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급식충'이 나대느냐"고요?

[할많하않?할많하! ①] 유관순 광고 패러디한 '쥐픽쳐스' 국범근씨 인터뷰

등록 2015.11.18 21:32수정 2015.11.18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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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포세대, 헬조선, 흙수저에 이르기까지... 청년세대의 절망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넘쳐납니다. 청년들이 참 할 말 많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어린 것이 뭘 아느냐', '사회문제에 신경 끄고 네 앞가림이나 해라'라는 '꼰대'의 말에 하고 싶은 말을 삼킬 때가 많습니다. '할많하않', 이 신조어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의 줄임말입니다. '할많하않'이 아닌, 할 말이 많으니 하겠다는 청년들을 만나봤습니다. [편집자말]

잔잔한 내레이션과 함께,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은 한 여성이 숲길을 걷는 뒷모습이 보인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태극기. 여성은 '대한 독립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라는 내레이션에 맞춰 그 태극기를 펼쳐 보인다. 곧이어 노래가 멈추고, 심각한 표정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얼굴 위로 떠오른 문구는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여기까지는 지난 10월, 교육부가 내놓은 TV 광고 '올바른 역사교과서-유관순 열사편'과 같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유관순 열사는 광고와 달리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며 일갈한다.

"야, 장난하냐? 내 이름 좀 팔아 먹지 마. 내가 왜 위대한 줄 알아? 니들이 말하는 '급식충' 시절에 맞고, 욕먹고, 고문당하면서 독립운동해서 그래! 알아? 요즘 애들 거리로 많이 나오지? 걔네 말 무시 좀 하지 마. 걔네가 하면 선동당한 거고, 내가 하면 위대한 거냐? 역사 교과서 바꿀 시간에, 나가서 걔네가 뭐라고 하는지 한번 들어봐, 알겠냐?"

교육부의 TV 광고를 패러디한 영상 <내 이름 좀 팔아먹지 마!>(2015)의 내용이다. 1분 분량의 이 짧은 영상은 유튜브 조회 8만 건을 기록하는 등 큰 화제였다. 이외에도 영화 <베테랑>을 패러디한 <역사교과서 국정화? 어이가 없네>(2015), <건축학개론>을 패러디한 <올바른 역사? 납득이 안 돼 납득이>(2015) 등 역사교과서 국정화 비판 영상이 SNS에서 인기를 끌었다.

이 세 가지 영상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1인 미디어 창작자 국범근(20)씨가 직접 기획한 작품이다. 1인 미디어 채널 '쥐픽쳐스'를 운영하는 국씨는 온라인 미디어 매체 '청춘씨:발아'와 협업해 해당 영상을 제작했다. '쥐픽쳐스'는 <한국역사인물랩배틀>(2015) 시리즈로도 유명하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시 강동구 천호동의 한 카페에서 그와 마주했다. 국씨는 참신한 시각으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 또한, '급식충' 시절부터 쌓아온 영상제작 경험 덕분이란다.

"수능 하루 전에도 영상을 만들어서 유튜브에 올렸어요. 사실 수능이 남의 잔치인 것 같더라고요. 스스로 고3 수험생이라는 생각을 크게 안 했어요. 지금도 그렇죠. 저를 규정할 수 있는 지위는 '학생' 말고도 많아요. 남자, 대학 안 간 사람, 그리고 쥐픽쳐스 '최고 존엄'."


1인 미디어 창작자 국범근(20)씨. 1인 미디어 '쥐픽쳐스'를 운영하고 있는 국씨는 교육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을 비판하는 여러 패러디 영상을 제작했다. ⓒ 국범근


수능 하루 전에도 영상 만든 '관종', 1인 미디어 창작자 되다

학창시절의 국씨는 '복잡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조금 제멋대로 행동하는 '관종'('관심 종자'의 줄임말.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을 일컫는다-기자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영화 <세얼간이>의 주인공 란초(아미르 칸)처럼 학교를 발칵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단다. 교과서나 문제집 이외의 책을 좋아하고, 종종 친구들을 주인공을 한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찌질하면서 특별하기도 하고, 또 평범하면서 모범적인" 국씨가 영상을 만들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인 지난 2013년. 학교 회장 선거를 대통령 선거에 빗대 풍자한 <프레지던트>(2013)라는 작품으로 교내 UCC 대회에서 은상을 받은 것이 계기였다.

