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버스 안에서 만난 할아버지와 멀미로 힘들어 하는 어린 손자.
송성영
내 옆자리에는 가룻에서 올라탄 네 살 정도 돼 보이는 어린 손자를 품에 안고 있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내가 인사를 하자 방긋 웃는다. 사진을 찍어도 상관없냐며 사진기를 내밀자 다시 빙그레 웃는다.
하지만 어린 손자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다. 버스가 출발한 지 불과 10분도 채 안 됐는데 눈빛이 풀려가고 있다. 차멀미 때문에 줄곧 차창 밖에 고개를 내밀고 있다. 노인은 그런 어린 손자를 근심어린 눈빛으로 다독여 준다. 마치 늙은 새의 날개 죽지에 파묻혀 비를 피하고 있는 새끼 새처럼 애잔하게 다가온다.
인도 사람들, 특히 산악지대 사람들은 중에 버스 멀미를 심하게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코사니에 머물면서 면소재지로 가끔씩 버스를 이용했는데 그때마다 차창을 열고 심하게 구토하는 사람들을 여럿 봤다.
아무래도 두 다리로 걷는 것이 일상인 사람들에게 평소 이용하지 않는 자동차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인도 현지인들, 특히 가난한 서민들을 만나기 위해 다 낡아빠진 장거리 시골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율동이 심한 시골 버스를 멀미없이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꽤 독종인 셈이다.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힘든 시간을 보내는 어린 손자처럼 차장 밖으로 보이는 산골 농부들 역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5월 중순의 북인도는 한창 보리나 밀을 수확하는 시기인 모양이다. 산비탈 다랑이 밭에서 아낙네들은 밀이나 보리를 수확하고 있고 남정네들은 그 수확물을 나귀로 실어 나르고 있다. 곡식을 수확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아낙네들인데 한국에서처럼 낫으로 밑둥을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알곡만 베어 내고 있다.
제법 규모가 큰 바겟워(baqeshwar)이라는 곳에서 노인과 손자가 내렸다. 차장 사이로 손을 흔들어 주자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까닥하며 손을 흔들어 준다. 버스 안에서 내내 고통스런 표정이었던 어린 손자 또한 살포시 웃는다. 버스에 내려 두 다리를 땅에 짚게 되니 살 만한 모양이다.
바겟워에서 버스가 출발할 무렵 내가 앉아 있는 통로 건너편 옆 좌석에 열 예닙곱 쯤 돼 보이는 남학생이 앉아 있다. 머리에 기름까지 발라넘긴 녀석이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 '어디로 가고 있냐'는 둥 나와 비슷한 수준의 기본 영어회화로 말을 걸어온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했더니 녀석이 자신의 손전화기를 보여준다. 한국 제품의 손전화기다. 녀석과 다른 제품의 내 손전화기를 보니 오전 10시가 다 되어 가고 있다.
"학생이냐?""그렇습니다.""그럼 너는 지금 학교에 있을 시간이 아니냐?" "노 프라블럼!"녀석은 무엇이 문제가 없다는 것이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힌두어를 섞어 말했다. 녀석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영특해 보인다. 짐작건대 녀석은 학교 수업을 빼먹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학교 수업을 빼먹고 홀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학교 공부하고는 달리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제품의 손전화기를 통해 인도 가수가 부르는 랩 음악을 듣고 있는 녀석을 보면서 우리 집 큰 아이가 떠올랐다. 기숙사 생활하는 대안학교를 다니던 녀석이 무단가출을 한 적이 있다. 기숙사 생활에 숨이 막혔던 녀석은 무단가출을 하여 자신이 어렸을 때 살던 시골 마을을 둘러보고 개발로 사라져 버린 집터에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더듬어 시를 써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녀석의 가출로 인해 부모 자격으로 학교에 불러간 나는 선생들에게 녀석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녀석에게는 '다음에 무단가출을 하고 싶으면 아버지에게 용돈을 달라고 해라, 그런 가출이라면 얼마든지 상관없다'라고 말해줬다.
생각해 보면 인도에 온 나 역시 녀석처럼 무단가출을 하고 있었다. 분노심 가득한 나로부터 벗어나 내 안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참나를 만나기 위해 무단가출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처럼 무단가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인도 학생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는 가출을 했다. 너도 가출한 거냐?" "아저씨가 집을 나왔다고요? 왜요?""내 자신이 싫어서...""왜요?""내 안에 분노가 많거든...""무엇 때문에요?"나를 스스럼 없이 '엉클'이라고 부르는 녀석이 내가 묻는 대답에는 답하지 않고 되려 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어왔다. 나는 녀석의 물음에 아내와 이혼을 앞두고 화가 많이 쌓여 있다고 말하려다가 그만 두고 차장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버스가 멈춰 섰다. 버스 앞으로 결혼식 행렬이 늘어서 있다. 버스가 정차해 있거나 말거나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화사하게 결혼 예복을 차려입은 신랑 신부를 에둘러 싸고 신나는 밴드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버스 기사도 승객들도 태연하게 지켜보고 있다. 그렇게 아무런 불만불평 없이 10여분을 멈춰서 있던 버스가 다시 움직였다.
