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아공사로 마스크를 쓰고2016년 3월 1일 명동성당을 찾아 40년 전인 1976년 3월 1일의 명동성당을 떠올렸다.
지요하
1967년 3월 1일을 잊지 못한다. 시골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세 소년 시절이었다.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는 만세소리를 들었다. 삼일절 기념 방송이었다. 나도 만세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밖으로 나갔다.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책방에 들어가 <현대문학>이라는 문예지를 처음 만났다.
책장을 여니 '제1회 장편소설 현상공모'라는 사고(社告)가 나와 있었다. 책을 살 돈이 없어 그 사고를 종이에 적었다. 문방구에서 원고지를 한 권 사 가지고 들어왔다. 그 날 밤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을 쓰면서 삼일절의 만세소리를 떠올리곤 했다.
4월 10일, 1080매의 장편소설을 탈고했다. 탈고와 함께 탈진이 왔다. 며칠 동안 끙끙 앓았는데, 누님이 포장을 하여 현대문학사로 보냈다고 했다. 그 소설은 '당선후보'까지 올랐다가 결국 낙선이 되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작가가 될 결심을 하게 됐다.
그 후 무수히 낙방을 거듭한 끝에 정확히 15년 후인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작가라는 칭호를 얻었다. 등단의 꿈을 이루었을 때 삼일절의 만세소리를 떠올렸다. 삼일절의 만세소리 때문에 소설을 쓰게 되었고, 글쟁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평생 동안 삼일절의 만세소리를 상기하며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도 어렴풋이 했다.
1975년 모 중앙일간지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을 넣었다가 또 한 번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셨다. 소설을 썼을 때는 자신감이 충만했는데, '민청학련' 사건으로 긴급조치가 발동되는 등 언로가 통제되는 시대상황 때문에 은근히 불안했다. 불안감이 적중한 듯이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신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몇 년 후 그 신문사를 출입하는 선배 작가로부터 놀라운 말을 듣게 됐다. 심사위원들이 내 소설을 당선작으로 뽑았는데,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편집국장이 비토를 해서, 문학담당 기자가 최종심에 오른 4편중에서 다른 한 편을 선정하고 세 분 심사위원의 양해를 얻어 심사평을 써서 올렸다는 얘기….
결국 1970년대 중반의 유신독재, 언로가 막힌 시대상황으로부터 오는 피해를 나도 고스란히 겪은 셈이었다. 시골에서 근근이 생활하는 작가지망생으로 민주화 투쟁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유신독재에 저항하며 살았다. 신문사 편집국장 데스크에서 밀려나는 소설을 썼을 정도로, 나 역시 청년 시절부터 시대상황에 민감하게 눈과 귀를 열어놓고 살았던 셈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유신독재 시절의 상황들, 1976년의 '3‧1민주구국선언' 사건도 명확히 기억할 수 있게 됐다.
나는 5공 군사정권 초기인 1982년 어렵사리 등단의 꿈을 이루었고, 비록 변변찮은 문사일망정 '양심의 눈'을 지닌 작가로 살아가려고 올곧게 노력해왔다. 비록 큰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늘 삼일절의 만세소리를 상기하며 작가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 한해 3월을 살면서 다시 한 번 가져보는 생각이다.
명동성당에서 울려 퍼진 만세소리