이때 '쥐픽쳐스'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영상제작 활동을 시작했다. 연출, 촬영, 편집에 연기까지 대부분의 역할이 그의 몫이다. 촬영 장비는 DSLR 카메라와 삼각대 정도다. 그야말로 단출한 '1인 미디어' 채널이다.

"처음에 쥐픽쳐스 유튜브 채널 만들고 활동을 한 게, 투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영상 만드는 일이 재밌었어요.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는 게 즐거워서 시작을 한 일이었죠. 그때는 1인 미디어니 퍼스널 미디어니, 이런 말도 전혀 몰랐거든요. 그래서 별로 고민할 것이 없었어요. 만들면서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서서히, 하나하나, 게임에서 퀘스트를 깨나가듯이."

그래서 국씨의 초기 작품을 보면, 그저 '재미삼아' 만든 것도 많다. 짧게 끝나버리는 방학의 허무함을 담은 <신나는 방학>(2014)과 같은 영상처럼, 학생들의 평범한 일상을 담는 데 그쳤다.

하지만 나중엔 그 일상을 조금씩 비틀고, 평범하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봤다. 에어컨이 잘 나오지 않는 학교를 배경으로 권력의 속성을 날카롭게 풍자한 <고등학교 에어컨 전쟁>(2014)이나, '수능시험'을 '쾌변능력시험'으로 바꿔 과도한 입시경쟁을 비판한 <쾌변능력시험>(2014) 등이 대표적이다.

청소년을 그저 '어린 것'으로 치부하고 무시하는, 어른들의 민낯이 담긴 작품도 많다. 국씨 스스로 아들과 아버지, 1인 2역으로 분한 <학생 놈의 새끼가>(2014)가 그렇다. 파마를 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벌점을 받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학생답다는 말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가 던지는 말은 딱 한마디다. "뭐 이 XX야. 들어가서 공부나 해, 인마." 이어지는 말은 더 잔인하고 현실적이다. "벌써부터 말이 많아! 말 많으면 빨갱이 되는 거 몰라?" 교육부의 TV 광고를 패러디한 영상 <내 이름 좀 팔아먹지 마!> 또한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왜 교육의 당사자들이 주변인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제가 <베테랑> 패러디 영상에서 교복을 입고 나오니까, 댓글로 '왜 급식충이 나대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일단 저는 (학교를 졸업했으니) '급식충'이 아니잖아요. 교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급식충'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고, 프레임이 씌워지자마자 제가 어떤 타당한 주장을 하더라도 무조건 자기 스스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선동당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격하되는 모습이 안타깝더라고요.

또 청소년들이 피켓을 들고나오면 '어른들의 문제에 나서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는데, 그 친구들이 국정교과서로 공부하게 되는 당사자잖아요. 그게 왜 어른들 문젭니까? 그리고 '너희도 생각이 있었니? 우리는 몰랐네, 미안하다'거나, '너희들 있어서 미래가 밝다'고 말하기도 해요. 청소년들도 늘 생각을 가진 존재였는데, 이전까진 생각이 없던 것처럼 치부하는 게 안타깝죠."

어린놈이 뭘 좀 알아 국씨는 올해 7월, <어린놈이 뭘 좀 알아>(2015)라는 청소년 웹 시사 토크쇼를 선보이기도 했다. 비슷한 또래 4명이 출연해, 메르스 사태나 퀴어문화축제와 같은 주제로 논의를 벌였다. ⓒ 국범근


'급식충' 시선 안타까워, 다양성 존중 않으면 '꼰대'

실제 국씨는 올해 7월, <어린놈이 뭘 좀 알아>(2015)라는 청소년 웹 시사 토크쇼를 선보이기도 했다. 한 방송사의 청소년 토크 프로그램 오디션에 떨어진 것이 계기였다. 국씨는 SNS를 이용해 비슷한 또래의 출연진을 구했다. 그렇게 모은 3명의 패널과 함께 '메르스 사태'나 '퀴어문화축제'와 같은 주제로 논의를 벌이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처음으로 많은 제작 인원을 투입한 작품인지라 촬영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힘들어서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운" 작품이라고 했다.

"20대 초반이든, 40대든 나이는 상관없어요. 꼰대 기질이 있으면 자기가 틀렸다고 절대 인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자기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남이 하는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그런 용기가 결여돼 있으면 '꼰대', 그러니까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괴물이 되는 거죠. IS와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에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국씨는 본인이 '즐거운 일'을 꾸준히 이어왔다. 그러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CJ E&M의 MCN(Multi Channel Network) 사업체인 DIA TV와 파트너십을 맺었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한 2015 우수크리에이터 발굴 지원 사업에 선정됐다.

