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덩치가 커도 화면을 가리진 않는구만. 그 녀석은..
이성애
아우 정말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녀석이 왕년에 주먹질 좀 한 나의 심기를 어찌나 건드리는지. 영어로는 완전 '스포일드 촤일드'이나 혹시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있을 수도 있으니 영어로 뭐라 말해주는 건 포기하고 나의 모국어로 기선을 제압하기로 했다.
그래서 두 눈에 힘을 좀 주고 나직이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야, 시끄러워~~. 앉아. 시끄럽다구." 약 5초간 내 기에 눌린 것 같던 녀석의 기는 역시나 5초 후부터 나를 능가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오른쪽 가에 서 있는 아빠에게로 가더니 뭐라 뭐라 호소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아빠,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저 아줌마가 나 겁주잖아요. 무식한 저 아줌마는 세계 유아 인권 선언도 모르나 봐요." 알고 보니 그 아저씨는 나에게 앞으로 가서 앉으라고 권한 친절남이셨다. 경주마와 기수가 소개되자 그 녀석은 할 수 없이 내 옆 옆, 쭈의 옆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나를 쏘아 보는 또 다른 눈초리. 앗! 녀석의 엄마를 잊고 있었다. 아까부터 심하게 나대던 녀석에게 가끔씩 다가와 '쉬이이이이이' (오줌 싸라는 거야 뭐야!) 하던, 한국 중년 탤런트 박원숙씨를 닮은, 미인이었던 그의 엄마가 나를 쏘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귀여운 그 녀석을 보고는 '쉿' 소리 한 번 내준 후 손으로 앉으란 표현을 했다. 부드러운 미소를 가득 머금고.
#. 앞을 보고 달려, 왜 앞을 못 보냐구! 엉? 경주마와 기수가 소개된다. 처음 소개된 기수는 거북이 마을에 나부끼는 깃발들의 색인 하늘색과 흰색으로 만든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95%의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알았다. 권역별로 스크린을 두어 대회를 관람하는데 우리는 '거북이 마을'에 있는 스크린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당연히 다 거북이 마을 응원팀인 것이었다. 1번 레인이다. 유리하겠단 생각을 한다.
책에서 읽기론 단순히 안장 없는 말을 타고 달리는 경마대회라고 알고 있었는데 없는 것이 비단 안장만이 아니었다. 소개되었으면 자기 레인에 딱딱 서서 앞을 보고 있는 것이 인간의 육상 대회든, 개나 말의 대회든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에 17권역 중 9마리밖에 나오지 않았는데도 출발선에 맞추어 출발자세를 취하는 말이 한 마리도 없다.
2번 레인까진 그러했으나 3번 말이 들어오자 1, 2번 말이 한꺼번에 견제를 하며 "너 저리 가란다." 그러자 3번 말은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자리도 못 잡고 옆으로 섰다. 약 9번 경주마까지 소개되고 나서 어떤 한 마리가 뛰자 모두 다 같이 뒤쪽에 가서 몸을 푼다. 처음엔 육상 선수가 출발선에 가기 전 몸을 푸는 동작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망나니짓을 단체로 한 듯하다.
'베'씨 성을 가진 것으로 기억하는, 금전과 여자 문제로 엄청난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여전히 자리보전을 잘 하고 있는 이곳의 대통령인가 총리도 텔레비전에 잡힌다. 사회자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안성기씨의 위치나 외모는 탤런트 이세창을 닮은 사람인데 계속해서 텔레비전에 잡힌다. 말들이 속 썩일 때마다 사회자의 표정에서 "아! 저 근본도 없는 망나니 같은 놈들" 같은 짜증이 묻어난다.
그러나 팔리오 경주마는 사회자의 다음 스케줄로 생방송이 잡혔는지 어쨌든지 알 바 없단 자세다. 6마리는 여전히 몸을 비스듬히 돌려 출발선에 섰고 2마리는 아직도 뒤쪽에서 몸을 풀며 출발선에 나오길 포기한 듯하고 마지막 한 마리는 출발선으로 오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1번~6번 말들이 어찌나 견제를 하는지 다가오다가 도망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9번 말이 잘못해서 출발선인 밧줄을 건드리자 '빵' 출발 소리가 났고 1번~6번 말은 일단 뛰어 나갔다. 9번 말은 부정출발에 대한 충격 때문인지 기수를 떨어뜨렸다. 아니면 기수가 자진해서 떨어진 것일지도.
전 세계에서 모여든 여행자들은 한 번의 이 경기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출발하지란 생각을 하는데 출발 신호가 울렸고 말들은 뛰었다. 그런데 말들은 정면을 보며 뛰지 않았다. 주로 왼쪽 볼을 내밀고 몸은 약간 틀어서 뛰고 있었다.
"이게 뭐냐고! 이런 망나니 같은 놈들! 똑바로 앞을 보고 출발하면 될 것으로 왜 눈을 희번득희번득거리고 치뜨고 뛰냐고!"그래도 1등은 있었다. 1번 거북이 마을이 계속 선두에 섰고 결승선에도 1등으로 들어왔다. 약 5%를 제외한 사람(어린이 동반, 노약자 여행자)만이 잠잠했고 그 외엔 일어나 방방 뛰었다. 소리를 지르며. 그리고 단체 따돌림을 받던 9번 말은 당당히 3위나 4위 정도를 했던 것 같다. 맨 바깥 위치에서 심한 견제를 받으며 그 정도 순위에 들었다는 건 1등감이란 말인데... 인간들 세계나 짐승들 세계나 무엇보다 공정해야 할 스포츠의 세계는 또한 불공정하다.
너무 웃겼다. 안장도, 질서도, 상식적인 출발 자세도 없는 게 많았지만 눈도 생각도 모두 정화되는 느낌이다. 다시 거북이 마을을 지나 달팽이 마을로 들어오는데 사람들의 표정이 좀 실망한 듯하다. 우리와 많은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관람한 구역이 1등을 해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현과 쭈도 많이 흥분했다. 그러나 저 아래쪽 광장에서 전 세계 여행자가 경기장을 빠져나와 운전을 시작하기 전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 돌아가는 길은 아직 한산했다. 경기장 출구에서 들리는 다국적 비명이 들리는 것 같다.
기분이 더욱 밝아진다. 아! 사악한 인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