나무 책상이 있다. 이건 또 뭘까? 고민하는 사이 목이 마른다. 가방에서 캔커피를 꺼내 마시려고 강당을 나왔다. 푸른 잔디 운동장 한쪽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았다. 산에 걸린 구름 한 번, 커피 한 모금. 바람 한 점에 커피 한 모금. 홀짝홀짝 마신 커피가 끝을 드러내자 미련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대성당 쪽으로 걸었다.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는 빨간 대추 열매가 햇살에 익어가고 있었다. 화단에는 예쁜 꽃 하나 피었다. 큰 키의 사람은 싱겁다고 하던데 멀대처럼 기다란 '가우라' 이 녀석은 고운 햇볕은 담은 분홍 꽃을 앙증스럽게 피웠다. 깊어가는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꽃의 인사를 받으며 대성당 밑 유의배공원으로 갔다. 이곳 어르신들의 시화전이 열린다. '바람이 전하는 말'이라는 시 제목처럼 바람이 싱그럽게 느껴지는 날이다. 시와 그림을 하나하나 구경하며 가을을 내 마음 속에 물들였다.
대성당 앞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입구 잔디밭에는 고양이와 비둘기떼가 주인인 양 햇살 아래서 샤워하거나 먹이를 쪼아먹고 있다. 내가 이들 가운데로 가도 이 녀석들은 놀라거나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흐트러짐 없이 하던 동작 그대로다. 물론 이 녀석들은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다. 조형물이다. 기다란 의자에 앉아 있는 고양이와 그 아래에서 무심한 듯 두 발 모으고 앉은 녀석까지 모두가 그저 평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