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워 필리버스터 응원한 당신, 지금부터 할 일

경찰국가에서 사는 법

등록 2016.02.26 17:50수정 2016.02.26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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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 나라의 비밀경찰들
근대사회가 열리고 국가가 형성되자 질서유지를 위해 경찰이 생겼다. 외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근대적인 군대도 만들어졌다. 경찰과 군대뿐 아니라 해외에서 활약하며 외국의 동향을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첩보부도 자연히 생겼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첩보부는 다른 나라 스파이와 대결하는 것 외에 자기 국민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를 비밀경찰이라 부른다.

독일에는 괴링이 이끄는 게슈타포가 비밀경찰이었다. 게슈타포는 유대인을 쫓거나 연합국 스파이를 잡으러 다녔다. 또한 게슈타포는 독일군대와 독일 시민도 감시했다. 한밤중에 들이 닥쳐서 누구든 체포할 수 있는 그들은 독일군과 독일 시민을 잠재적 적군으로 보았다.

소련에는 스탈린의 비밀경찰이 있었다. KGB라고 하는 이 비밀경찰은 없는 죄도 만드는 능력을 가졌다. KGB는 제임스 본드하고만 싸운 것이 아니다. KGB의 주 감시대상은 크렘린의 정적들이며 민중들이었다. 동독에도 있었던 공산당의 비밀경찰은 낮에는 친구라고 불렀던 민중들을 밤에 감시하고 탄압했다. 북한에는 국가안전보위부가 있다.

비밀경찰은 사회주의 국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제시대에는 불령선인을 감시하던 특별고등경찰이 있었다. 이들은 그냥 순사가 아니라, 제국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다. 그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힘을 다해 모든 위험요소를 없애느라 분주했다.

누구보다 높이 떠서, 멀리 보고, 은밀하고 악독하게 활약했다. 고등경찰은 독립 운동가들만 감시한 것이 아니다.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 내 소수자, 평화주의자, 진보주의자들도 고등경찰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2. 비밀경찰의 성실함
일본의 고등경찰은 순사 중에서 가장 애국심이 많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순수한 애국심과 사명감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자신들의 희생이 제국을 지키고 자기 가정과 미래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들이 감시하고, 추적하고, 체포하고, 탄압했던 일은 결과적으로 소수자의 목소리를 다 죽여버려서 일본 사회를 경도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일단의 군인들이 주도해서 벌인 태평양전쟁과 무모한 대미전쟁 등 군국주의의 막바지로 치닫던 일본제국에서 그 때 가장 필요했던 브레이크는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판단과 다른 목소리였다.


그러나 충직하고 성실한 고등경찰은 이 마지막 브레이크를 제거함으로써, 일본 패망의 길을 결국 막지 못하고 만다. 자기 국민을 사찰했던 비밀경찰이 결국 제국 스스로의 다양성을 없애고 멸망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3. 대다수의 사람들과 민감한 사람들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비밀경찰의 존재에 신경을 쓰지 않았을지 모른다. 자신들의 통신이 도청 당하고 우편이 검열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숨죽여 살면 되는 줄 알았다. 밤중에 방문을 두들기고 검은 외투의 사람들이 집에 들어와 다짜고짜 체포하고 무심코 했던 말을 빌미로 반동분자라고 몰아붙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독방에 갇혀서는 변호인도 없고, 해명할 기회도 얻지 못했을 때에야 비밀경찰이 얼마나 무서운 악마로 변할 수 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각 시대마다 이런 위험을 미리 알아차릴 수 있는 소수의 민감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에서 백장미단으로 투쟁했던 숄 남매가 그랬고, 목사와 신학자이면서 히틀러 암살계획을 세웠다 발각되어 처형당한 본 회퍼 목사가 있었다. 살아남은 서독의 사람들은 게슈타포를 만들지 않고 첩보활동을 허락하더라도 권한을 축소하고 국민의 감독 아래 두기 위해 노력했다.

일본의 비밀경찰인 고등경찰을 피해 독립운동가들은 피해다니며 풍찬노숙을 개의치 않았다. 신사참배 반대 등 신앙문제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복종 문제가 되었을 때, 주기철 등은 숨지 않고 교회에서 여전히 설교하고 비겁한 목사들에게 호통쳤다. 스스로 기꺼이 고등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저항하며 뜻을 꺾지 않고 순사들을 꾸짖은 뒤에 꽃이 되었다.

4. 비밀경찰을 소환하는 나라
친일청산이 덜 된 것이 맞나 보다. 일제시대 고등경찰, 고문실을 기억하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국정원을 해외첩보부가 아니라, 시민까지도 감시하는 비밀경찰로 만들고 싶어한다. 이번에 상정된 테러방지법의 주요내용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국정원을 고등경찰로 만들겠다는 말이다.

테러방지를 핑계로 국내요인 사찰부를 확장하여 귀찮은 국민의 사생활을 임의로 감시하고 수집하고 영장없이 체포하고 언제까지고 테러리스트로 분리하여 관리하겠다는 욕망의 표현이다. 이 법안 통과를 강하게 요구하는 대통령은 자기 수족 같은 국정원의 힘을 더욱 키워 자기를 안전하게 보필할 충직스런 게슈타포와 KGB 겸 고등경찰로 만들어 요긴하게 쓰고 싶은 것이다.

