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막 낳으려는데 스타킹 신겨주는 조산사

[류외향의 자연주의 음식과 삶의 이야기 ⑧] 마라도 사는 여자의 출산 분투기 ②

등록 2015.12.07 20:22수정 2015.12.0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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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도 사는 여자의 출산 분투기①에 이어집니다.


물론 그런 기사는 나지 않았다. 그 요란스러운 이송 과정이 극적인 결말을 맞으려면 구급차 안은 아니더라도 조산원에 도착하자마자 쑥 나왔어야 하는데, 요 녀석은 그러고도 한참을 대기 상태였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른 새벽부터 여러 사람 불러내어 고생시킨 것이 절대 가짜 임산부도 아니오, 진통이 엄살도 아니라는 걸 어떻게든 드러내야 할 것 같아 카메라 앞에서 등허리에 손을 받친 채 한껏 배를 내밀고 곧 비명이라도 지를 것처럼 얼굴을 구기며 포즈를 취해주었다. 그 정도면 보고용으로는 훌륭했을 것이다.

구급차를 타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일단 바다를 건넜으니 안심이 되었고, 많은 '관계자분들'을 뒤로 하고 둘만 있게 되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 이제 편히 쉴 수 있겠구나, 라는 기대감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구급차가 출발하자마자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차는 자갈밭을 달리는 줄 착각할 정도로 덜컹거렸다. 그곳은 분명 포장도로였다. 신랑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는데, 밖을 내다보더니 도로 사정이 안 좋은 곳이긴 하다며 나름대로 이유를 찾아보려 했다. 그러나 조산원까지 가는 50여 분 동안 승차감은 좋아지질 않았다. 난생 처음 타 보는 구급차의 덜컹거림은 어디다 고발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심했다.

응급환자를 이송하는 구급차 아닌가. 그 어떤 차보다 안락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벤츠나 메르세데스 급을 끌어와 비교할 수는 없고, 하다못해 다마스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말 다마스 같은 승합차의 뒷자리를 비우고 간이침대를 갖다 놓은 꼴이었다.

최근에 구급차를 다시 타볼 기회가 있었는데, 역시나 승차감은 기대할 바가 못 되었지만, 그래도 8년 전의 그때보다는 나았다. 당시의 구급차는 병 나으러 가다가 병이 더 도질 판이었고, 나오던 아기는 도로 들어갈 판이었다. 바다를 벗어나면 모든 게 순조로울 줄 알았건만, 고난은 거기서도 끝나지 않았다. 50분이 5시간처럼 길고도 길게 느껴졌다. 지독스럽게 불량한 승차감 때문에 누워 있는 게 힘들어 거의 내내 앉아서 갔다.


그렇게 트럭 타고, 보트 타고, 배 타고, 구급차 타고 난리굿을 벌인 뒤 오매불망 그리던 조산원에 도착했다. 119에서 조산원에 미리 연락을 해두었던 터라 원장님은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 그러나 절정을 장식하며 쑥 나왔어야 할 아이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애가 막 나올려 한다고 119 타고 왔는데...


진통마저 끊겼다. 자궁문은 며칠 전 열렸던 그 2센티미터에서 조금도 더 열리지 않은 채였다. 암만해도 나오던 아이가 놀라서 도로 닫고 들어갔을 것이다. 그야말로 허탈하고 겸연쩍었다. 초산은 원래 그렇다는 원장님의 위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119에서 아이가 나왔는지 어쩐지 자꾸만 전화를 해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또 방 하나 차지하고 앉아 진통을 기다리는데, 배가 고팠다. 그곳 식당은 조리원 시설의 일부라서 아이를 낳고 조리원 이용 절차를 밟은 산모에게만 밥을 준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도로 밖으로 나가 밥을 사 먹었다. 119 타고 와서는 아이를 낳기는커녕 내 발로 걸어 나가 밥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다시 돌아왔던 것이었다. 이런 민망할 데가! 그날 아침에 나보다 먼저 온 임산부도 아이를 낳았고, 나보다 늦게 온 임산부도 아이를 낳았다. 뒤에 왔다는 그 임산부는 분만실에 들어간 지 몇 십 분도 되지 않아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초산이라고 했다. "아, 좋겠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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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기를 낳았을 무렵의 조산원 내부와 김순선 원장님. 2009년도에 한라도서관 건너편으로 이전했다. ⓒ 류외향


끊어졌던 진통은 다시 시작되었지만, 빼꼼히 열린 자궁문은 요지부동이었다. 두 아이를 연달아 받은 원장님은 나의 진행 속도로 봤을 때 오밤중에나 나올 거라며 그때 보자는 말을 남기고 퇴근하였다. 조산원 오면 모든 걸 원장님 손에 맡기면 되는 줄 알았건만, 휭하니 가버린 원장님이 야속했다. 물론 그것은 초산인 임산부의 불안함 때문이었다.

