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3대 누각인 이곳이 문화재자료에 불과?

진주 촉석루 이야기... 1차 진주성 싸움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평가받는 까닭

등록 2016.01.11 17:56수정 2016.01.1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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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다. 사진은 촉석루의 현판. ⓒ 정만진


"진주의 아름다운 산천은 영남에서 제일이다."(晋陽溪山勝致 嶺南第一)

진주를 예찬한 시문(詩文) 중 현존 최고(最古)의 글로 여겨지고 있는 이 짧고 명료한 단문은 이인로(1152~1220)가 자신의 <파한집>에 남긴 말이다. 이인로는 '진주' 하면 무엇보다도 뛰어난 경치가 연상됐던 모양이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이인로의 이 말은 진주를 사람들의 뇌리에 '경승지'로 각인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을 법하다.


진주에서 지어진 시 가운데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김지대(1190~1266)의 '기상주목백최학사자(寄尙州牧伯崔學士滋)'로 추정된다. 진주목사였던 김지대가 1241년(고려 고종 28년)에 창작한 이 시는 그가 상주목사 최자(1188~1260)에게 보낸 편지 속에 들어 있다. <동문선>에 수록돼 있는 '기상주목백최학사자' 역시 진주의 뛰어난 경치를 상찬하는 대목을 보여준다.

"낙읍(상주)의 계산(자연)이 비록 좋기는 하나 진주의 풍월 또한 선향(신선 세상)이라네." (洛邑溪山雖洞府 晉陽風月亦仙鄕)

하지만 이인로와 김지대의 시는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작품들이다. 진주가 남강 등 눈부신 경치를 거느린 곳이라고 해서 임진왜란 후의 조선인들에게까지 줄곧 명승지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진주' 하면 '논개' '촉석루' '진주성 싸움' '김시민' '김천일' 등 임진왜란 관련 고유명사들을 떠올렸다. 그만큼 진주는 왜란의 격전지였고, 대승지였고, 깊은 상흔이 선혈처럼 남은 곳이었다. 정약용이 '촉석루 회고(矗石樓 懷古)'라는 시를 남긴 것 또한 그같은 심정 때문이었다.

"오랑캐의 바다를 동으로 바라보니 긴 세월이 흘렀구나 (蠻海東嗟日月多)
붉은 누각은 우뚝 솟아 산하를 베고 있네 (朱樓迢遞沉山河)
꽃 피어난 물에 해 비치니 가인이 춤을 추고 (花潭日照佳人舞)                 
단청 매긴 기둥엔 장사의 노래가 깃들어 있네 (畵棟長留壯士歌)         
전장터 봄바람 초목을 휘어감고 (戰地春風回草木)        
폐허가 된 성엔 밤비 내려 안개 낀 물살 이네 (荒城夜雨漲烟波)               
아직 남아 있는 사당에는 영령이 계시는 듯 (只今遺廟英靈在)  
삼경에 촛불 밝히고 강신제를 올리네 (銀燭三更酹酒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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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 정만진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이름을 떨쳐온 촉석루는 진주성을 찾은 나그네가 가장 먼저 찾는 곳이다. 하지만 정면 5칸, 측면 4칸의 웅대한 촉석루는 뜻밖에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8호라는 상당히 초라한 위상에 머물러 있다. 이는 부벽루가 북한 국보, 영남루가 남한 보물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데 견줘 현격히 남루한 모습이다. 본래 국보였던 촉석루가 어째서 문화재자료로 아득하게 격하됐을까.


1차·2차 진주성 싸움은 임진왜란을 진주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촉석루에 문화재 등급이 낮게 매겨진 것 역시 또 다른 전쟁의 결과이다. 촉석루는 1241년(고려 고종 28)에 처음 지어졌다고도 하고, 1365년(공민왕 14)에 창건됐다고도 하는데, 마지막 중수는 1725년(영조 1)에 이뤄졌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촉석루는 영조 때 중수된 건물도 아니다. 영조 원년에 크게 손을 본 촉석루마저 한국전쟁 와중에 전소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오늘날 나그네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둘러보는 촉석루는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재건한 누각이다. 태어난 지 60년도 채 안 됐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화재 지정은 보통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있으면서 동시에 100년 이상 지난 건축·그림·서적 등을 대상으로 한다. 그렇게 보면, 본래 국보였던 촉석루가 그 이후 보물로도, 유형문화재로도 지정받지 못했지만 문화재자료로나마 이름을 올린 것은 자신에 깃들어 있는 임진왜란의 역사와 이름값 덕분일 것이다.