하지만 영상 제작자로서 많은 성취를 이룬 국씨도 대한민국 땅에 발붙이고 있는 평범한 청년이다. 그가 일기 형식으로 올리는 영상, <데일리 쥐픽쳐스>(2015)에서 비친 국씨의 책상 한쪽엔 수학 문제집이, 또 다른 쪽엔 미디어 분야의 전공서적이 놓여 있었다. 올해 그는 수능 시험을 본 '재수생'이기도 했다.

"재미로 보러 간 거라, 크게 의미부여는 안 해요. 그래도 항상 끝나고 나면 주변 분위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고 그렇죠. 싱숭생숭해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죠. 그런데 그 해법이 반드시 입시 혹은 대학에 가서 정해진 루트를 밟는 것에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는 게, 결국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이잖아요."

국씨가 제작한 영상 중엔 유독 연세대학교와 관련한 작품들이 많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만든 <연세대 가는 영상>(2014)이 대표적이다. 막연히 연세대 입학을 꿈꾸며 연세대 로고송을 만들고, 연세우유를 먹는 주인공 역할도 국씨가 직접 연기했다. 최근엔 본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다큐멘터리 <연세대 낙방기>를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쾌변능력시험>과 같은 작품을 통해 기존의 입시 제도를 비판하면서도 '명문대'를 갈망하는 것, 한편으론 의아했다. 

"모순적이기도 하고 그렇죠. '연세대학교에 못 가면 죽겠다' 이런 것은 아니고, 어느 순간부터 콘셉트와 진실을 혼동하게 됐어요. 처음 영상을 통해 연세대학교를 이야기 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막바지였어요. 아무 생각 없던 머릿속에 '연세대학교'라는 게 스쳐 지나갔던 거죠. 중학교 때 대학 탐방을 가본 학교였거든요. 여느 학생들처럼 좋은 대학에 가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던 때죠.

그런데 제가 영상 제작 활동을 하다 보니, (마음속에서) 연세대학교로 대표되는 표상이 조금씩,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지금은 연대에 떨어졌는데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들어요. 지난 2년 동안 연대로 대표되는 가치와 쥐픽쳐스라는 가치가 계속해서 변증법적으로 투쟁하는 과정이었어요. 지금은 연대는 점점 작아지고, 쥐픽쳐스가 점점 커진다는 걸 느껴요. 연대에 떨어진 게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촬영하면서 인연이 닿아 계속 가게 되더라고요."

<한국역사인물 랩배틀>을 촬영하고 있는 국범근씨 <한국역사인물 랩배틀>을 촬영하고 있는 국범근씨. 신사임당의 아들 율곡이이로 분했다. 1인 미디어 '쥐픽쳐스'를 운영하는 국씨는 연출, 촬영, 편집에 연기까지 도맡기도 한다. ⓒ 국범근


'복잡한 사람'이라던 그의 설명이 맞았다.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종종 고민했다. 가벼워 보이면서도, 진중했다. 국씨는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내보였다. 조금 '찌질'해 보이고 멋있지 않아도, 할 말은 다 했다. 속내를 시원히 드러내기에 사람들이 그의 영상을 좋아한 것 아닐까.

국씨는 기존 방송 매체에 들어가지 않고, 계속 1인 미디어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1인 미디어 시장을 변화시키고 주도하는 것이 꿈이란다. 당장 내년의 목표는 유튜브 구독자 수 10만 명을 달성하는 것이다. 지금 그의 페이지를 구독하는 사람은 1만 3천여 명. 그는 쥐픽쳐스가 "대체 불가능한 채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금처럼 재미와 메시지, 두 가지를 모두 놓치지 않겠다는 욕심도 내비쳤다.

"세상이 참 팍팍한데, 팍팍한 세상에서도 연대의 가치를 경험해봤으면 해요. 연세대 말고요(웃음). 각자도생의 사회잖아요. 다 쪼개져서 밥그릇 지키는 사회인데, 그렇게 찢어지면 밥그릇 지키기 더 힘들잖아요. '헬조선'일수록 서로 뭉쳐야 해요. 그 경험을 쌓는 게 제가 하는 일이에요. 이 영상을 통해 저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도 연대의 새로운 방식이에요.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것이니까요."

○ 편집ㅣ김준수 기자

#국범근 #유관순 패러디 #쥐픽쳐스 #국정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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