원장님이 곁에 있어도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반 병원이라면 의사의 일정에 맞춰 분만유도 주사를 놓았겠지만, 자연주의 출산은 산모와 아이가 스스로 그러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원장님이 없다 해도 3교대로 근무하는 간호사들이 번갈아 가며 나의 상태를 살폈으므로 불안해 할 필요도 없었다.

또한 이미 아홉 달 동안 산모와 아이의 상태를 살펴보면서 아이를 무사히 낳을 수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선 이후였으므로 응급 사태가 발생할 일도 없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제주 김순선조산원 원장님은 6천 명 가까운 아이를 받은 전문가로서 한국조산사협회의 2인자다. 그 수많은 경험이 고스란히 비결이 되어 그 동안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었다. 일반 병원에서는 백이면 백 제왕절개를 강제하는 비정상 상태도 노련한 조산사에겐 그 역시 정상 상태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일테면, 다리부터 나오거나 어깨부터 나오거나 엉덩이부터 나오는 아이 등등 조금 특별한 경우가 드물게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 고양이 체조 등을 통해 아이의 머리가 자궁문을 향하도록 지도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럴 때라도 산모의 몸 상태가 견딜 만하다 판단되면 혼신의 힘을 쏟아 아이를 세상 속으로 이끌어 낸다. 만에 하나 응급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연계 병원이 있으므로 지금까지 아무 탈이 없었던 것이다.

진통은 파도처럼 끊임없이 쓸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했다. 고요한 바다에 풍랑이 점점 거세지듯이 진통은 조금씩 그 강도를 더해갔다. 저녁이 되자 어떤 자세를 취해도 견디기 힘든 통증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아픈데도 자궁문은 더 열리지 않았고, 지금 이렇데 아픈데 얼마나 더 아파야 할지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분명 일반 병원에 갔더라면 나 스스로 제왕절개를 요구했을 것이다.

나중에는 "아, 도저히 안 되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초산이라도 쉽게 낳는 사람도 많던데,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통증이 심하고 오래 갔다. 산모교실에서 교육받은 라마즈 호흡법도 해보았지만, 도통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도 6시간이 경과하고서야 자궁문이 많이 열렸다며 분만실 입장을 명받을 수 있었다. 새벽 2시경이었다.

분만실에 들어가서는 너무 고통이 심하니, 호흡법이고 뭐고 깡그리 잊어버렸다. 신랑의 옷자락을 붙들고 원장님이 도착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엄마! 엄마!"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세상 모든 엄마들이 엄마가 되는 순간에 간절히 그리운 사람이 바로 자신의 엄마일 것이다. 그러다 무언가 훅 쏟아져 내려 다리를 적시자 드디어 양수가 터졌나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양수가 아니고 시뻘건 피였다. 양도 아주 많았다. 나와 신랑은 몹시 놀랐다.

특히 신랑은, 매달 생리혈을 볼 일이 없는 남자였으므로 기겁을 했다. 다급하게 간호사를 불렀으나, 간호사도 덤덤하고, 나중에 온 원장님도 덤덤한 걸 보니, 경우에 따라 그냥 그럴 수 있는 모양이었다. 원장님은 쉬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신랑한테 매달려 왜 안 오냐고 화를 냈다. 얼마 후에 온 원장님은 너무나 여유로웠다. 나는 곧 죽을 것 같은데, 여유롭기 그지없는 원장님이 그리 야속할 수 없었다. 나중에 깨달은 거지만, 그것은 진짜 베테랑의 여유였다. 원장님은 모든 것을 꿰고 있었고, 느긋하지만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분만 준비를 했다.

아랫목 분만이었다. 옛날처럼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아이를 낳는 분만법이었다. 지금은 수중분만실도 있는데, 대부분의 산모들이 아랫목 분만을 선택한다고 한다. 뭐니뭐니 해도 우리 조상들이 터득한 방법이 제일이다. 푹신하고 뜨끈한 아랫목에 눕자 원장님은 아랫도리를 다 벗기고 배에는 얇은 이불을 덮고 양다리에는 허벅지 끝까지 오는 두툼한 스타킹을 한 짝씩 신겨 주었다. 원장님이 손수 만든 스타킹이다. 그 옛날, 당신은 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훤하게 다 내놓아야 하는 다리가 그리 수치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그 스타킹은 체온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는 데도 꼭 필요했다. 그때부터 나의 출산 분투기는 감동의 드라마였다.

쉬 나오지 않는 아이, 똑똑해서 그런 거라고?