바켓워를 벗어난 버스는 나사를 풀어 나가듯이 나선형의 고불고불한 도로를 타고 높다란 산을 향해 달린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다시 멈춰 섰다. 좁다란 도로 한복판에서 오토바이가 버스를 멈춰 세운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온 청년이 버스에 올라온다. 뭔가 놓고 내린 물건을 찾는다. 청년이 찾는 물건은 버스 안에 그대로 있다. 자물쇠가 달려 있는 내 배낭이 부끄럽다.
높다란 산을 올라탄 버스가 지명을 알 수 없는 작은 마을 앞에서 몇몇 사람들을 내려주고 몸짓과 눈빛이 건들리는 20대 중반의 청년 하나를 태웠다. 공교롭게도 내 옆자리에 철푸덕 앉은 청년이 내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다. 나보다 영어가 한수 아래인 청년에게 문시아리에 간다고 했더니 자신이 문시아리에 대해 잘 안다며 자신의 보스가 문시아리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마리화나 얘기를 넌지시 꺼낸다.
"당신이 원한다면 마리화나나 코카인을 구해줄 수 있습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딴전을 부렸다. 그는 씹는 담배를 오물거리다가 차장 밖으로 침을 퉤퉤 뱉어가며 내게 짧은 영어와 힌두어를 섞어 끊임없이 문시아리 라는 단어가 들어간 얘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문시아리에 산다는 것인지 목적지가 문시아리라는 것인지조차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시골 읍내에서 건들거리는 논두렁 건달인 모양이었다. 외국인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좌석에 길게 누운 자세로 온갖 폼을 다 잡아가며 통하지도 않는 말을 걸어오면서 그 중간 중간에 어디론가 끊임없이 전화질을 한다. 참으로 귀찮은 녀석이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느닷없이 시비를 걸어올 것만 같은 불량기 어린 표정으로 나를 향해 묘한 웃음을 흘린다.
만약 여행길에서 누군가 시비를 걸면 태권도로 해치우라며 농담처럼 말했던 가텀씨가 떠올랐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나는 표 나지 않게 무릎을 폈다가 굽혔다가 해가며 몸을 풀었다. 무릎을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렸다. 비좁은 버스 안에서 뻐정다리로 서서 왔던 것이 후유증으로 몰려온 것이다. 오늘 아침에 진통제를 먹지 않아서 그런지 고통이 더 크게 몰려오는 것 같았다.
고불고불한 산악지대를 두어 시간 내내 쉬지 않고 달려온 버스가 작은 마을 앞에 멈춰 섰다. 랩 음악을 듣던 학생이 일어선다. 문시아리에 가려면 여기서부터 두 번째로 정차하는 '탈'이라는 곳에서 내려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며 친절하게 알려준다. 학생과 함께 온갖 건방을 다 떨던 논두렁 건달도 뒤따라 내린다. 녀석과 문시아리까지 동행하게 될까봐 난감했었는데 홀가분하다.
무단가출한 것인지 아니면 오늘이 개교기념일이라서 학교를 가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는 학생이었지만 녀석이 차장 밖에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한다. 불과 몇 초 사이에 홀가분함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논두렁 건달이 일어섰을 때는 홀가분했는데 무단가출 학생과의 이별은 아쉽다. 녀석과 나 사이에는 우주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 죽음과도 같은 영원한 작별인사다.
사실 논두렁 건달에 대한 두려움은 내가 지어낸 허상에 불과했다. 논두렁 건달 역시 내게 아무런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내게 허세를 부렸을 뿐이다. 그는 내가 여전히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불안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허상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알고 있는 '문시아리'라는 곳에 대한 정보는 코사니에서 만난 인연들로부터 들었던, 외국인은 물론이고 인도 현지인에게 조차 잘 알려지지 않는 관광지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말도 잘 통하지 않았던 논두렁 건달을 만나고부터 관광지라는 말을 다시 떠올렸다. '관광지라서 험악한 곳이 아닐까. 국경과 가까운 곳이기에 마약이나 마리화나 상인들이 판치는 곳은 아닐까'라는 별의 별 상상을 다했던 것이다.
"당신은 아주 행운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