평양 부벽루는 북한 국보, 진주 촉석루는 남한 문화재자료

촉석루는 태평성대 때 과거 시험장으로 쓰였다. 누각에 장원루(壯元樓)라는 색다른 별칭이 붙어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반면, 2차 진주성 싸움 때의 기록이 말해주 듯 전쟁 때에는 전투를 지휘하는 본부, 즉 주장대(主將臺)로 사용됐다. 현재 진주성 성내에는 북장대와 서장대도 복원돼 있는데, 남쪽 성곽에 있는 촉석루는 남장대(南將臺)였다.

촉석루의 촉(矗)은 '우뚝솟을 촉'이다. 하륜(1347∼1416)의 <촉석루기>(矗石樓記)에 따르면 촉석루라는 이름은 '남강 가에 뾰족뾰족한 돌들이 솟아 있는 까닭에 그 모습을 따서' 지어졌다고 한다. 과연 촉석루에서 남강을 내려다보면 성곽에서부터 강물까지 이어지는 암석 절벽은 온통 뾰족한 기암괴석들로 채워져 있다. 떨어지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는 촉석루! 2차 진주성 싸움 때 김천일을 비롯한 많은 장군과 군사들, 그리고 논개가 이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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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 장군 전공비(왼쪽)와 촉석정충단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 진주성 성내 ⓒ 정만진


1차 진주성 싸움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벌어졌다. 진주목사 김시민을 비롯한 조선의 군·관·민은 3000여 명에 불과했지만 결사항전 끝에 3만 명에 이르는 대적을 격파했다. 선조가 압록강까지 도망가고 온 국토가 적들의 발굽 아래 짓밟혔지만 1차 진주성 싸움에서 패전한 탓에 일본군은 호남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일본군은 굶주림과 추위, 의병들의 분전과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수군의 승전에 밀려 남해안까지 전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곡창 지대 호남을 점령, 군량미 문제를 해결한 뒤 원활하게 전쟁을 치르려 했던 일본의 계획은 1차 진주성 싸움 패퇴로 말미암아 송두리째 망가졌다. 그래서 1차 진주성 싸움은 임진왜란 3대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 안내판
이 비는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장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새긴 비이다. 당시 김시민 장군은 판관 성수경, 곤양군수 이광악 등과 함께 주도면밀한 작전을 펼쳐 왜적을 격퇴하였다. 비문에는 1천 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10만 명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는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 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나타난다.

김시민 장군은 적은 군사로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왜적을 꺾고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이곳 진주성을 사수함으로써 왜병의 호남 진출을 봉쇄하여 임진왜란 초기에 우리측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고 전열을 가다듬을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부고을 백성들의 열망에 의해 광해군 11년(1619) 7월에 세워졌는데, 성균관 진사 성여신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 필자 주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호인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진주성 성내에 있다.
한산도 대첩과 행주산성 대첩의 의의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조선 수군의 한산도 승전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평가받는 까닭도 이와 비슷하다. 조선 수군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본 침략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무참하게 격멸됨으로써 전투 물자와 군량미를 한양과 평양으로 실어나르지 못하게 됐다. 서해를 이용할 수 없었고, 호남 일대 진입도 불가능했다.

그 결과, 단숨에 평양까지 진출했던 일본군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린데다 자기 나라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맹추위를 앞두고 전의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수군의 승리는 1차 진주성 싸움의 쾌승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뜻깊은 대첩이었다.

그렇다면 권율을 중심으로 한 행주산성 승리는 어째서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평가받는 것일까? 조선 의병들의 분전, 수군의 연전연승, 1차 진주성 싸움의 쾌승, 명군의 참전 등에 밀려 일단 남하했던 일본군은 재차 한양을 점령하기 위해 북상하다가 행주산성에서 대패하면서 그 기세를 잃는다. 행주산성 대첩 또한 임진왜란의 역사를 뒤바꾼 승전이었다.