나는 수정되기 전의 <테러방지법>원안을 보고 화가 났었다. 국정원이 테러업무를 주관하되, 헌법에 보장된 영장도 무시하여 무제한 도청, 감청, 수색을 허용하고, 심지어 군대동원권까지 갖게 하려 했다. 그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조항들은 테러방지를 빙자해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부활시키려는 것임에 다름없었다.

그 다음에 나는 두려워졌다. 백주 대낮에 경찰국가를 갖겠다는 야심을 당당히 드러내고도 당당한 그 자세가 무서워졌다.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하는 새 얼마나 야당이 약해졌고 여당은 어떤 법안을 내놓든지 뜻대로 이루어질 것을 장담했으면 이를 대담하게 본회의에 올렸을까를 생각하니 떨렸다.

아니나 다를까 야당은 군부대 출동 등 몇몇 명백한 독소조항을 제거할 수 있었을 뿐, 여전히 임의 도감청, 계좌수색이 가능하여 경찰국가로 가는 것이 뻔한 테러방지법 상정을 막지 못했다. 다수당인 여당은 국회의장을 회유해서 고등경찰 부활법을 직권상정으로 밀어붙였다.

소수인 야당은 고작해야 필리버스터로 지연시킬 뿐이다. 위헌요소가 많을 뿐 아니라 법으로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국정원의 야심이 분명한 이 법에 대해 야당의원들은 정연한 논리와 감동으로 국민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번 필리버스터 토론을 통해 일부 국민들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처럼 좋은 기회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냉철히 말하자면, 필리버스터는 법안 통과 전에 다수당의 횡포에 저항하여 울부짖는 소수당의 울음일 뿐이다. 국민의 여론이 재협상을 강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새누리당 입장에선 더 이상 수정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새누리당이 자발적으로 양보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불행히도 결국 직권상정된 법안은 통과될 것 같다.

5. 암울한 전망
어떤 이들은 필리버스터를 통해 국민들이 깨어나고 총선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여전히 종편에 사로잡힌 대다수의 국민들의 시선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지지하겠다'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고정적인 지지층이 있는 이상,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오는 4월 총선에서도 야당은 여전히 소수당에 머물 것이다. 더군다나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과 사드 배치 등 국제정세도 야당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이 정부를 순진하게 바라보면 안 된다. 이처럼 탐욕적인 국정원 민간인 사찰 합법화 법을 내놓는 정권이다. 댓글부대와 국정원의 공작으로 대통령이 되면서도 뻔뻔하게 3년 내내 무섭게 으름장 놓는 대통령이다. 2년 전 무려 300명의 목숨이 물에 빠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정권이다.

이런 정부에 국민은 지난 총선과 보궐선거 모두 새누리당을 지지하여 원내 과반수를 만들어 주었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정부가 되었다. 이 무서운 사람들은 이제 정녕 경찰국가로 이행하기 원하는 것이다. 막을 길이 별로 없다.

수도권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60대 이상의 유권자의 수가 젊은 유권자의 수보다 많아졌다고 한다. 설사 야당 의석이 조금 늘어도 여전히 쉽지 않다. 어렵사리 19대에서 통과를 막더라도 20대 국회가 열리면 다수당이 밀어붙이는 그대로 통과시켜야 할 미래가 쉽게 점쳐진다.

그러니 국정원이 테러방지법의 옷을 입고 비밀경찰로 탈바꿈 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헌법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를 보호해 주는가? 소수당인 야당들은 우리를 지켜줄 수 있을까? 무기력하기만 했던 광화문 집회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몸부림일까? 카톡부터 탈퇴하고, 아이폰으로 바꾸며, 구글메일로 이메일 주소를 바꾸는 등 각자도생하며 혹시라도 테러리스트로 오인 받지 않기를 기원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진짜로 이민을 알아봐야 할까?

6. 이달에 할 일
밤새워 필리버스터를 보면서 응원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정신차리고 다시 들으면 필리버스터 무제한발언에 나온 의원들의 주옥같은 연설은 백조의 마지막 노래처럼 구슬프다. 대통령 선거나 세월호나 정치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국정원이 주인이 되는 테러방지법은 우리 모든 사람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남의 일이 아니다. 경찰국가에서 비밀경찰의 관심에서 벗어날 곳이란 없으니까 말이다. 비밀경찰 시대를 피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아지는 지금, 더 늦기 전에 4월 이후를 대비하여야 한다.

개인이 선택할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힘을 모아 대항할지, 숨어서 도망 다닐지, 꼼짝 못하고 죽어지내며 좋은 날 오기를 기다릴지, 아니면 확대 개편될 국정원 '대테러대책팀' 직원 모집에 응시할지를 결정할 시점이 가까워 오는 것 같다.

안전한 사람들끼리 함께 모여 다가올 비밀경찰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지 준비할 때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 무슨 수가 나올 것이다. 뾰족한 수가 없더라도 함께 폭풍우를 헤쳐 나갈 친구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의 이러한 어두운 전망이 못난 자의 기우와 설레발로 그쳤으면 차라리 좋겠다. 정말로 그러하길 바란다. 간절히.
#경찰국가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국정원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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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애틀 드림교회 목사입니다. 김범수 목사는 건국대에서 법학과 총신대원 및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공부했습니다. 성경공부와 교회의 회복, 소형교회운동 그리고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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