아이는 여전히 쉬 나오지 않았다. 원장님의 지시로 호흡법을 하긴 했지만, 몇 초도 안 되어 도로 비명을 질러댔다. 아이의 머리가 보인다고 했다. 아, 곧 끝나겠구나, 하는 광명의 빛줄기가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원망스럽게도 아이는 그렇게 1시간을 버텼다. 원장님은 이렇게 해석해 주었다.

"아기가 똑똑해서 그런 거야, 똑똑해서. 자기 힘 안 들게 엄마 몸이 준비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그 와중에도 아이가 똑똑하다는 건 은근히 기분 좋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 편하려고 엄마를 이렇게 고생시켜도 되냐? 원장님의 덕담이겠지만,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이는 머리가 차돌처럼 단단했다. 아무래도 산책을 많이 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대개 아이는 머리가 말랑해서 산도를 통과하는 동안 두상이 길쭉해지곤 하는데, 이 아이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머리통을 가진 것이었다. 아이 머리가 산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산도가 아이 머리에 맞춰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엄마는 정말이지 죽을 것처럼 아팠단다, 얘야.

원장님은 1시간이 넘도록 까만 스타킹 신은 내 두 다리를 당신의 양어깨에 올려놓고 아이를 기다렸다. 다리통도 굵어서 얼마나 무거울까 괜스레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래, 그래. 잘 하고 있어." "옳지, 옳지. 아주 잘해." "괜찮아, 괜찮아. 조금만 더 하면 돼." 원장님은 나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말씀을 끊임없이 해주었다. 나중에 신랑이 들려준 말은 더욱 감동적이었다.

다리를 어깨에 올려놓은 그 상태에서 원장님은 산모의 호흡법을 똑같이 하면서 이런 저런 지시를 내리고 응원을 해주며 아이를 받아내었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신기(神旗, 신끼) 같았다고 한다. 조산사가 아니라 영험한 주술사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조산원이 있는 제주에서 두 아이를 다 낳을 수 있었던 것을 크나큰 행운이라고 여긴다.

아이는 그렇게 천천히 내게로 왔다. 아이가 쑥 빠져나오는 순간, 모든 통증도 끝이 났다. 새벽 4시 22분이었다. 극심한 진통이 시작된 지 8시간 만이었고, 첫 진통이 온 지 무려 26시간 만이었다. 아이는 말끔했다. 갓 태어났을 때는 대개 쭈글쭈글하고 이상하게 생겼다고 하더니, 이 아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목소리가 우렁차 원장님이 가수가 되려나 보다고 했다. 원장님은 아이를 받자마자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라며 사랑이 가득 담긴 축복의 말을 해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어느 누가 내 아이에게 그런 사랑의 축복을 내리겠는가. 아빠도 엄마도 마음은 굴뚝같더라도 입 밖으로 내뱉기는 힘든 말이지 않는가. 아이는 곧장 내 품에 안겼고, 금세 젖을 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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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자마자 젖을 빤 뒤 엄마 곁에서 풍욕을 하고 있는 아기 ⓒ 류외향


초유에는 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영양성분과 무방비 상태의 생명체를 지켜주는 면역 성분이 가장 많이 들어 있다. 출산 후 4일에서 10일 동안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낳자마자 1시간 안에 나오는 것이 가장 강력하다. 다행히 아이는 잘 먹어주었다. 아이에게 처음 젓을 물릴 때의 그 느낌, 아이의 입술이 젖꼭지에 닿아 오물오물하는 그 순간의 간지러움, 그때부터 나는 죽을 것 같던 그 통증을 잊기 시작했을 것이다.

남들 늦둥이 낳을 나이에 첫 아이를 얻은 신랑은 한결같은 태도로 내 옆을 지켜주었다. 아이를 낳으러 갈 때는 걱정이 태산이더니, 그 오랜 진통을 나와 한마음으로 겪었다. 머리칼을 쥐어뜯거나 욕을 하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옷자락을 부여잡고 매달렸는지 스웨터가 다시 입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신랑이니 망정이지, 그 길고도 긴 아비규환 같은 출산 과정을 누가 함께하겠는가.

우리 첫 아이, 기련이는 마라도산(産)이다. 비록 본섬에 있는 조산원이라는 공간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마라도에서 잉태되어 마라도의 정기를 받으며 뱃속에서 열 달을 보내고 나와 마라도에서 얼마간 자랐으니, 당연히 마라도산이다. 우리는 기련이에게 "네 고향은 마라도야"라고 일러주었고, 기련이는 송악산이나 모슬포에 갈 때마다 멀리 마라도가 보일라치면, "와, 내 고향이다"라며 늘 환호성을 지른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경제매거진 <이코노믹리뷰> 온라인판 12월 2일자에도 함께 실립니다. 이 이야기는 2008년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으며, 현재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은 마라도가 아니라 서귀포시 화순에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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