1차 진주성 싸움 대패를 설욕하기 위해 일본군을 총동원하는 풍신수길

1593년 6월 19일, 작년의 1차 진주성 싸움 패전이 전쟁 전체의 판세에 결정적 악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0만 명이 넘는 일본군을 진주로 보낸다. 진작부터 공개적으로 전군을 동원해 보복전을 치르겠다고 선포한 바 있는 풍신수길은 '(진주성 점령 후) 1인도 남기지 말고 모두 학살하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문제는, 일본이 자신들의 부산 본영을 지키는 군사들만 제외하고 전 병력을 진주로 집결시킨 데 반해 그에 맞서 싸울 아군은 불과 60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즉, 2차 진주성 싸움의 끝은 국사에 전혀 무심한 사람일지라도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적군 10만 명과 아군 6000명의 혈투…. 이미 전투가 성립될 수 없는 규모의 차이인 까닭이다. 진주성 안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의 안내판이 '보복전을 시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특명을 내려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이끄는 왜군 최정예의 대군을 편성,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왔다. 이때 삼장사(三壯士)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 관, 민은 압도적인 적세에 두려움 없이 맞서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촉석정충단비' 안내판
이 비는 조선 선조 26년(1593) 6월 19일-29일 사이에 있었던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三壯士) 김천일, 황진, 최경희 및 군관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정충단의 비석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우리는 한동안 육지의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군대가 흐트러진 대오를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왜적을 제압하자, 수세에 몰린 적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아군의 10배에 가까운 병력으로 일대 반격을 펼쳤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하여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제1차 진주성 싸움(1592년 10월 5일-10일)이다.

그들은 이에 대한 보복전을 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특명에 의해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이끄는 왜군 최정예의 대군을 편성하여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왔다. 이때 삼장사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관민은 압도적인 적세에 두려움 없이 맞서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숙종 12년(1686)에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이들을 위해 촉석루 동쪽에 정충단을 세웠다.

* 필자 주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2호인 '촉석정충단비'는 1686년(숙종 12) 진주성 성내에 세워졌다.
하지만 아무리 '두려움 없이 맞서' 싸웠다 해도 너무나 '압도적인 적세'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6월 19일 전투가 개시된 이래 6월 29일까지 11일 동안이나 함락당하지 않고 대항해 싸웠다는 사실 자체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결국은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적들과 싸우다 삶을 마친 선조들의 의기 앞에 오로지 숙연해질 뿐이다.

촉석루를 둘러본다. 2차 진주성 싸움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등 최후까지 분전하던 우리 장졸들이 스스로 몸을 남강에 떨어뜨려 목숨을 버린 곳이다. 논개도 이곳에서 왜장을 유인한 후 마침내 남강 시퍼런 물길 속으로 가냘픈 목숨을 던졌다.

어디 그뿐인가. 왜적들은 "창고에 들어가 있으면 안전하다"라면서 성내에 남아 있던 백성들을 속여 사람들이 그 안에 모이자 모두 불태워 죽였다. 적들은 그러고도 모자라 닭과 개에 이르기까지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죽였다.

촉석루 붉은 기둥에서 피비린내가 솟구치는 듯한 느낌이 일어난다. 아무런 불편도 공포도 없이 느긋한 자세로 촉석루를 빙빙 돌고 있는 스스로가 나그네는 한없이 송구스럽다. 몸을 돌려 내려다보는 남강이 까마득하게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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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아래 의암은 논개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곳이다. ⓒ 정만진


만고에 이어질 여인의 꽃다운 이름이여

촉석루 아래 성곽에는 남강 쪽으로 작은 출입구가 나 있다. 논개가 왜장을 껴안은 채 절벽 아래로 내려간 길 아닌가! 논개의 뒤를 따라 걷는 듯한 마음으로, 가파르게 경사가 진 돌길을 천천히 밟아 의암(義巖) 쪽으로 다가간다. 무거운 짐을 지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논개처럼 덩치 큰 적장의 허리를 껴안은 것도 아닌데, 저절로 오금이 저려지고 발걸음에 '조심조심'의 기운이 서린다. 정녕 논개는 어떠했을 것인가.

