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편. 당시 박흥숙이 재판정에 들어서는 모습.
MBC
1977년 4월 20일, 광주 무등산 덕산골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무허가 집들을 철거하던 철거반원 두 명이 쇠망치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또 다른 두 명 역시 병원으로 옮겼지만 숨을 거뒀고, 단 한 사람만이 겨우 생명을 건졌다.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 또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그들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지른 이는 박흥숙. 그때 나이 23세, 세상을 경악하게 만든 사건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평범한 쪽에 속하는 청년이었다.
전과는 없었으며 그의 체구는 오히려 왜소한 편에 속했다. 165cm가량의 작은 키, 자그마한 체격의 그가 어떻게 건장한 상대들을 제압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는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다.
쇠파이프로 만든 사제 총으로 위협했다고 했다. 평소 무예를 익히고 칼 던지기 등 십팔기에도 능숙하다고도 했다. 태권도에, 유도, 기합술까지 두루 섭렵한 무예의 고수라고 했다. 사실보다는 거짓, 그리고 허구에 더 훨씬 가까운 이야기들이 연일 신문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언론은 그에게 '무등산 타잔'이란 별명을 갖다 붙였다.
1977년 9월, 1심에서 박흥숙은 살인 및 살인 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다음 해 2월 광주고법은 항소를 기각했고, 그로부터 3개월이 흐른 5월 9일 대법원 형사부는 원심대로 사형을 확정 짓는다. 그리고 1980년 크리스마스이브, 박흥숙은 사형을 당한다. 위인백 5.18 교육관 관장은 2심 재판 당시 박흥숙의 변호를 맡았던 이기홍 변호사의 사무장으로 일했던 사람이다.
먼저, 그는 의외의 사실을 전했다. 당시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김아무개씨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했다.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후, 지금까지 교류하고 있으며 사건 이야기도 나눈 적이 있다고 했다. 위 관장은 "아주 바르고 좋은 사람"이라며 "그때 자기가 안 죽은 것이, 유도를 오래 해서 외부 충격을 더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같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37년 만에 다시 읽은 최후 진술서, 그의 반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