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우기씨가 모델 활동하던 시절의 모습.
민우기씨 제공
그는 대학생활에 흥미를 못 가졌다. 그러나 사진학과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녔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모델 해보지 않을래?"라는 제의를 했다. 모델 장윤주와 홍진경의 소속사 이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스물한 살 청년 우기씨는 패션쇼의 런웨이를 걷는 모델이 됐다. 워킹도 금방 익혔다. 남자 모델은 자기 느낌을 살려서 걸으면 된다고 했다.
사람들이 "민우기다!" 알아보니까 '자뻑'한 적도 있었다. 모델이 되려고 굉장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그는 스스로 운이 따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알맞게 마른 몸매가 유지되니까 화보 촬영을 하기 위해서 특별히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프로 의식을 갖고 모델 일을 하지도 않았다.
"제가 막 원해서 이룬 게 아니잖아요. 5년쯤 지나니까 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들 앞에 나서서 얘기하는 게 가식적인 것 같고요. 주목받는 것도 점점 부담스러웠어요." 그는 영국 런던으로 가서 유학 중인 친구들을 만났다. 잠깐만 있으려고 했는데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우기씨는 차부터 팔았다. 이것저것 다 팔았다. 하던 일을 싹 정리하고는 런던으로 갔다. 장기간 체류하기 위해서 어학원에도 등록했다. 우기씨가 느낀, 먼먼 이국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외국에 나와 있으면, 저는 많은 사람 중에 한 명이잖아요. 그게 좋았어요. 서울에 있으면, '누구 아니야?' 알은 체 하면 인사를 받아야 하고, 제가 가서 인사해야 할 사람도 있잖아요. 크고 작은 틀 안에 매여 살면서 얘는 어떻고, 쟤는 어떻다는 평가가 따르고요. 그래서 런던이 좋았어요. 거의 1년 정도 있다가 돌아와서는 군대 갔어요."스물여덟 살, 그는 동사무소의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다. 사람들은 "야! 완전 편한 데 됐네"라고 했다. 우기씨는 '꿀보직'은 아니라고 여겼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과 세계관이 다른 구성원들이랑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게 싫은 성격, 복잡한 서류 정리를 배웠다. 시키는 일은 모두 꼼꼼하게 해냈다.
제대하고는 부산으로 갔다. 지인의 소개로 레스토랑과 갤러리를 겸하는 곳에 취직했다. 일하는 사람은 20여 명. 우기씨는 청소, 서빙, 주방, 잡일 등을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했다. 쉬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때 우기씨는 아무리 대단한 일이라도,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계속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체득했다.
"부산에서 보낸 1년은 진짜 힘들었어요. 거기서 살았는데 어떤 곳인지 몰라요. 부산은 티비에 나오는 곳도 많잖아요. 가볼 수가 없었어요. 일해야 하니까요. 퇴직금도 1년을 채워야 준다고 하니까 오기가 생겨서 안 그만뒀어요. 예전 같으면 바로 못 한다고 나왔겠죠. 동사무소에서 공익근무를 해본 덕분에 버텨낸 거예요."이웃은 동네 할머니들뿐... "제 힘으로 잘 되고 싶어요"우기씨가 온 군산은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사람보다 일본인이 더 많던 도시. 지금 '여흥상회'가 있는 동네는 일본인들의 주거지. 군산의 다른 곳보다 아늑해서 벚꽃도 일찍 피는 곳. 세월이 흘러서 1990년대가 되자 상권이 바뀌면서 슬럼화 되었다. 동네 할머니들이 "여기는 도둑도 안 들어, 사람들 떠나고 건달들이 하도 많이 살응게"라고 할 정도로 쇠락했다.
군산시에서 일제 강점기의 근대문화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면서 월명동은 활기차졌다. 지난해 8월, <1박 2일> 군산 편이 나가고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일제 강점기 때, 포목상을 하고, 미두장(쌀 현물 투기장) 이사를 해서 돈을 긁어모은 히로쓰. 대대손손 살려고 지은 일본식 집을 보러 여행자들이 온다. '여흥상회'에서 츄러스도 사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