온통 바위로 된 내리막길을 지나 강물 가까이 다가서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353호인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가 나그네를 맞이한다. 1593년(선조 26) 6월 29일 2차 진주성 전투 마지막 날 성이 함락됐을 때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2차 진주성 싸움 때 성내 사람들이 모두 죽은 까닭에 한참 세월이 흐른 뒤까지도 논개의 순국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논개의 애통한 죽음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기록은 '야담'이라는 말을 처음 쓴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譚)>이었다. 이 책을 보고 비로소 논개의 순국 사실을 알게된 정식(1683~1746) 등 진주 사람들은 1722년(경종 2) 성금을 모아 비문이 새겨진 빗돌을 만들었다. 그 후 1740년(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1688~1742)가 비와 비각을 세웠다. 비각에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 현판이 걸려 있다.

"외롭고 가파른 바위 위에 한 여인 우뚝 서 있네 (獨肖其岩 特立其女)
그 여인, 이 바위 아닌 곳에서 어찌 죽을 곳을 찾았으리 (女非斯岩 焉得死所)
그 바위, 이 여인 아니었으면 어찌 의롭다 소리 들었으리 (岩非斯女 焉得義聲)
남강 속 높은 바위여! 만고에 이어질 여인의 꽃다운 이름이여! (一江高岩 萬古芳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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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사적비가 들어 있는 비각 ⓒ 정만진

만고에 이어질 여인의 꽃다운 이름이여! 남강 속 높은 바위여! 이 바위가 아닌 곳에서 어찌 논개가 죽음을 결심했으리! 논개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 바위가 의암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었으리!

벼슬에 뜻을 둔 바 없이 명승고적 탐방과 글쓰기에 전념했던 선비 정식의 시는 참으로 읽는이의 가슴을 적신다. 정식은 '금강산을 그리며(憶楓岳)'라는 시에서 '금강산 또 찾고 싶었지만 세상일 뜻과 달라(重遊楓岳轉蹉蛇) 대관령 구름만 돌아보노니 더욱 애잔하여라(回首関雲感意多).

헐성루 앞에 있던 붉은 계수나무(歇惺樓前丹桂樹) 달빛 받아 차가운 잎새 꿈에 보이네(夢中寒葉月姿裟).'라고 노래했던 진주 선비이다. 의암사적비 앞에서 그의 시를 읽으니 오늘밤부터는 논개의 눈물이 꿈에 뚜렷하게 보일 것만 같다.

의암사적비 앞에서 물가까지 바짝 다가선 다음 '풀쩍!' 뛰면 가로, 세로의 길이가 각각 3m를 조금 넘는 의암의 윗면에 올라설 수 있다. 물길 따라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것으로 알려지는 의암은 오랜 세월마다 한번씩 뭍과 붙는데, 그때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그래서 의암은 본래 위암(危巖)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물론 위암이 의암이 된 것은 논개의 순국 이후이다. '그 바위, 논개가 아니었으면 어찌 의롭다 소리 들었으리!'

의기사에 들어 논개 영정에 참배하다

의암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온 길을 되돌아 촉석루 옆 의기사(義妓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7호)를 찾는다. 건물 이름이 '옳을 의(義)', '기생 기(妓)', '사당 사(祠)'로 이루어진 것만 보아도 의기사가 논개를 제사 지내는 사당이라는 사실은 대뜸 가늠이 된다. 의기사는 1740년(영조 16) 의암사적비가 세워질 때 함께 창건되었고, 그 이후 두 차례의 중건을 거쳤다. 오늘날 둘러보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 사당은 의기창열회(義妓彰烈會)가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56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생각해 보니, 촉석루, 의암사적비, 의기사 모두가 진주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세운 문화유산들이다. 의암 옆 암벽에 새겨진 강건한 일필휘지- '긴 강은 한 줄기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년 세월을 흐르리라(一帶長江 千秋義烈)'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뜻을 뭉쳐 향토의 역사를 올곧게 세워온 진주 사람들의 당당한 면모는 과연 천년 만년이 지나도 결코 잊혀지지 않으리라. 의기사 안에 들어 논개의 영정 앞에서 두 번 절하며, '나의 두 번째 절은 진주 사람들에게 올리는 경의의 표시임을 누가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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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사 ⓒ 정만진


덧붙이는 글 1차 진주성 전투와 2차 진주성 전투의 자세한 경과, 그리고 삼장사가 누구인가에 대한 설왕설래는 차후 기사로 다루겠습니다.
#진주성 #논개 #촉석루 #임진왜란 #김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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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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